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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화계사 대방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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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0 조회165 작성일2025-03-11 16:01:16.0

설명(자막)
저는 여기 화계사에 거주하고 있고 또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선덕 스님이라고 합니다. 본래 불명(佛名)은 볼 견(見)자, 향기 향(香)자 견향 스님이라 부르고, 직책은 ‘선덕’이라고 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계사에서 제가 거주한 지가 1958년에 여기 와서 지금까지(2024년) 거주하고 있습니다.

‘선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선(參禪)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르침을 스님들에게 내려서 공부를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절의 최초 창건은 이제 고려 광종(光宗) 2년(950)에 창건이 되어서, 그 때는 부허동(浮虛洞)이라는 동에 보덕암(普德庵)이라는 암자(庵子)로 있다가 보덕암에서 화계사(華溪寺)라는 이름을 갖고서 이리로 이전했는데, 그러니까 중종 17년(1522)에 이리로 옮깁니다. 옮겨서 이제 그 때 왕가에서 이 절(화계사)을 많이 다니게 되어서, 그 때는 화계사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절’이라는 이름으로 갖고서 오게 됩니다. ‘궁절’이라고 했지, ‘화계사’라고 부르지 못했고. 왕가에서 다닐 때는 대왕대비마마나 이런 양반들이 밤에 몰래 다니고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에, 그리고 상궁들이 많이 다녀서 이제 이걸 ‘궁절’이라고 그렇게 불렀답니다. 그러다가 이제 ‘6.25 사변’ 이후로다가 ‘화계사’라는 이름을 찾아가지고, 자연적으로다가 시민들이 화계사로다가 불렀습니다.

근래에 이제 많이들 아시다시피 숭산행원(崇山堂行, 1927~2004) 선사(禪師)라는 스님께서 주석(駐錫)하시면서, 이 절(화계사)이 전과는 다르게 참선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바뀌면서 외국 불자(佛子)들이 많이 오셔서 공부하는 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수행 공간을 그 따로다가 마련해서 외국 스님들과 외국 불자들에게 참선 수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고, 주로 다른 절과 같이 염불(念佛)하고 기도하고 하는 수행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별하다고 할 것 같으면, 외국 불자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 자리가 대방(大房)’이라고 하고 있고, 또는 ‘큰 방’이라고도 우리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불교 용어로 가르치면 ‘판도방(判道房)’이라고도 합니다. 판도방이라고 하는 건 ‘도를 판단하는 방이다’ 그래서 판도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 방’ 또는 ‘대방’ 또는 전문적인 용어로 부를 때는 ‘판도방’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수행 공간’으로서 매달의 아침저녁으로다가 앉아서 참선 수행도 하고, 그런 공간으로 다 되어 있습니다.

예 스님입니다. 주지로다가 있으면서 기도를 많이 하셔서 용선 스님하고 범운 스님이라고 하는 분들이 열심히 여기서(대방) 기도정진 해 가지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898)의 시주(施主)를 받아서 다시 중축(增築)하게 되어 가지고 그 분들에 의해서. 여기가 그 전에 한번 소실(燒失)되어서, 불로 인해서 소실된 것을 흥선대원군의 시주로써 범운 스님이나 이런 분들의 지극한 기도정신으로써 이 절이 다시 증축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 인연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 때 당시에 제가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한 건 모르겠습니다만은. 흥선대원군의 아버님[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 1836)]의 묘를 쓰는데 있어서 여기 계시던 범운 스님이나 용선 스님 같은 분들이 상당히 ‘지연(地緣)’이 있어 가지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천거를 해주고 그랬다는. 구두(口頭)로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너무 감명을 받고 자기 아버지 묘를 좋은 곳에 쓸 수 있도록 천거를 해 주셔서 고맙다는 뜻에서 이제, 화계사와 깊은 인연이 맺어서 시주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대개 이제 목조(건물)들은, 더군다나 고옥(古屋)들은 다 못을 쓰지 않고서 나무로다가 이렇게 파서 맞춰가지고서 건축물을 올리고 그랬죠. 그래서 이런 ‘큰 방’ 같은 것은, 이런 대방은 특이하게 목수들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어서 ‘이렇게 이렇게’ 지어라 하면. 그 사람들이 옛 것을 살리기 위해서 특이하게 공법을, 못을 쓰지 않고 모두가 다 이렇게 건축을 지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흥선)대원군도 여기 왔다갔다 하시면서 출석하셨다고 그러고요. 그리고 추사 김정희 선생님이나 그런 학자들이 대원군 이런 분들이 모여서, 같이 글도 논하시고 시회(詩?)도 하시고 그런 인연으로서, (흥선)대원군 친필이나 추사 김정일(金正喜) 선생 친필 또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 선생의 글씨가 남겨져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화계사에 오셔서 ‘보화루’라는 게 이 뒷방이 보화루인데. 거기에서 이제 누각 같이 되어 있어 가지고 거기서 글을 많이 논하셔서, 그러면서 이제 자기네들이 화계사 현판도 써주고 글도 써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뒤에 현판. ‘법회도’와 또 ‘화계사’라고 쓴 것이 흥선대원군의 친필입니다. 추사 선생의 글씨는 지금 주지스님 방 쪽에 걸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방은 본래 우리가 여기서 그 전에는 ‘생활 공간’과 ‘수행 공간’으로 같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생활 공간’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여기서 잠을 자고, 밥도 여기서 먹고, 같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먹고 그리고 또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수행 공간 같이, 그전에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염불를 하고 참선을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민간인들하고 같이 있기 때문에 종소리, 목탁 소리가 잠자는데 새벽에 들리면 안 좋다고 그래서. 목탁 치는 것과 종 치는 것, 또 북을 치는 것을 시간을 낮춰서 내려서 (새벽)5시로다가 요즘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방은 낮에는 요새 신도님들이 많아져 가지고서 여기에서 행사 같은 것들을 많이 치르게 되고, 새벽에 밤에 우리가 공부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서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예부터 ‘수행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제가 1958년에 여기 와서 이 방[대방]을 큰 방으로 사용함에 있어서, 이제 불을 떼야 하니까 나무를 하다가 불을 떼고 그래서 스님네들이 춥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고. 밥도 또 여기서 해 먹고 해서, 바로 이쪽이 큰 부엌이었는데 나무를 하다가 불을 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게 지금 제가 있지만서도 이것이 수행자들의 ‘수행 공간’과 ‘생활 공간’으로다가 있으면서, 여기서도 기도하고 정진하고 하느라고 우리가 이 공간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는데. 지금 이게 너무 작아서 요사채(寮舍채)를 많이 짓고 있습니다만서도 지금도 이것은 아마 서울시에서도 그렇지만, 이게 ‘문화재 공간’으로다가 아마 등록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건축 양식이나 모든 걸로 봐서도 우리가 이걸 아끼고 사랑해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영원히 잘 보존하려고 지금 애쓰고 있습니다.
개요
구분
종교
지역
강북구
분야
도시관리
시기
2024-10-16
출처
2024 서울미래유산 발굴조사 및 아카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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