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박물관

기억박물관 소개

소개

기억박물관은

2013년 선정된 이후 문화재로 등록되거나 멸실·폐업, 타 시도로 이전되어 선정취소된 미래유산에 대하여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미래유산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문화재 등록 미래유산

서울노인복지센터(구 통계청) 전경1
서울노인복지센터(구 통계청)

종로구 삼일대로 467

서울노인복지센터는 2001년 4월에 개소한 사회복지시설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7에 위치하고 있다. 종로구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200m 떨어진 종로구 경운동 운현궁 맞은편에 자리한 서울복지센터는 이전에 통계청이 있던 곳이다. 종로구 탑골공원 일대는 실버세대들의 만남과 교류의 공간이다. 서울특별시는 탑골공원 인근에 실버세대의 권익을 옹호하고, 실버세대를 위한 일자리 창출과 알선, 활기차고 주체적인 노년의 삶을 위한 교육문화 활동 지원 등을 위해 서울노인복지센터를 개소하였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무료급식소, 양·한방진료실, 영화관람실, 이·미용실, 실내공원, 체력단련실, 도서실, 취미교실 등을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실버세대 복지시설이다. 대한조계종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다. 노인복지센터가 소재한 건물은 1961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축물로 대지면적 3,281.1㎡에 건축면적 1,967.45㎡, 연면적 5,534.21㎡ 규모이다. 전체 매스에 가한 격자형 패턴과 차양창을 통해 모던한 감각을 표현한 건축물로, 석재로 마감한 1층 부분의 돌출부는 필로티(pilotis) 위에 떠 있는 매스를 연상시키며, 격자형 패턴을 형성하는 개구부와 적벽돌 벽체의 구성은 잘 계획된 비례감각을 보여준다. 건축가 이희태가 설계를 맡은 건물이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1961년에 준공된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로 주변의 인사동 및 운현궁과 함께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도시경관을 연출하고 있어 지속적인 관리와 보존이 필요하다. 2020년 9월 10일 한국 현대건축의 초기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건축문화재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서울미래유산 선정 취소되었다.
조회4163 추천4 소재지 종로구
복자사랑 피정의 집 전경
복자사랑 피정의 집

성북구 성북로24길 3

복자사랑 피정의 집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24길 3에 위치한 종교시설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본원으로 쓰던 건물이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1953년에 천주교 서울 제기본당에서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내국인 수도자를 위한 남자수도회이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방유룡 신부가 1953년 제기본당에서 5명의 회원과 함께 창설, 1956년 12월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은 수도회이다. 수도회는 1954년 명동성당의 부속건물을 빌려 임시 수도원으로 사용하다 1955년 7월 지금의 위치에 본원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198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새로 본원 건물을 지어 옮겨간 뒤 이곳은 복자사랑 피정의 집으로 문을 열었다. 복자사랑 피정의 집은 1955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1,368.66㎡ 철근콘크리트 적벽돌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라틴십자가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진(Apse)의 평면이 일반 성당과는 달리 반원형이 아닌 타원형 평면으로 설계되었다. 또 제단 상부의 돔도 타원형 반구로 된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방유룡 신부가 고안하고, 이봉협이 설계를 맡았다. 1966년에 보수공사를 실시하였으며, 2006년 건물 외부를 복원하고 숙소를 리모델링하였다. 복자사랑 피정의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내국인 수도자를 위한 남자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옛 본원 건물로 종교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2015년 12월 16일 역사적·문화적·종교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제655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울미래유산은 선정 취소되었다.
조회3095 추천0 소재지 성북구
정동 99(덕수궁 내) 배수로 1구간 석축구간 시점부 전경
일제강점기 하수관거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내)

일제강점기 하수관거는 대한제국기에 축조된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의 덕수궁 내 석축식 배수로를 비롯 일제강점기인 1918년부터 1941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경성하수개수공사의 일환으로 서울광장과 을지로, 남대문로 등에 설치된 지하배수로를 가리킨다. 서울에 처음 근대식 하수관로가 구축된 것은 1896년 전후로 당시 한성부판윤 박정양(朴定陽)이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그해 9월 29일 내부령 제9호를 공포하면서 이루어졌다. 을지로입구 지하의 길이 300m의 배수로가 그때 준공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1900년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는 덕수궁 내 290m 길이의 배수로를 비롯, 1910년 전후에 만들어진 남대문로 지하의 길이 601.3m 적벽돌 배수로와 서울광장 지하의 길이 227m 적벽돌 배수로가 있다. 수백 년에 걸친 수도 서울의 하수 체계와 수로를 근간으로 설치된 이 하수관거들은 근대적 기술 수준을 알려줌으로써 미지로 남겨져 있던 근대 초기의 토목기술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장 지하배수로’와 ‘남대문로 지하배수로’를 2014년 7월 3일 각각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8호와 제39호로 지정하였다.(서울미래유산 선정 취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하수도인 덕수궁 하수관거 외 서울광장, 남대문로 지하배수로 등은 수도 서울의 물길과 도시발달 과정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곳으로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보존해야 할 도시시설물이다.
조회2238 추천0 소재지 중구
한국순교 복자성직수도회 정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성북구 성북로24길 3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43에 위치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1953년에 천주교 서울 제기본당에서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내국인 수도자를 위한 남자수도회이다. 한국순교복직자성직수도회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방유룡 신부가 1953년 제기본당에서 5명의 회원과 함께 창설하여 1956년 12월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방우룡 신부는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6년 1월 24 선종하였다. 1930년 사제 서품을 받고 1946년 개성본당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3년에 남자회원들을 위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립, 한국적 영성으로 살아가는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수도회의 창설 이념은 순교자적 정신의 실천으로 더 완전한 신앙생활과 구원에의 참여, 자아와 이웃의 성화(聖化)에 노력해 하느님의 사업을 이루는 데 있다. 한국전쟁 이후 수도회는 1954년 명동성당의 부속건물을 빌려 임시 수도원으로 사용하다가 1955년 7월 성북구 성북로 24길 3 위치에 본원(현 복자사랑 피정의 집)을 짓고 이전하였다. 이후 1987년에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현재 위치에 새로 본원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으며 사용하던 본원 건물은 신앙인들의 재교육 및 영성생활을 돕기 위한 ‘복자사랑 피정의 집’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2015년 12월 16일 역사적·문화적·종교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유산 제655호(문화재청)로 지정되어 서울미래유산 선정 취소되었다. 한국순교 복자성직수도회는 한국 교회 최초의 남자 수도회로서 가톨릭의 토착화에 중요한 밑거름 역할을 해왔다.
조회2086 추천1 소재지 성북구
서울시립대학교 자작마루 측면1
서울시립대 자작마루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

서울시립대 자작마루는 1937년 경성공립농업학교가 전농동 캠퍼스로 이전한 후 건립한 연와조의 학교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페디먼트 형식의 파사드 등 건립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자작마루란 명칭은 개교 당시 건물 주변에 자작나무가 무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자작나무 숲은 서울시립대의 쉼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서울시립대학교는 1918년 5월 1일 개교한 경성공립농업학교를 모체로 한다. 1937년 3월 31일 경성공립농업학교가 청량리 교사에서 현재의 전농동 캠퍼스로 이전한 이후 5월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에 지상 1층으로 신축하여 수년간 사용해 오던 소강당 건물이다. 본래 건축물에 있던 측면의 굴뚝 등은 없어지고 외부 마감을 실시했으며 2001년 현대식으로 개조하고 2012년의 수리를 통해 예전의 연와조 건축물의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으나, 페디먼트 형식의 파사드 및 전체적인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강당과 공연장 등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구 본관과 교사는 우리나라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학교 건물로서 근대건축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2023년 1월 미래유산 선정취소 되었다.
조회5790 추천6 소재지 동대문구

멸실폐업 미래유산

서울음악사 정면
서울음악사

중구 을지로1가 56

「서울음악사」는 1971년 송인호가 개업하여 1972년 10월 음반사업자로 등록해 운영해온 레코드점이다. 1967년 12월 시청 부근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상가인 새서울 지하상가가 생기자 유동인구가 많을 것이라 판단해 상가를 임대받아 50여 년 동안 음반을 판매하였다. 학창시절 밴드부 활동을 했던 송인호 사장은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하면서 일제 녹음기 2대, 카세트테이프 24개 등을 구입해 들어와 레코드 가게를 열었다. 음악 계통에 있는 친구들 영향이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카세트테이프가 인기를 끌면서 레코드가게는 호황을 맞았다. 송인호 사장은 지인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대형 레코드샵을 차리려던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계획이 무산되었다. 하지만 도매상의 불합리한 구조개선을 위해 음반소매상연합회를 조직해 끌어가거나 직접 제작에 뛰어들어 교회 성가 테이프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송인호 사장은 2017년 11월 16일 『한겨레』의 “다시 아날로그 음악 붐…오래된 음반가게도 재조명” 기사에서 호황이었던 당시 음반시장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하였다. “테이프 참 많이 팔았어요. 그걸로 자식들 다 공부 시키고 집도 장만했으니까.” 1970년대에 ‘서울의 중심’ 하면 시청 인근을 제일로 꼽았다. 대형 회사도 시청과 종로 인근에 많이 있었고, 그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이 오며 가며 서울음악사를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남이 개발되고 회사들이 사옥을 이전하고 직장인들이 대거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울음악사를 찾는 손님들도 변화하였다. 시청 주변에 호텔이 생기고 K-POP이 알려진 후에는 일본인 관광객이나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음반제작사가 생겨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1968년 지구레코드사를 비롯해 성음제작소, 대도레코드사, 유니버샬레코드사, 아시아레코드사가 설립되어 음반이 제작,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1971년 개업한 서울음악사는 음악산업 초창기에 문을 열어 음반 유통시장의 변화와 함께 판매하는 제품들을 바꿔왔다. 송인호 사장은 직접 고른 음반을 도매업자에게 현찰로 구매해 진열하였다. 서울음악사의 음반 하나하나가 송인호 사장의 자산이자 음악세계인 셈이다. 리빙클래식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2020년 7월 11일 업로드된 「49년 전 레코드 샵 이야기」 영상에서 송인호 사장은 50여 년 동안 경험한 음반시장의 변화상에 대해 말해주기도 하였다. “레코드는 LP판이 제일 먼저 나왔어. 제일 처음에는 뭔가 하면은 동그란 거 옛날에 유성기라 그랬지, 곡 한 곡 들어 있는 거 조그만 거, 이렇게 돼서 유성기라는 거 있었어. 한 개에 음악이 한 곡이 들어간 거야. 옛날에 일본강점기 때 나왔던 거야.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 SP판. 그게 4곡씩 들어있어 양쪽으로 8곡. SP판이 있었고 그 이후에 지금 우리가 쓰는 LP판이 있었고. 70년 중반 80년대 초쯤 되면 음악이 우리나라에서 두 부류로 갈렸어요. 트로트로 나가고, 한 개는 젊은 사람 위주의 음악이 많이 나간 거야. 예를 들어 신해철은 젊은 층의 음악을 부른 사람이야. 나이 많은 분들은 신해철이 누군지 몰라. 그 다음에 카세트테이프가 나왔다고. 테이프가 나올 때 릴 녹음테이프도 나오고. 한국에 카세트테이프가 확 널리 알려졌어. 그 당시 때 우리나라에서는 카세트 기계를 만들지 못했어요. 월남에서 엄청 많이 기계를 가지고 왔어. 그래서 카세트가 보급이 많이 됐지. 그러니까 카세트 기계가 보급되니까 자연적으로 테이프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테이프를 우리나라에서 생산을 못 하니까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팩스나 오디오라는 60분짜리 공테이프가 있었어. 거기다 대고 녹음을 해서 그래서 나왔다고 시중에. 그 다음에 카트리지라고 차에 많이 달았었어. 그게 그렇게 나오고 나서 CD가 나왔다고, 그 다음 중간 사이에 비디오, 그 다음에 DVD가 나오고.” 서울음악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반가게’로 2017년 ‘오래가게’로 선정되기도 한 음반유통 분야 최장수 가게였다. MP3가 나오고 음반산업이 사양화 될 때도 송인호 사장은 가게 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사를 계속 운영해오다가 2021년 5월 코로나 감염 후 후유증으로 사망 후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서울음악사에 있던 모든 것은 유족의 뜻에 따라 서울시에 기증되었다. 서울음악사는 음악산업 초창기부터 음반시장의 변화를 반영하며 50여 년 동안 음반을 판매해왔다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의미를 지닌다. 폐업으로 인해 2021년 12월 선정 취소되었다.
조회1993 추천0 소재지 중구
한의원1
성진한의원

도봉구 해등로 155

성진한의원은 1971년 개업하여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지역에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한의원이다. 성진한의원은 1971년에 원장 강신무 씨가 쌍문동 41번지에서 개업하였으며, 1986년에 현 위치인 쌍문동 625번지로 이전하였다. 주 진료과목은 한방내과, 알레르기 비염, 아토피, 피부병, 이명 치료이었다. 강신무 원장의 집안 어른들은 모두 한의사로 3대째 한의사를 이어왔는데, 강신무 원장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경북 안동에서 ‘보화당한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강신무 원장은 경희대 한의학과를 나와 군 전역 이후 쌍문동 41번지에 성진한의원을 개업하였다. 당시 쌍문동 41번지는 미아리고개에서 의정부로 나가는 도로 옆에 위치하여 중심지였으나 1980년대 의정부로 통하는 도로가 새롭게 개통되면서 1986년에 200~300m 떨어진 도봉구 해동로 155로 이전하였다. 성진한의원의 환자는 주로 지역에 사는 단골들이 많이 찾아왔으며, 대부분 연령대가 높았다. 한때는 병원에 한의사와 직원이 많았었다. 성진한의원은 도봉구 등록 제1호 한의원으로, 강신무 원장은 ‘도봉구 한의사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 중앙이사를 역임하였다. 2022년 3월 강신무 원장이 별세함에 따라 성진한의원의 영업이 종료되었고 2022년 12월 미래유산 선정취소되었다.
조회5216 추천2 소재지 도봉구
가산문화센터(옛 공단복지관) 전경1
가산문화센터(옛 공단복지관)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18

가산문화센터는 1999년 10월에 개관한 청소년 복지시설로 근로청소년들의 자립과 취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서울특별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의 부속시설이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18에 위치하고 있다. 가산문화센터는 1981년 전국의 주요 공단지역에 근로청소년회관의 건립 계획이 수립되면서 이듬해인 1982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립근로자종합복지관으로 문을 열었다. 1985년에 근로청소년을 위한 임대아파트 건립에 착공하여 1986부터 1988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근로청소년 임대아파트를 준공하였다. 1999년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부속시설로 가산문화센터를 개관하였다. 2010년과 2011년에 가산문화센터가 운영하는 카페드림 1호점과 2호점을 각각 오픈하였다. 가산문화센터가 소재한 곳은 1977년에 준공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축물로 건축면적 418.51㎡에 연면적 1,734.87㎡이다. 가산문화센터는 이 건물의 1층과 지하층을 사용하며, 소극장과 공연연습실·강의실·세미나실·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천구는 서울시와 협의하여 2018년까지 가산문화센터에 대한 복합개발을 추진, 근로자 기숙사를 확충해 보육주거기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가산문화센터는 1977년 구로3공단 내에 건립된 최초의 복지관으로 노동자들의 복지와 문화 향유를 위한 시설로 활용되어 왔다. 지금은 근로청소년들의 자립과 취업 지원을 위한 복지시설로 활용되고 있어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보존해야 할 복지시설이다. 2014년 11월 금천구에서 산업단지 편의시설확충사업이 시작되면서 문화와 복지 기능을 겸한 근로자 및 청소년 복합지원센터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2018년 3월 노후된 가산문화센터의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건축하여 2021년 11월 G밸리 창업복지센터로 개관함에 따라 2022년 서울미래유산보존위원회에서 멸실로 선정취소 처리되었음
조회5711 추천6 소재지 금천구
서울극장 정면
서울극장

종로구 돈화문로 13

서울극장은 1979년 개관한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하는 극장이다. 1964년에 설립된 영화 제작사인 합동영화(주)는 1978년에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상호를 서울극장으로 변경했다. 1980년에 660석이던 좌석수를 1천 석으로 늘리고, 옥외주차장과 70㎜ 영사기를 설치했으며, 무대 전면의 공간 확보 등 4개월간의 증축공사를 거쳐 개봉관으로 재개관했다. 1989년에는 상영관을 3개관으로 신축하고 서울시네마타운으로 재개관했다. 1997년에 상영관을 3개에서 4개를 추가하여 7개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하면서 ‘서울극장’으로 개칭했다. 2004년에 증축하여 현재 상영관 12개관, 좌석수 4,532개의 규모로 운영중이다. 건물은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지하 2층, 지상 6층이다. 1980년대까지 종로3가에서 을지로를 지나 충무로까지 연결되는 길목은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대한극장 등이 밀집된, 한국 영화산업의 메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극장을 주도하면서 소규모 극장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 서울시내 10대 개봉관 중 하나로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곳이었다. 2021년 8월 31일 영업을 종료함으로 인해 동년 12월 선정 취소되었다.
조회5404 추천6 소재지 종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