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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이리자한복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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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0 조회352 작성일2023-12-22 16:51:40.0

설명(자막)
저는 현재 ‘이리자 한복’의 대표를 맡고 있는 황의숙이라고 합니다. 어머님의 대(代)를 이어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프라이드(pride)’가 대단하시고요. 자기한테 엄격하세요. 그리고 자녀들한테도 매우 엄격하시고요. 단 남편한테는 굉장히 어리광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리자’라는 이름이 본명은 ‘은음’이신데, 아버지는 서울에 계셨고 어머니는 대전에 계셨거든요. 그래서 떨어져 계시던 시절에 서로 부르는 닉네임입니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한의사셨기 때문에, 종갓집이었기 때문에 늘 한복을 입으셨어요.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4형제인데, 그러니까 외할머니서부터 숙모들하고 같이 옷을 만들 때, 어머니가 늘 옆에서 가위질을 하셨대요. 그리고 옷감을 갖고 놀으셨고, 고등학교 때부터 당시 교복 만들어서 입으셨고. 그리고 결혼하셔서 저희 할머니께서 권사님이셨거든요. 그러니까 교회 분들이 ‘사랑방’처럼 모여가지고 한복을 만들어 입고 하셨어요. 그러실 때 어머니가 옆에서 같이 한복을 만들면서, 시어머니로부터 굉장히 칭찬을 많이 받으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렸을 때 저희는 늘 명절 때는, 엄마가 한복을 만들어주셔서 한복을 입고 자라서, 저는 당연히 엄마가 한복을 잘 만드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어요.
1960년대 중반부터시죠. 그 이전에는 사업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버님께서 교육자셨고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그 때 부부 동반에서 나갈 때 어머니가 한복을 만들어가지고 입고 나가셨는데, 주변에서 이쁘다고 자꾸 부탁을 하셨어요. 그러다가 육영수 (陸英修)여사께서 운영하시는 ‘양지회’가 있었어요. 그분들이 알음알음으로 부탁을 하셔서, 그 때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 때 ‘아이디어 하우스’라는 뜻은 알았어요. 뜻은 알았는데 엄마가 왜 답십리에 허름한 데서 이런 ‘영어 명칭’을 사용할까? 그랬더니 웃으시면서 ‘옛날에는 한복하면 조그맣게 간판에다가 ’한복‘ 이렇게 적어놓고, 돋보기안경 끼고 할머니들이 꾸부려서 하는 걸로 아는데’. 일단 영어로. 엄마는 ‘아이디어’가 풍부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집’. 그래서 ‘아이디어 하우스’이고. 그리고 ‘나는 그만큼 자신 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어머니가 누가 오시면 ‘아주머니’라는 명칭은 못 부르게 하셨어요. ‘선생님’. 그리고 나서 ‘패션쇼’ 시작하시면서부터 ‘디자이너’로. 그 때 앙드레 김(Andre Kim, 金鳳男) 선생님의 영향이 많으셨어요. 앙그레 김 선생님이 옆에서 어머니를 굉장히 많이 격려해 주시고, 어머니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그 때부터 당신도 떳떳하게 ‘디자이너’ 명칭을 쓰시기 시작하셨어요.
그 때 저희가 살고 있었던 데가 답십리예요. 아버님이 정릉에 경일(京一)중·고등학교를 가시면서, 그곳에 친척들도 다 같이 있었고, 터전이 거기였습니다. (이후 답십리) 가게가 헐리게 되면서 신설동으로 오셨어요. 신설동에서 ‘하이센스’라는 명칭으로 한복집을 잠깐 하셨어요. 그 때 ‘범국민 복장 콘테스트’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거기에 옷을 출품하시기 시작하면서. 그 때 ‘최우수 민속 의상상’을 타셨거든요. 그 때부터 매스컴에 어머니가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가게가 부득이하게 주차도 돼야 되고, 여러 가지로 한가운데에 있어야 되는 거예요. 시내 한복판에. 그래서 지금의 ‘국제극장’ 자리. 그 옆에 가게가 새로 나서 거기를 옮기시면서 ‘이리자 한복’으로 바꾸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1995년도에 이리로 이사오면서 빌딩을 5층으로 지으시면서, 이리자 한복으로 정착하신 것이죠.
앙드레김 선생님하고는 어떤 인연이냐면 지금 현재 저희 지금 여기 미래유산 자리가 앙드레 김 선생님 댁이었어요. 그리고 저 위쪽으로, 지금 ‘현대화랑’ 있는 쪽이 앙드레 김 선생님 샵(shop)이었고요. 그래서 이 집을 저희가 구입하면서 서로 인연이 됐고 그 다음부터는 앙드레 김 선생님하고는 같이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같이 패션쇼도 하게 됐고. 그런 인연이 있어서 앙드레 김 선생님하고 많이 연관이 있게 되었습니다.
1975년도가 제1회 미스한복 패션쇼인데 조선호텔에서 제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 때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였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하셨을 때 그 전부터, 그러니까 ‘이리자 한복’ 할 때부터 만드셨던 옷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어머니가 패션쇼를 할 수 있었던 옷 디자인은. 무엇이 기본 바탕이었냐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달력이예요. 달력, ‘한복 캘린더(calendar)’에 다 한복 모델들이 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그것을 어머니가 매년 하시니까, 오랫동안 거기서 만들어냈던 제작 디자인했던 옷들이 있고요. 그리고 나서 텔레비전에서 아마 지금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별당아씨’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그 드라마에 복식(服飾)을 어머니가 담당하시면서 연예인들하고, 그리고 ‘화보 촬영’, ‘달력 촬영’. 이렇게 하시면서 본인이 수도 없이 옷을 디자인해 내셨던거죠. 그것들을 모아서 패션쇼를 하시게 되었고. 그것이 반이 되었고, 나머지 반은 외할머니께서 그동안 만들어 놓으셨던 옷들이 있어요. 그래서 옷감, ‘전통 옷감’을 활용을 하셔서 그걸 한 파트로 하고, 그래서 그 당시에 어머니가 학자들로부터 어떻게 이렇게 좋은 옷감 갖고 활용을 할 수 있는지. 굉장히 칭찬을 많이 받으셨었습니다.
어머님이 저는 좀 앞서가셨던 분이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한복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하셨거든요. (그리고) 한복의 부흥이 일어난 것과 국가의 ‘경제개발 5개년’ 정책과 같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니까 한복 입으실 기회가 많아지고, 해외에 공간들이 생기면서 외국에 나가서 한복을 입으셔야 되니까요. 그래서 수요가 많아지시고, 그 다음에 대중문화하고도 같이 겹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러실 때마다 돈이 생기면 그렇게 옛날 옷들, 의복과 관련된 골동품들을 그렇게 수집을 하셨어요. 그리고 인간문화재, 각 분야 관모(冠帽) 종류라든지 신발이라든지 장신구. 이런 분야들의 선생님들한테 1년간 생활비를 대시면서 관모들을 다 제작을 하셨어요.(12:19) 그러니까 그렇게 갖고 계시는 것들이 많다 보니까, 당신이 ‘전시관’을 하셔야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셨대요.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그랬더니. (당시) 저하고 같이 복식학회에서 해외에, 학회 활동을 하거든요. 가셔서 보시면 웬만한 나라는 다 크건 작건 자그마한 ‘복식관’들이 다 있는 거예요. 그걸 보시고 우리나라도 꼭 해야 된다. 더군다나 우리는 경복궁 맞은편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면 궁중생활을 알고 싶어 하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의복 생활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전시관을 해야 된다. 그래서 애초부터 이 건물을 ‘전시관’으로 만드신 거예요. 그래서 1층 사업하시고 234층, 5층에서 기거하시고.
끈기를 갖고 해야 된다. 소질이 물론 중요하지만, 한복은 꼭 끈기를 가지고 차곡차곡 밟아나가야지만,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고. 그리고 손님한테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옷. 그리고 어머니가 한복 가리키면서 (제자들)이분들도 나가서 이제 한복 샵(shop)을 열 거 아니에요. 그럴 때 항상 하셨던 이야기가 손님 비위에 맞춰서 돈을 벌기 위한 한복은 절대 하지 말라고, 저한테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셨어요. ‘네가 학교 있다가 여기 오면 사회생활을 모를 수도 있다.’ 대신 손님들한테, 모든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기를. ‘돈을 벌기 위해서 손님한테 이끌리지 말고, 그 분들한테 자랑스럽게. 우리 집 옷을 입으면 정말 이쁘다는, ‘프라이드(pride)’를 갖출 수 있는‘. 그런 디자이너가 되고, 사업은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지금 다들 걱정하시는 것이, 한복 수요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 때도 다 빌려서 입고, 만들어서 자기 한복을 갖고 있지를 않아요. 갖고 있지를 않기 때문에 한국 맞춤 제작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성인 대상으로 혼례복 대상으로 하는 한복 산업은 지금 많이 이제 주춤해졌고. (하지만) 유아복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리고 시장이 많이 지금 확산되어 있어요. 그래서 전통적이면서도 현재의 색상, 색감과 트렌드에 맞게 고급 어린이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어렸을 때부터 한복은 ‘예쁜 옷’, ‘입고 싶은 옷’ 어디 가서 입었을 때 ‘칭찬받는 옷’ 그렇게 옷을 만들어서 앞으로 제작하고 보급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원래는 여기다가 어머니 전시관을 했었잖아요. 지금 그 전시관은 어머니 ‘유지(遺旨)’대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다 기증을 해서, 그곳에 ‘이리자 한복기증관’이라고 별도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365일 가서 볼 수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리자 한복’의 변형을 보시려면 거기 가서 보시면 되고요. 여기 (광화문)‘이리자 한복’은 제일 먼저 오셨을 때에 어머님의 손길, 지금 저쪽에 보시면 어머님이 제작하셨던 작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직접 제작하셨던 옷감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한복의 색감, 여기 입수한 거 보시면 다양한 색과 다양한 소재. 그리고 그 색감과 소재가 어떻게 어우러져서 이렇게 디자인이 되었는지. 젊고 어린 학생들이 와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색채에 민감하고, 예술적인 DNA가 있는지 그것을 알고 확인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그런 공간으로 (알고) 많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요
구분
상점 , 상징물
지역
종로구
분야
시민생활
시기
2023-10-01
출처
2023 서울미래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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