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서 을지로까지 Part3. 공구상가와 미싱거리 그리고 오장동 함흥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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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3. 공구상가와 미싱거리 그리고 오장동 함흥냉면
[입정동 철공소 골목]
전국의 실내장식, 건축 관련 업자들이 커다란 블록의 아래를 걷던 길은 청계, 대림상가를 거치면서 위로 올라선다. 바로 앞으로 세운상가가 있고, 거리에는 각종 기계와 공구를 펼쳐놓은 상가들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고, 무언가 신기한 것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로 한 번쯤 기웃대며 찾던 세운상가, 공구상가 그리고 철공소 거리가 이곳이다.

길가에서는 집과 공장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어디에 쓰는지 신기하기까지 한 각종 공구를 볼 수 있다면, 안쪽으로는 단계별로 공정을 담당하는 가게들이 모여서 특유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입정동 철공소 골목를 만날 수 있다. 입정동이라는 이름은 갓을 만들던 장인들의 집에 우물이 있어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설계도만 주면 탱크도 만든다는 명성은 이 작고 어두운 골목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삭막하면서도 우리 근대의 친근함을 보여주는 듯한 골목과 간판은 영화의 단골손님이기도 해서, 영화 ‘피에타’, ‘도둑들’, ‘감시자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을지로 미싱 특화 거리]
공구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청계천 배다리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남산을 향해 길을 오르면 공구상가와 뒤섞이듯 미싱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을지로 미싱 특화 거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곳의 거리는 이런 매력이 있는 듯하다. 독특한 상가의 상품들을 구경하면서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상품들의 종류가 바뀌고 다시 한동안 이어지던 전시는 파노라마처럼 또 다른 분야로 넘나들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의 근대가 있고, 삶이 있으니 마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듯한 소소한 즐거움이 거리에 가득한 것이다.
공구도 그렇지만 미싱만큼 우리 삶에 가까운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미싱, 재봉틀이 하나씩 있었고, 분가를 하는 딸들은 자기가 사용하던 것들을 골동품처럼 모셔가기도 했었다.

(주)부산정기가 일본의 부라더 공업과 합작하여 1965년 ‘부라더 미싱’을 출시하면서 미싱의 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미싱은 혼수품 목록 1호였고, 80년대 말에는 ‘홈패션’이라는 유행을 만든 당사자였다. 거기에도 최근에는 20~30대 사이에서 ‘핸드메이드’와 자수가 인기를 끌면서 다시 미싱과 바느질은 젊은 층부터 어머니 세대까지 함께 즐기는 생활 취미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산업적인 부침이 적지 않지만, 이곳 을지로 미싱 거리는 1950년대부터 자리 잡은 200여 업체가 시대에 따른 미싱과 산업 그리고 생활의 변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까지 훑어보기는 어려워도, 거리에 다채롭게 전시된 미싱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오장동 함흥냉면]

미싱 거리를 지나면 가구거리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 중구청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안으로 들어서면 그 유명한 오장동 냉면거리가 나온다. 그리고 입구이자 상징과도 같이 오장동함흥냉면의 커다란 건물이 여름 한낮의 더위에 지친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 1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다. 그 줄은 금방 사라졌다가 다시 그만큼의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빠른 순환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 대표 음식인 회냉면을 한 그릇 시켜본다. 약간 밝은 갈색으로 마치 막국수처럼 보이는 냉면 한 그릇이 빠르게 올라온다.
보기와는 다르게 질긴 면발이 독특한 식감을 전해준다. 특히 면을 가득 덮은 회는 냉면을 다 먹어도 남을 정도로 푸짐하다. 어디를 가나 냉면집은 가장 쉽게 만나는 음식점이 되었고, 거기의 회냉면이라면 비빔냉면에 회를 약간 고명으로 얹은 정도인데, 이곳은 회와 냉면이 서로 가득하니, 바로 이것이 회냉면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1958년 개업하여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냉면 전문 식당이라는 명성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닌 듯하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창업주는 1953년 현 위치에 냉면집을 개업했다. 간판 없이 문을 열었지만, 배고픈 서민들은 故한혜선 할머니의 함흥냉면을 찾으면서 ‘오장동에 함흥냉면 잘하는 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함흥냉면은 ‘실제로 함흥에는 없는 음식’이라고 한다. 함흥냉면은 함경남도 흥남에서 월남한 故한혜선 할머니가 함흥식 ‘농마국수’를 만들어 팔면서 ‘함흥냉면’이라 부른 데서 시작된 메뉴라는 것이다. 오장동 함흥냉면집이 함흥냉면의 시초가 되는 이유이다. (출처 쫄깃한 면발로 즐기는 함흥냉면/김미영/Riss)
사실 오장동 냉면거리는 인근 지역에서 근무하던 직장인들에게 여름을 나는 특별한 이벤트와 같은 곳이다. 휴가를 며칠 앞둔 시기는 참으로 직장인들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이기도 하다.
그때쯤 조금 늦은 점심을 단체 회식으로 잡고, 전체 직원이 이곳 오장동 냉면집을 점령한다. 시끌시끌하면서 시원하고 즐거운 점심은 다시 휴가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과 생기를 전달해주었던 추억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때 젊음을 보낸 이들이 그 기억을 찾아 이곳을 다시 찾는다. 결국 오장동 함흥냉면은 냉면 한 사발과 당시의 추억 한 그릇을 함께 먹는 공간이 된 것이다.
오장동에서 시원한 냉면으로 땀을 식히고 다시 사거리로 나온다. 다시 남산 쪽, 동국대학교 언저리로 올라가면 오토바이 거리가 나온다. 그리고 건너편, 중구청 뒤편으로 한없이 펼쳐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충무로 인쇄골목을 만나게 된다.

구불구불한 인쇄골목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참으로 복잡하고도 한국적인 곳임을 알게 된다. 길이 만들어지고, 집이 세워지는 서구와 다르게, 한국의 길은 집과 집 사이에 통로가 바로 길이 된다. 그리고 길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휘어지며 이어지고, 마지막에 집으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을지로 인쇄골목이 딱 그렇다. 물론 예전에 비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포장되면서 많이 정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작은 골목이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건물로 끊겨버리는 곳이 여전하다.
그곳을 오갈 수 있는 교통 편은 삼륜 오토바이나 튼튼한 짐 자전차가 유일하니, 가장 인기 있으며 여전히 길가를 가득 채우는 풍경이 되고 있다.

이곳에 처음 인쇄기가 돌아가기 시작한 게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경성극장, 낭화관, 중앙관 등이 을지로에 등장할 때와 그 시기를 같이 한다고 한다. 영화 전단지를 찍기 위한 인쇄소들이 그 시초인 셈이다. 아직도 인쇄 관련 용어들이 일본어로 범벅이 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역사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그리고 한국 전쟁 후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인쇄골목은 1984년 을지로 개발로 을지로에 있던 인쇄업체 500여 곳이 충무로로 이전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잡지나 신문 그리고 출판과 관련된 이들은 이곳 인쇄골목을 한 번쯤 거쳐 가기 마련이다. 인쇄골목이 아니라도 건너편에 함께 자리한 사진 골목과 함께 이곳은 잉크와 이미지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한 번쯤 거쳐 가야 하는 유치원이자 대학과 같은 곳이 되어 있다.
나의 첫 직장도 그랬다. 처음 일을 배울 때 제대로 된 기획을 위해서는 인쇄와 제작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에 속아 첫 몇 달을 이곳 인쇄골목에서 지냈다. 가을에 입사해 용어가 조금 익숙해지는 겨울을 이곳 을지로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넘겨야 했다.
이곳은 특성상 커다란 공장보다는 인쇄기 하나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고, 그래서 작은 기업이나 단체의 조그만 홍보물이나 책자가 쉴 새 없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막다른 골목의 건물에 들어서면 커다란 인쇄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고, 옆에 난 작은 계단을 올라서면 노란 백열등 아래 그보다 작은 인쇄기에 나이 지긋한 사장님이 인쇄기를 돌리고 있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지금은 4도, 5도 인쇄기로 한 번에 칼라를 만들어내고,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스위치를 조작했지만, 당시에는 1도 인쇄기로 4번을 돌려야 하나의 칼라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종이가 몇 장 찍혀서 나오면 위치가 정확히 맞는지 확인하고 조금씩 조정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서 그렇게 1도씩 찍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수작업이 가장 깔끔하고 좋은 인쇄물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걸 보면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렇게 복잡한 틈바구니에서 인쇄를 시간 내에 완료하기 위해서는, 특히 대한민국의 모든 인쇄물은 시간이 촉박하므로 필름에서 인쇄판으로 만들어지면 그걸 들고 인쇄소 사장님에게 최대한 빨리 가져다주어야만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만약 종이가 필요하면 지나가던 자전거를 세워 급하게 종이를 규격에 맞게 잘라서 공급을 해줘야 했고, 또 잉크가 마를 틈이 없이 인쇄물을 커다란 수레에 함께 싣고 제본소를 옮겨야 했다.
그러면서 밤새 인쇄기 옆을 지키면서 중간중간 인쇄물을 확인하기도 하고, 사장님의 말벗이 되어주기도 하고, 눈 내리는 겨울에 지나가는 자전거를 붙잡기 위해 1시간씩 종종거리면서 헤매기도 했다. 가끔 밤새워 작업을 할 때는 명보사거리에 있는 수타 자장면 집에서 야참으로 버티기도 했다.
그렇게 인쇄와 제작을 배운 몇 년 뒤, 인쇄 실무라는 게 제작 인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기획팀 인력을 배치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시간에 분노보다는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 컸을 때가 아닌가 싶다. 알면서 작업하는 것과 모르면서 작업한다는 게 출판에서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된 뒤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렇게 지저분하면서 근대적이며 주말과 야간이 없이 불야성을 이루던 인쇄골목은 이제 보기 힘들다. IMF 시기를 거치고 일산과 고양 등지로 거대 인쇄소와 출판사가 옮겨간 뒤 최근 코로나 시기까지 거치면서 인쇄의 전성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난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약간 좋지 않은 제본소의 냄새를 풍기면서 여전히 을지로의 골목은 빼곡하기만 하다.
그 분주한 소리가 아직 우리의 지식이 종이 위를 달리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좁은 골목을 가끔 찾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22년 서울 미래유산 홍보용역 – 이철호 작가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