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자막)
저는 오늘 18회차 서울미래유산 투어 진행을 맡은 역사 해설가 안지영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저희 코스는 이 대학로 일대하고 성균관 구간을 포함하는 길이 될 거고요. 이화마을까지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그쪽은 지금 공사 구간도 있고 너무 높아서 벽화를 보기 위해서 너무 많이 올라가야 되더라고요. 그쪽은 가지 않고 마로니에 공원 일대만 본 다음에 로터리를 지나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이동을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학림다방 미래유산 표시 보이시죠. 여기 가보신 분 계시지 않아요? 안 들어가 보셨어요? 요즘에는 관광지로 좀 인기가 높아요. 일본인, 중국인들이 많이 오죠. 여기가 ‘별에서 온 그대’ 그 드라마에도 나오고 드라마 촬영을 많이 했어요. 학림다방은 1956년에 문을 엽니다. 정말 오래됐죠. ‘학림’이란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여기에 다방이 생겼다는 건 커피나 차나 간식 파는 거라는 건데 그럼 이걸 주로 이용했던 연령층이 어떻게 되겠어요? 대학생들이겠죠?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겨냥해가지고 만들어진 카페고 여기가 약간은 은신처처럼 쓰인 겁니다. 학림다방이라는 이름은 제가 서울대학교 문화축제 이름이 ‘학림제’에요. 거기에서 학림이란 이름을 따가지고 학림다방이라고 이름을 달게 됐고 여기가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이 됐어요. 이청준, 김지하 이런 분들이 계시고 그리고 또 우리 전경민이란 분이 있죠. 소설가 중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 분인데 그분이 마지막으로 들렸던 장소 중의 하나가 여기입니다. 그거로 좀 유명했고 어찌 보면 여긴 옛날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많은 시와 소설의 초고가 이 학림다방에서 쓰였을 수 있고요. 이게 역사적으로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지금 밑에 보면은 ‘인권서울’이라고 지금 돼 있어요. 민주화운동이랑 매우 연결이 깊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그 중심에 당연히 서울대도 있습니다. 서울대학생들이 학교는 탄압이 좀 심하니까 여기를 약간 아지트처럼 쓰면서 얘기를 하고 회의를 했던 장소였는데 불시에 여기를 들이닥쳐서 여기 있는 학생들을 다 끌고 간 사건이 있었어요. 학림사건이라고 하는 그게 좀 유명하게 터졌던 사건이라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자극하는 그런 사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쪽을 인권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보기도 합니다. 단순 미래유산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 걷는 길 건너편으로 또 다른 미래유산이 보입니다. 공공그라운드라고 쓰여 있는 붉은 벽돌 건축 보이시죠? 저게 원래 예전에 우리 샘터라는 잡지 있었잖아요. 그 샘터 사옥이에요. 샘터 사옥이고 저 건물 미래유산입니다. 김수근 건축가가 건축을 했고 우리가 보통 대학로라고 하면 붉은 벽돌로 세워진 건축들이 머릿속에 좀 떠오르실 텐데 그 시리즈의 중요한 한 축을 상징하는 거고 이건 또 서울시 미관 건물이라는 걸로 지정이 되어 있어요. 여름에 저기 담쟁이덩굴이 엄청 피는데 그것만으로 굉장히 예쁜 풍경을 자아내기 때문에 외관을 손상시키지 않고 가게들이 입주해서 운영해야 해요. 그렇게 정해져 있고. 김수근 건축가의 어떤 특징이 보이는 건축인데 밑에 통로가 복도 같은 통로가 많아요. 1층은 실제로 임대를 해서 쓸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넓지가 않아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라든가 이렇게 좀 발코니 같은 그런 공간들이 좀 있어서 그냥 행인들이 들어가서 비를 피하거나 이런 게 가능해요. 예전에는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 같은 걸로 많이 쓰였었는데 김수근 건축가가 일부러 그런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김수근 건축가 이름 우리 역사에서 종종 등장해요. 근대 건축에서 이 사람 모르고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죠. 중요한 건축을 많이 만드셨고 굉장히 다작을 하신 분으로도 유명한데 이분이 만든 건물 중에는 역사적으로 안 좋은 역할로 쓰인 건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던가 그게 알고 만들었느냐 모르고 만들었느냐 아직도 평가가 분분하기는 합니다만 안 좋은 평가를 받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이분은 나중에 그런 것들을 약간 후회를 하는 것들이 좀 있어요. 자기가 만든 건축이 좋은 쪽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안 좋은 쪽으로 쓰인 건물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거에서 약간 내 건축이 사람들의 생활을 좀 나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하고 긍정적으로 쓰였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욕구가 있었겠죠. 그래서 대학로에 지어진 김수근의 건축이 주로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찌 보면 최초로 공공 공간이라고 하는 개념을 좀 적용을 시켜서 사람들에게 편하게 쓸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든 게 아닌가 해요. 그래서 이런 거를 대학로에 많이 만들려고 했다고 하고 자신의 건물이 부정적으로 쓰였던 것에 대한 어떤 것을 여기서 많이 만회를 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렇게 평가받은 건물이 옛날 저 샘터 사옥입니다.
대학로 뒤에 일대가 전부 소극장이에요. 그래서 2004년에 여기를 연극, 뮤지컬 이런 거 있는 문화지구로 설정을 하고 아예 서울시에서 그렇게 해서 관리를 하고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사동 같은 곳 가면 전통문화가 들어서는 그런 문화지구로 인식을 하시면 되고 여기는 공연 문화의 산실이 되는 그런 문화지구로 지정됐다고 보시면 되겠고요. 여기가 마로니에 공원이에요. 이렇게 붉은 벽돌로 되어 있는 곳이 이름이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좀 앞쪽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사실은 김상옥 의사하고 결정적으로 관련되는 공간이 여기에 있는 건 아니고 조금 더 내려가야 되기는해요.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라서 인물상을 세워놓은 것도 있어요. 김상옥 의사가 뭐 했는지 혹시 아시는 분? 영화 ‘밀정’에서 실제로 김상호 의사의 죽음을 모티브로 뭔가 장면을 구성했었거든요. 일제 경찰서에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지는 사람이죠. 난리도 아니었죠.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 때려잡기로 유명한 경찰서였고 굉장히 악명이 높았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폭탄을 던지려고 계획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분은 의열단에 가입된 분이었어요. 의열단 들어보셨죠?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 의열단의 단원은 채 20명이 되지 않았는데 일제가 의열단이 운영되는 기간 동안 단 한 명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를 갈고 현상금을 올려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어마 무시 했었죠. 우리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본이 현상금을 걸었던 사람 중에 가장 높은 액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에요. 첫 번째가 김구, 두 번째가 김원봉입니다. 김원봉이 김구 선생보다 결과적으로 조금 더 높았던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어요. 김원봉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했을 때 300억이 넘었습니다. 결국에는 체포는 하지는 못하죠. 그리고 김원봉 단장 휘하에 있었던 의사들 한 명도 잡지 못했죠. 나석주 의사, 김상옥 의사.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 던졌을 때 너무 일본이 화가 나니까 이 사람을 생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거예요. “무조건 산 채로 잡아와” 그래서 그때 이걸 던지고 나서 도망을 가는 대추격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게 약간 자료마다 차이는 있기는 하나 어느 자리에는 일본 경찰 400명이라고 그러고 어느 자료에는 1000명이라고 하고 그래요. 중요한 것은 수백 명의 일본 경찰과 이분 한 분이 대치를 했다는 거죠. 그래서 진짜 무슨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지붕 뛰어다니고 골목 뛰어다니면서 막 도망을 쳤던 거예요. 쌍권총을 들고 이걸 쏘면서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팔, 다리에 총상을 많이 입은 상태였고 죽으면 안 되니까 몸이나 머리는 쏘지 않고 그래서 이 총을 다 쏘면서 이분도 총을 썼으니까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갔겠죠. 어느 창고로 툭 떨어졌대요. 그래서 그 창고 바깥쪽을 일본 경찰들이 둘러싸고 어쨌거나 이 사람 생포해야 하니까 너는 포위되었다 이러면서 이제 나오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김상옥 의사가 총에 남은 한발의 총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되어 있죠. 실제로 동료들한테 항상 이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만약 내가 뭐 하다가 의거를 하다가 잡히면 나는 혹시나 내가 고문을 당하다가 이걸 얘기를 할 수가 있으니까 그냥 나는 스스로 죽겠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던 게 있는데 진짜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래서 결국에 생포를 못 했고 의열단의 근거지를 찾지도 못했죠. 그 사건이 꽤나 그때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던 모양이라 여러 가지 신문기사가 있었지만 일제는 또 이게 너무 영웅화의 영웅담처럼 되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한테 구심점이 되거나 너무 힘을 주는 스토리가 될 것 같아서 이것을 나중에는 얘기를 쓰지도 못하게 합니다.
저기 뒤쪽으로 계속 쭉 올라가면 이화벽화 마을이고요. 낙산공원이에요. 지금 여기가 한양도성의 동서남북을 이루고 있는데 중에서 동쪽이죠. 동쪽은 낙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낙산성곽 구분하고 여기하고 다 연결이 되고 저기 안으로 들어가면 동네 이름이 또 이화동으로 바뀌어요. 왜냐면 거기 밑에 또 이화장이라는 게 또 있죠. 예전에는 요 일대 언덕배기에 배나무가 많아가지고 그래서 이화동이란 이름이 붙게 됩니다. 이화장 하면 생각나는 인물 있지 않으신가요? 이승만이죠. 예전에 만들어진 한옥건축을 그대로 지금 남겨 놓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 생활했었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자 스톱. 여기 동양서림 보이세요? since 1953년 보이시나요? 거의 이거는 한국전쟁이 끝날락 말락 할 때부터 생긴 거예요. 최초부터 이렇게 서점의 형태를 갖춘 건 아니었을 거고 처음엔 리어카에다가 책을 파는 거였는데 장사가 잘돼서 가지고 여기다가 여기 말고도 떠돌아다니다 여기서 정착을 한 거지만 저기 가운데 미래유산 표석 있죠. 우리나라 요즘에는 독립서점이 너무 많잖아요. 그 독립서점과 테마서점에 어떤 시초 같은 곳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도 운영이 되고 있고 1층이 있고 2층이 있어요. 2층 있는데 2층은 ‘wit n cynical’ 이라고 해서 시집만 취급하는 서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잠깐 안에 공간 같은 데도 있어가지고 소설가나 시인들 불러서 낭독회 같은 거하고 그런 프로그램을 굉장히 예전부터 했었어요.
지금 초록 버스가 지나가려는 이 라인이 여운형 선생이 사망한 장소입니다. 이것도 생긴 지 얼마 안 됐죠. 여기가 이제 여운형 선생이 그때 지금 여기 뒤에도 경찰서가 있어요. 그때도 여기에 경찰서가 있었어요. 여운형 선생은 광복이 되자마자 45년도부터 47년도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테러를 11번을 당해요. 암살 시도가 11번 있었어요. 집에 가는데 누가 뛰어나와서 곤봉으로 후려치고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총 쏘는 테러까지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시대의 개인 경호원을 두고 있었어요.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됐냐면 이 여운형 선생이 광복이 되기 직전에 일제 패망이 되게 뚜렷해졌을 때 이제 일제는 100% 망한다. 그런데 일본이 망하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나가고 나면 엄청난 혼란이 올 거다. 그러면 우리가 이 혼란을 잘 추슬러서 다른 나라에 또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우리가 지금 뭔가 우리 정부 시스템을 만들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걸 미리 조성했어요. 우리나라 만들 것을. 그래서 그런 걸 딱 준비를 해놓고 사람들을 착착착 모아서 건준위이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우리나라의 광복이 확실시되는 시점이 되니까 이제 우리끼리 의견 분란이 생기죠. 왜냐하면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컬러가 여러 종류니까 사회주의 하셨던 분도 계시고 뭐 그냥 민족주의, 자유주의 했던 분도 계시고 하니까 이제는 우리끼리 의견 대립이 너무 심해진 거예요. 여운형 선생은 많은 독립운동가와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거든요. 그럼 이제 우리끼리 뭐가 예민해지냐면 이제 광복이 돼서 우리나라 만들 건데 그런 우리도 이제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생기잖아요. 누굴 뽑을 거냐는 거죠. 그러면 어느 정도 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알게 모르게 경쟁을 되게 많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운형 선생이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 테러를 당한 장소가 여기인 거예요. 차를 타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 여긴 사진에도 보이지만 트럭이 하나 막아서 움직이지를 못하게 이렇게 서 있었고 갑자기 보닛 뒤쪽으로 웬 사람이 와가지고 뛰어들어서 그 위에 유리창에다가 총을 쏜 거예요. 그래서 유리를 뚫고서 뒤로 이렇게 총을 맞았는데 바로 앞에서 서울대병원인데 이동도 못하고 그 중간에 급사했어요. 총을 여러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차 안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총을 쏜 사람이 19살짜리 한지근이라는 19살짜리 청년인데 얘가 뭘 알겠어요. 분명 누가 시켜서 쏜 거잖아요. 그러나 끝까지 배후가 누군지를 말하지 않았어요. 이상하죠. 그래서 그때 당시 몽양 선생님 장례식도 거의 우리나라의 김구 선생님 정도의 인지도를 갖고 계신 분이었기 때문에 국민장으로 이제 장례식을 해요. 여운형 선생을 가장 위협으로 느꼈던 사람이 이거 하지 않았겠느냐 이런 얘기가 있었어요. 누가 머리에 떠오르시나요. 여운형 선생이 사망하시고 나서 2년이 있다가 김구 선생님도 경교장에서 암살당하시죠. 김구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고 이분이 하신 일에 비해서 사람들한테 그게 덜 알려진 사람. 김구를 고르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죠. 그런데 여운형은 모르는 사람 많아요. 되게 아이러니하죠. 바로 뒤에 경찰서가 있었는데 아무도 지원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
저기 앞쪽에 혜화동 주민센터 보이세요? 저 뒤에 한옥이에요. 1930년대 한옥을 개조해서 혜화동주민센터로 쓰고 있는데 저게 미래유산입니다. 1930년대 한옥이에요 개조 한옥. 약간 생활이 편리하게 개조한. 저게 원래 누구 집이냐면 한소제라는 여성분의 집이어서 한소제 가옥이라고 해요. 한소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성 의료역사의 출발점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고 여기 인근에 여기 밑으로 조금 쭉 내려가면 인근에 경성 여성의류학교도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여자 의료인들이 처음 육성됐었던 장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요. 최초의 여자 의사가 누구냐에 대한 논란이 약간 분분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공부하고 졸업해서 활동한 연도가 다 비슷하다 보니까 누가 먼저 의사 면허를 땄느냐를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에. 그런데 백과사전이나 이런 공식적인 자료에 보면 이분이 최초의 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분은 여성교육에도 관심이 좀 많으셨고 그래서 걸 스카우트 있죠. 걸 스카우트 창립에도 관여를 좀 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가옥이 꽤 오랫동안 거의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어서 혜화동에서 매입을 해서 주민센터로 약간 개조를 거쳐서 쓰고 있습니다.
저기 명륜당이라고 있구요. 명륜당이 있고 메인 강학 공간이 있고 양쪽에 일종의 교무실 같은 공간으로 쓰였다고 보시면 되시고 여기는 지금 동재, 서재라고 해서 귀속 공간이 안쪽에 있어요. 여기 애들이 짝 나뉘어 있는 거죠. 성균관은 그 입학정원이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면 여기 국립이잖아요. 무료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200명의 입학정원이 있었고 여기 들어오면 먹고 자고 입는 것 다 무료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다 해주는 거예요. 이렇게 들어올 수 있는 학생들 가려서 뽑아야겠죠. 성균관에 입학하려면 과거시험의 가장 기본단계라고 할 수 있는 초시에 합격을 해야 됩니다. 초시에 합격을 하면 자기가 보는 시험의 종류에 따라서 진사 또는 생원이 될 수 있습니다. 허생원, 김진사 여기서 나온 거겠죠. 생원이랑 진사가 돼야 국립대학교 입학 자격을 주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진짜 먹고 자고 하면서 공부만 하는 거예요. 공부를 하고 대과를 보고 이 대과에 합격을 하면 이제 나라의 인재로서 쓰임을 받는 거죠. 사실 성균관이라고 하는 데는 우리나라에서 학교 역사를 좀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가 특이하게도 제사를 같이 지냈기 때문에 국립대학교의 성균관을 따서 지방의 향교라든가 또 서원이라든가 이런 데에도 유사한 형태를 많이 갖추고 있고 어느 지역의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셨는데 여기에도 명륜당이 있네 이렇게 이름을 지으실 수도 있어요. 여기 성균관에 있는 명륜당의 이름을 본따서 그렇게 짓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국립대학교는 여기에 한 군데밖에 없었고요. 중등교육기관으로 우리가 향교를 두긴 했었는데 턱도 없이 부족 하겠죠. 그래서 지방에서 지방 유지들이나 지방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뜻을 모아서 서원이라는 사립학교를 굉장히 많이 지었고 이게 고종의 즉위할 때쯤 되면서 숫자가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될 정도였죠 1000개가 넘는 서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이 서원이 되면 공부하는 장소이면서 제사를 지내잖아요. 그러니까 약간의 종교시설로써도 인정을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세 혜택을 받았어요. 서원이 너무 많으면 나라는 힘든 거예요. 국고가 비는 거죠.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특정한 이유가 명확한 몇 군데를 빼고서는 다 폐지를 하라고 하는 거죠. 이게 서원 철폐입니다. 몇 개 남았을까요? 47개입니다. 엄청 조금이죠. 반발이 엄청 심하지 않았겠어요? 당연히 반발 엄청 심했죠. 이 서원 철폐가 양반들에게 지지를 뚝 잃게 되는 기준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신 이 대학로라고 하는 동네는 특이하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이 여전히 유지가 되면서 또 되게 젊은 청년층들이 많이 다니는 동네이기도 하죠. 그러다 보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 이런 것들이 발전하는 그런 동네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역사 유서가 깊은 그런 문화와 예술의 거리가 이쪽에 많이 있고 거기가 대학로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사이에 여러 가지 종류의 여러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는 미래유산이 많이 있었어요. 공식적으로 2023년에 미래유산투어는 오늘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내년에도 미래유산투어는 아마 진행은 될 거고요. 제가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만약에 하게 된다면 대학로 코스는 무조건 있기는 하겠으나 이제는 새로 지정된 미래유산들이 있어요. 그런 걸 볼 수 있는 지역으로 코스는 조금 더 바꿀 것 같고 서울미래유산의 취지는 지금 500개가 넘잖아요. 이걸 다 볼 수는 없겠죠. 그러나 그 지역마다 우리가 미처 못 보는 어떤 문화유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문화유산도 되고 건축유산도 되고 눈에 안 보이는 어떤 다른 것일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관심을 안 보이면 그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관심을 보이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기도 해요. 미래유산은 그런 개념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고 우리가 만드는 역사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돌보고 있지 못하는 문화유산을 지키는 어떤 모티브로서 최전선에 서울미래유산이 서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고 지금 제가 엄청 자주 본 얼굴도 있고요. 처음 본 얼굴도 있지만 이것을 한번 오시게 되면 매주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에 자주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중간중간에 제가 역사 문화재도 같이 섞어서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 동네 주변에 생각보다 볼 게 많죠. 어떤 지역의 다 사람이 살았던 동네니까 뭐가 없을 수가 없어요. 우리 동네에도 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 두세 번 이상 참여를 해보셨던 분들이라면 내년에는 내가 한번 우리 동네나 다른 동네라도 미래유산을 제안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 번 살펴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추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고요. 미래유산투어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요
- 구분
-
상점
, 시장/상가
- 지역
-
종로구
- 분야
-
문화예술
- 시기
- 2023-11-11
- 출처
- 2023년 미래유산 홍보용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