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유산 만나보기

미래유산 홍보관

서울의 100년 후 보물, 미래유산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감상해 보세요.

서울 미래유산은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을 지닌 유·무형의 자산으로, 미래 세대에 남겨주고 싶은 시민들의 소중한 추억이자 서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관은 미래유산이 무엇이며 현재까지 지정된 미래유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시민들이 바라본 미래유산은 어떠한지, 각 미래유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우리가 왜 이 보물들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또 다른 100년 후의 보물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돈의문박물관마을(종로구 새문안로 35-16)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23년 ~

전시 기획 및 테마
서울의 매력, 서울미래유산을 살피다
서울은 다채로운 역사와 경험, 독보적인 문화예술을 품고 있습니다.
매력 도시 서울의 정체성, ‘서울다움’.
서울미래유산은 도시 서울 안에 다양한 마음이 모여 조화를 이뤄온 ‘서울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곳에서는 서울미래유산 가운데 서울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다채로운 유산들을 살펴봅니다.
어제와 오늘의 서울에 생동감을 더해온 서울미래유산. 서울을 무대로 펼쳐지는 생생한 서울미래유산의 면모를 통해 오늘날 서울의 다양한 매력뿐만 아니라, 미래의 도시 서울의 ‘서울다움’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미래유산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에서 서울의 다채로운 얼굴을 마주하는 새로운 경험이 되길 기대합니다.
전시 기획 및 테마
함께 걸어가는 서울의 사람

금박연 1856년 북촌 공공한옥에서1대 김완형 장인이 금박을 시작한 이후 5대 김기호 대표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금박 공방이다. 박인당 1978년 석제 박호영이 종로구에 개업하여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인장포. 형제대장간 1976년부터 류상준씨(형과)과 류상남씨(동생) 형제가 함께 운영하는 대장간이다.

정성스러운 마음들이 가꿔온 서울미래유산
다채롭고 독창적인 서울의 어제와 오늘, 앞으로 이어갈 미래유산
생동하는 삶
정성스러운 마음

미래유산의 상징이 되는 ‘사람’
오랜 전통과 유산을 삶 속에 간직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유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모든 순간을 이미지로 기록하였습니다.
금박연
형제대장간
박인당
전시 기획 및 테마
구석구석 서울의 공간

해창양복점 1929년에 개업해 한 세기 가까이 양복을 만든 양복점.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악기를 찾는 이들을 위한 상가. 성수탕 1967년부터 지금까지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추억의 목욕탕. 노량진수산시장 1927년부터 개장한 서울의 대표적 수산물 교역시장. 미일이발과노 1974년 개업하여 2대째 운영되는 이발관. 광장시장 1905년부터 서울을 대표하는 의류, 먹거리 대표 시장. 학림다방 1956년에 개업하여 지금까지 문화예술인들에게 사랑 받는 카페. 통문관 1934년에 설립되어 3대째 고서를 다루는 서점

오랜 나날을 되짚다.
옛 감성을 추억하다.

미래유산의 상징이 되는 ‘장소’
오랜 전통과 시민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은 추억의 장소들의 이미지 ‘오랜 나날을 되짚다’, ‘옛 감성을 추억하다’는 메세지를 통해,서울 곳곳에 기억에 남는 이색적인 미래유산들의 특징들을 다양한 카테고리마다 미디어로 전시됩니다.
해창양복점
낙원악기상가
성수목욕탕
노량진수산시장
미일이발관
광장시장
학림다방
통문관
전시 기획 및 테마
시간을 담은 서울의 물건

금빛을 새겨온 150년, 세대를 이어온 가업 유산,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아들에 이르기까지, 명장의 손에서 묵묵히 새겨진 도장, 50년 동안 늘 한결같이 머리카락을 자르던 이발도구, 가장 오래된 한국 고서의 보물 창고, 대를 이어 만들어가는 섬세한 나전칠기의 빛

깊어 가는 이야기
품어온 이야기

미래유산의 상징이 되는 ‘사물’
오랜 전통과 이야기가 담긴 미래유산의 물건들.
아버지가 물려주신 망치로 여전히 작업을 진행하는 불광 대장간 박상범 대표.
2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옻칠 제품을 만드는 국선옻칠, 5대를 거쳐 만들어 왕의 옷에 금을 붙이는 금박연 김기호 대표의 공방물품 이 모든 물건들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금박연
불광대장간
박인당
미일이발관
통문관
국선옻칠

2022년 ~

서울미래유산관을 VR서비스를 통해 360도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영상을 온라인에서 감상·체험해 보세요.

2022년 VR 둘러보기
전시 기획 및 테마
‘100년 후 보물, 미래유산’ 전시기획
  • 미래유산 현황지도 및 찾아보기를 통해 시민들이 공유한 기억과 일상의 모습이 담긴 미래유산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무형의 미래유산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 시민의 기억과 감성에 귀를 기울이고, 영화를 통해 당대 서울의 풍경을 짐작케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풍속, 언어, 가치관, 주거, 여가 등 당시의 시민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며, 문학작품을 통해 격변하는 시대적 변화 속에 당시 서울의 풍경과 생활상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전시바닥에 그려진 구별 미래유산 현황이 적혀있는 서울시 지도

서울미래유산 현황

미래유산 찾아보기 전시실 측면

미래유산 찾아보기

서울미래유산을 그리다 전시실 정면

서울미래유산을 그리다

대중가요로 말하다 전시실 정면

무형의 미래유산_대중가요

영화로 말하다 전시실 측면

무형의 미래유산_영화

함께해요, 서울미래유산이라고 쓰여진 전시실 정면

시민 참여 갤러리월

전시 기획 및 테마
‘근현대 한국 예술계를 이끌었던 작가들의 삶과 예술이 담긴 미래유산(가옥)’ 기획전시
윤중식 가옥, 서세옥 가옥, 손재형 옛 가옥(석파랑)에 얽힌 예술가들(동양화가, 서양화가, 서예가)의 삶의 단면을 알아보고 창작 공간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하며 우리나라 미술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이 담긴 공간을 소개합니다.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영감을 불어넣었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가옥, 여러분도 가옥에 담긴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적 숨결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석파랑

소재지 : 종로구 자하문로 309

석파랑은 우리나라 서예계의 거목인 소전(素筌) 손재형이 말년에 작품활동을 하며 거주하던 주택입니다. 소전은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이후 자신만의 독창적인 서체인 소전체를 창안한 서예가입니다. 그는 4년 동안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 근대의 가장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금석학의 대가인 나진옥에게 갑골문자와 금석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소전은 갑골(甲骨)과 금석문(金石文)으로 전승해온 고체(古體)의 바탕에서 생성된 전서(篆書)와 이를 토대로 실용의 서체로 발전한 예서(隸書)에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며 깊은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소전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이 전서와 예서의 융합과 교감을 통한 변화무쌍한 조형성의 확장입니다. 또한 그는 한글 서예의 창안에 주력하여 한글 서예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냈습니다. 이러한 소전의 민족의식은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로 불리던 것을 서예(書藝)로 부르자고 제창한 일이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교수 후지쓰카에게 넘어갔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되찾아온 일화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편 소전은 당대의 유명한 컬렉터이기도 했는데, 그가 학생 모자를 쓰고 광화문 비각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알아보고 골동 중개인들이 따라 나섰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석파랑은 우리 문화를 아끼고 발전시켰던 예술가로서의 소전의 면모와 함께 열정적인 수집가로 활동했던 그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석파랑은 현재 한식당으로 이용 중인 석파랑 별채와 석파정 사랑채, 홍지동 122-2 주택 등 총 3동의 건물군으로, 가옥의 역사는 1958년 손재형이 멸실 위기에 처해있던 부암동 산자락의 흥선대원군 이하응 별장인 석파정 사랑채를 흥지동 바위언덕으로 옮겨와 복원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석파랑 별채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 조선시대 말 왕궁을 짓기 위해 중국 톈진에서 들여온 호벽(胡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손재형은 사라져가는 한옥을 사서 오랜 기간 정성 들여 옮기고 고(古) 건축자재를 모아가며 16년에 걸쳐 가옥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석파랑에서 말년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한국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서예가 손재형이 거주하던 주택이자 우리 전통 한옥의 멋과 구조가 그대로 살아있는 석파랑, 여러분도 석파랑에 담긴 소전(素筌)의 예술적 발자취를 따라가보시기 바랍니다.
석파랑 전시 소개 화면 - 자세한 내용은 위 텍스트 정보 참고
석파랑 전시 소개 화면 부가 설명

석파랑(손재형 옛 가옥) Seokparang(Old Son jaehyeong's House)

손재형 약력
  • 1903년 전남 진도군 교동리 항저 출생
  • 1907년 조부 손병익 슬하에서 한학과 서법을 익힘
  • 1920년 양정의숙(양정 중,고등학교 전신)에 입학
  •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안씨가훈」으로 첫 입선 이후, 8회(1931년) 연속 입선
  • 1929년 외국어학원 독어과 졸업. 그 해부터 1932년까지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에게 서화와 금석학을 사사받음
  •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화류휘」로 특선 및 전서 「집구」로 입선
  • 1932년 제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
  • 1944년 세계 2차 대전 중 경성제대 교수 후지쯔카로부터 완당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를 찾아옴
  • 1945년 조선서화동연회를 창립. 조선서화협회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47년 재단법인 진도중학교 설립.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 및 교수 역임
  • 1949년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제1회~제5회) 역임
  • 1958년 제4대 민의원 의원 당선
  • 1959년 민의원 분과위원장 역임
  • 1960년 예술원 추천회원역임(1960~1966)
  • 1961년 대한민국예술원장 작품상 수상
  • 1962년 한국미술협회 이사 역임
  • 1965년 제4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위원 역임
  • 1968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 1970년 제19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운영위원장 역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당선
  • 1977년 최고전(동아일보사 주최)
  • 1981년 6월 16일 별세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

소재지 : 성북구 성북로28가길 7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은 동양화가 서세옥이 60년 동안 거주하던 주택입니다. 산정(山丁) 서세옥은 정통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동세대 작가 중 가장 혁신적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는 1950년대 점과 선의 수묵 추상화를 추구하여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관조와 명상을 거쳐 자연에 동화되고 합일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 한국화와 서구적 추상화의 접점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서세옥의 창작활동에 자양분이 되어준 공간이 바로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입니다. 큰아들 서도호에 따르면 대학교 1, 2학년 때 성북동에서 자취를 하던 서세옥은 성북동 소나무들을 보고 언젠가는 꼭 여기에 집을 가지고 싶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전통 한옥의 소박한 멋을 살리고자 창덕궁의 연경당(延慶堂)을 모델로 삼아 지은 이 집은 1960년대부터 목재를 모으기 시작, 1974년에 착공하여 약 3년 동안의 공사를 거쳐 완공되었습니다. 공사에 쓰인 부재 중 집의 중심을 이루는 가구(架構)는 옛 한옥에서 얻은 고부재를 다듬어 사용하였습니다. 한옥의 사랑채를 본뜬 이 집은 전통적 맞춤기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당호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뜻의 ‘무송재(撫松齋)’이며 인간문화재 배희한(裵喜漢) 대목장(大木匠)의 작품입니다.
이름에 걸맞게 무송재 정원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을 비록하여 진달래와 산수유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뒷마당에는 대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습니다. 서세옥은 낙락장송 소나무들이 있는 정원을 거닐며 사색을 하고 작품을 만들며 조선시대 선비 화가의 삶을 체현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60년 이상을 머물여 그의 대표작인 '인간'시리즈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우리나라 동양화단에 수묵 추상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 서세옥이 거주하던 공간이자 인간문화재 배희한 대목장大木匠의 작품인 무송재, 여러분도 무송재에 서려 있는 산정山丁의 삶과 예술혼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서세옥 가옥 전시 소개 화면 - 자세한 내용은 위 텍스트 정보 참고
서세옥 가옥 전시 소개 화면 부가 설명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 Seo Seok's House & Workshop

"낙락장송이 있는 집을 찾아다니다가 성북동 한옥터를 발견하고 무송재를 지었습니다. 집을 지을 때 목수가 창덕궁 연경당에 가서 하나하나 다 실측해 무송재를 지었어요. 무송재는 쉽게 말해 조각이 없는 집입니다. 사랑채 손님이 옷을 갈아입는 곁방이 하나 있어요. 그 곁방 사이에 방 하나가 있는데, 그게 두실(斗室, 썩 작은 방)이에요. 정말 조그만 방인데, 선생님이 늘 거기에 엎드려 글을 쓰는 거예요. 똑바로 누울 수도 없을 만큼 좁아 대각선으로 엎드려서 말이죠.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냐고 물으면 늘 이렇게 대답했어요. 두실에서는 정리가 잘된다고, 머릿속이 잘 정리된다고요. 그래서 지금도 두실을 보면 그 모습이 생각나요."
- 서세옥의 부인 정민지씨 인터뷰 중에서

윤중식 가옥
및 작업실

소재지 : 성북구 성북로14가길 13-14

윤중식 가옥은 ‘석양의 화가’로 불리는 윤중식이 50년 동안 거주하던 주택입니다. 윤중식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우리나라 서양화 2세대로 분류되는 작가입니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당시 그는 대동강변으로 자주 야외사생을 나가 강가 주변의 사람들과 농촌 전경, 노을이 지는 풍경 등을 그렸고, 이러한 기억들은 훗날 윤중식의 회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1935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유화를 배웠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윤중식의 화풍은 분단 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의 향수와 비애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태양, 섬, 강, 돛단배, 비둘기 역시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을 상징하는 소재들입니다. 소재뿐 아니라 구성과 구도 면에서도 화백은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화면 전체를 색면으로 구성하고 굵은 선으로 색면과 색면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의 작품이 풍경화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고향과 가족을 잃은 채 방황하던 윤중식은 1963년 성북동에 터를 잡고 이곳을 고향 삼아 오래도록 아끼며 머물렀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늘 흐르던 자신의 화실에서 윤중식은 기억 속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때때로 그는 집 주변으로 보이는 성북동의 풍경과 소나무 등을 화폭에 담기도 했는데 특히, 앞마당에 자리한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은 그가 살아생전 늘 아끼던 대상이자 그가 처음 성북동에 정착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윤중식은 2012년에 개최된 상수(上壽, 100세)전을 마친 뒤 생의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성북동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반세기 동안 윤중식의 화업과 함께하며 그의 창작활동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 자체로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윤중식 가옥, 여러분도 가옥에 담긴 화가 윤중식의 삶과 예술적 숨결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윤중식 가옥 전시 소개 화면 - 자세한 내용은 위 텍스트 정보 참고
윤중식 가옥 전시 소개 화면 부가설명

윤중식 가옥 Yun Jungsik's House

남산(南山)과 창경원이 보이고 보성학교와 성균관대학이 마주 바라보이는 성북동에 자리 잡은 곳, 이곳에서 내가 20여 년 살고 있다.
조석朝夕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고 전망이 좋은 곳이라서 눌러 살고 있다. 약간 오르내리기에 불편하지만 조용하고 공기도 좋은 편이어서 눌러 지내고 있다... 태양과 새, 나무와 꽃, 뜰에 빠알간 장미꽃도 희미해가고...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앞집 지붕에 불안한 모습을 하고 먼-서쪽과 창공을 번갈아 응시하며 서성대고 있다. - 윤중식, 「석양夕陽」 중에서

2021년

서울미래유산관을 VR서비스를 통해 360도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영상을 온라인에서 감상·체험해 보세요.

2021년 VR 둘러보기
전시 기획 및 테마
‘1서울의 청년, 예술인들의 문화적 공간이었던 미래유산 둘러보기’
1970~1980년대 청년문화의 산실이었던 독수리다방과 문학인,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전통 찻집 ‘카페 귀천’을 소개합니다. 대학생들의 토론과 만남의 장소였으며,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계 인사들의 아지트로 사랑받았던 공간이기에 이 두 곳은 단순한 찻집이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갈망으로 들끓던 청년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한 청년문화의 상징적 공간이었으며, 예술인들이 작가적 상상력을 발동시킨 문예의 산실이었습니다. 같은 자리를 지키며 각각 신촌과 인사동의 어제와 오늘을 지켜온 미래유산, 독수리다방과 카페 귀천에 남아있는 그 시대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독수리 다방
독수리다방은 1971년에 개업해 3대째 한 곳에서 영업을 이어온 커피숍이자 대학촌 신촌 일대의 시대적 모습을 간직한 문화공간입니다. 현 운영주의 조모 김정희씨가 1971년 음악 다방으로 문을 연 독수리다방은 오랫동안 가난한 대학생들의 만남의 장소와 토론 공간으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요절한 시인 기형도와 소설가 성석제 등 문인들의 단골집이었으며, 배우 명계남과 야구선수 고故 최동원이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와 이문열의 장편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등 문학과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사용되면서 1970~1980년대 신촌 문화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던 공간입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와 “응답하라 1988”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며 당시의 모습이 재현되기도 하였습니다.
독수리 다방 전시 화면
카페 귀천
카페 귀천은 시인 천상병(1930~1993)의 대표작인 「귀천」의 제목을 가져와 1985년 목순옥씨가 처음 문을 열었습니다. 1967년 동백림 간첩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평생의 장애를 얻은 천상병 시인을 보살핀 천 시인의 아내가 바로 목순옥씨입니다. 1972년 천상병 시인과 부부의 연을 맺은 목씨는 1985년 3월 남편 친구인 강태연 시인에게 300만원을 빌려 전통찻집 “귀천을 냈다고 합니다. 목씨는 생전에 ”귀천을 두고 “배가 고팠던 우리 부부에게 밥 문제를 해결해준 삶의 터전”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에게 “귀천은 안식의 공간이었으며 동료 시인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시를 쓰는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1980년대 다방 ”귀천은 화가와 문인들에게는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사랑방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외수, 중광 스님 등 시인의 절친한 문화인들은 물론 그를 좋아하는 예술인들로 늘 북적거렸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천상병 시인이 방송과 잡지 등에 소개되면서 팬들이 급증하였고 그를 만나기 위해 이곳 카페를 찾아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천상병 시인과 그의 작품을 아끼는 이들이 찾아오던 공간이었던 카페 “귀천1호점은 안타깝게도 2010년 목순옥씨가 세상을 떠나며 문을 닫았습니다. 목씨의 조카 목영선씨가 2002년부터 운영 중인 ”귀천“ 2호점이 카페 귀천의 명맥을 잇고 있으며,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많은 이들이 시인의 굴곡진 삶과 예술적 발자취를 느끼고자 찾아오고 있습니다.
카페 귀천 내부 전경1
카페 귀천 내부 전경2

2020년

서울미래유산관을 VR서비스를 통해 360도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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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VR 둘러보기
전시 기획 및 테마
‘서울 시민들이 휴일에 즐겨찾던 미래유산 둘러보기’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의 휴일』을 주제로 하여, 1960년~1980년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던 대표적 미래유산을 소개합니다.
서울의 시대별 여가공간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세대 간 추억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 시내의 유명 영화관 다방, 유원지, 체육 시설 등 휴일이 즐길 수 있는 시대별 대표적 미래유산을 소개합니다.
  •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허리우드극장에서 흑백영화를 감상하고, <마포종점>, <돌아가는 삼각지>, <제3한강교> 등 서울의 풍경을 담은 대중가요가 흐르는 음악다방에 앉아보세요.
  • 어린이대공원의 명물 청룡열차를 타고 스릴을 만끽하며, 82년 창단한 프로야구와 88서울올림픽의 감동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미래유산관 관람안내 - 입구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기념품만들기(서울미래유산 책갈피), 우리동네 서울미래유산 둘러보기, 잠실종합운동장(88올림픽 프로야구), 포토존(청룡열차), 어린이대공원(특별한 휴일), 서울미래유산이란? 음악다방(학림다방에서 그 시절의 낭만), 서울의 휴일(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관람) 순으로 관람
서울미래유산관 안내 슬라이드
서울 미래유산을 간직하고 기억하다
“나만의 서울미래유산 책갈피 만들기”

서울미래유산을 간직하는 특별한 경험, 원하는 이미지 스탬프를 찍어 나만의 책갈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스탬프를 찍어 책갈피를 만드는 과정 스탬프를 찍어 책갈피를 만드는 과정
“서울미래유산 맞춤형 제작물”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해 온 근∙현대 서울의 유산,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2018년부터 지원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 맞춤형 제작물을 전시합니다.

서울미래유산 학림다방 제작물 이미지 -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19. 서울미래유산 선정 : 2013년, 인증번호: 2013-267. 27*28cm 아크릴캔바스 2020
60년대, 영화와 여가문화의 등장
“서울 60’s 한국영화 전성시대”

6.25전쟁 이후 피난 갔던 영화인들의 복귀와 사회의 안정으로 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영화가 서민들의 여가 수단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당시 스크린 1개짜리 단관 개봉관들이 서울의 종로3가와 을지로3가, 충무로 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섰는데, 특히 단성사〮피카디리〮세기극장(현재의 서울극장)이 삼각형을 이룬 ‘골든트라이앵글’로 서울 시민들의 발걸음이 모여들었다.

화제작이 개봉되는 날이면 극장가에는 새벽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종로3가 단성사에서 시작된 줄이 종묘까지 늘어서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암표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6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영화는 TV수신기의 빠른 보급과 유신 체제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다.

“종로의 영화역사 허리우드극장”

1969년 낙원상가 건립과 함께 문을 연 허리우드극장은 서울 10대 개봉관 중 하나로, 오랫동안 종로 극장가를 대표하던 서울 시민들의 여가 공간이었다. 초기 허리우드극장은 좌석수 1,200석의 단관 외화관으로 시작하였으며, <로맨스빠빠>(196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등을 연출한 한국영화계의 거장 감독 신상옥에 의해 운영되었다. 허리우드극장은 종로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특유의 운치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극장으로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현재는 노년층을 위한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종로 일대를 대변해주는 문화예술적 장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65년 신정 명보극장 앞 풍경, 허리우드극장 개관 전 청사진, 허리우드극장 개관 광고, 1969년 낙원상가 완공직후 모습 1965년 신정 명보극장 앞 풍경, 허리우드극장 개관 전 청사진, 허리우드극장 개관 광고, 1969년 낙원상가 완공직후 모습
음악다방과 서울의 대중가요
“청춘의 공간, 음악다방과 DJ”

1950년대 문을 연 종로의 ‘쎄시봉’과 명동의 ‘은하수다방’을 시작으로, 음악감상실 겸 다방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휴식처로 떠올랐다.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인식되던 다방은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내 곳곳의 빌딩 주변이나 지하공간, 버스정류장 부근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뮤직박스 내에서 음악을 선곡하고 사연을 읽어주는 디스크자키(DJ)가 있는 음악감상실 겸 다방이 유행하며 청춘 남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학림다방”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 오래된 문을 열면 은은한 커피향과 함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LP가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곳,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학로 일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학림다방이다. 1956년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에 위치하던 시절 문을 열어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학림다방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이청준∙전혜린∙천상병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자 지식인들의 토론장이었던 학림다방은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며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서울을 노래한 대중가요들”

<안개 낀 장충단 공원>(1967), <마포 종점>(1968), <서울의 찬가>(1969)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애창곡으로 꼽히고 있다. 이들 9곡은 서울 시민의 기억과 감성을 담고 있는 노래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LP음반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대중가요는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을 벗어나 남녀노소 누구나 자기만의 낭만을 누리게 해주었다.

학림다방 내부 및 외부 전경 사진 및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중가요 4곡 설명 학림다방 내부 및 외부 전경 사진 및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중가요 4곡 설명
안개 낀 장춘단 공원(1968)
작사, 작곡: 최지수, 배성태. 노래: 배호
노래 속 화자는 고목에 새겨놓은 옛사랑의 이름이 남겨진 늦가을의 장충단 공원을 찾고, 그의 눈앞에는 사랑했던 여인의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배호의 대표곡 중에서 가장 대중 친화적인 히트곡으로 오늘 날까지 애창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
마포 종점(1968)
작사,작곡: 정도수, 박춘석. 노래: 은방울자매
'마포종점'이 발표된 1968년은 서울의 전차가 운행을 중단한 해이다. 이 노래는 서울 도심에서 사라진 교통수단인 전차에 대한 향수를 담은 노래가 되었다. 노래 가사에는 마포 종점뿐만 아니라 영등포,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까지 등장하여 그 시절 서울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의 찬가(1969)
작사,작곡: 김옥윤. 노래: 패티김
'서울의 찬가'는 어느 정도 도시화가 진전된 시점인 1960년대 말 활기찬 서울의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 작곡가 길윤옥은 '세계에서 유명한 도시는 그 도시를 찬미하는 노래가 있는데 서울은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로 가는 길(1972)
작사,작곡: 김민기. 노래:양희은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가야 하는 시골 처자의 비애를 사실적으로 담고 있는 노래이다. 낯선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젊은이의 고뇌가 '서울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는 가사로 표출되고 있다.
70년대, 유원지와 어린이대공원
“어린이들의 천국이었던 어린이대공원”

1970년대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교들이 생겨나고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 시민의 여가공간의 범위는 강남까지 확장되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관광에 대한 시민들의 수요 역시 증가하였고,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70년대 후반까지 도시민들의 당일 관광 코스는 단연 유원지 소풍이었다.

2015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어린이대공원은 변변한 놀이시설 하나 없던 70년대에 조성된 동양 최대의 테마파크였다. 해방 이후 능동 일대엔 ‘서울컨트리구락부(서울CC)’라는 대규모 골프장이 운영되어 상류층들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능동 골프장을 교외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밤낮으로 작업한 끝에 착공 후 6개월 만인 1973년 5월 5일에 개원식이 진행되었는데, 당일 무료개장을 맞아 몰려든 인파가 무려 60만 명이나 되었다.

“청룡열차”

좁은 나무계단을 올라 오래된 문을 열면 은은한 커피향과 함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LP가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곳,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학로 일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학림다방이다. 1956년 서울대학교가 동숭동에 위치하던 시절 문을 열어 ‘서울대학교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학림다방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이청준∙전혜린∙천상병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자 지식인들의 토론장이었던 학림다방은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며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어린이대공원 개원, 어린이대공원 항공사진(1973년), 운행중인 청룡열차, 개원당시에 존재하던 어린이대공원 수영장 사진 어린이대공원 개원, 어린이대공원 항공사진(1973년), 운행중인 청룡열차, 개원당시에 존재하던 어린이대공원 수영장 사진
80년대, 여가공간의 대중화와 스포츠
“80년대, 여가공간의 대중화와 스포츠”

‘81년 2월, 88올림픽의 유치지원서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출되었을 때, 서울은 턱없이 부족한 기반 시설과 재정 상황에 비추어 일본 나고야와의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적극적인 유치외교와 처음 개최하는 국가에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나고야를 꺾고 서울 유치가 확정되는 쾌거가 이루어졌다.

스포츠는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82년 프로야구, 83년 프로축구 등 잇따른 프로스포츠의 출범은 다양한 여가생활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컬러 TV의 보급으로 인해 대중스포츠 관람과 참여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전세계의 관심 속에 개최된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는 냉전시대의 이념분쟁을 넘은 ‘화합·전진’의 기치 아래, 사상 최다 참가국(160개국)과 참가인원(8,397명)을 기록하며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또한 한강 종합개발, 도시 개조사업, 교통망 정비 등 각종 사회 인프라를 확충하며 도시 서울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뽕나무 섬의 상전벽해(桑田碧海), 잠실개발과 잠실종합운동장”

‘잠실(蠶室)’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기르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잠실은 본디 신천강과 송파강으로 둘러싸인 섬이었으나, 1971년 강을 매립하여 조성된 1,124만㎡의 택지에 아파트 단지,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공원 등이 조성되며 ‘올림픽타운’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잠실종합운동장은 1977년 착공하였으며 주경기장 설계와 전체 배치계획은 건축가 김수근이 맡았다. 잠실주경기장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임에도 내부에 들어가면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관람석과 경기장을 가깝게 하기 위해 관람석을 2단으로 계획했으며, 본부석과 그 반대편에 보다 많은 좌석을 배치함으로써 조선 백자의 우아함을 떠올리게 하는 곡선을 연출하였다.

야간행사중인 잠실종합운동장 내부, 외부에서 본 잠실종합운동장 전경, 야구 경기모습, 헹가래중인 야구선수들 야간행사중인 잠실종합운동장 내부, 외부에서 본 잠실종합운동장 전경, 야구 경기모습, 헹가래중인 야구선수들

2019년

전시 기획 및 테마
'동대문 행 전차노선 따라 구보씨와 함께 미래유산 돌아보기'

구보씨는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1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이다.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이 소설은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미혼의 소설가 구보씨가 하루 동안 경성 거리를배회하면서 느끼는 내면세계의방황과 세태풍속을 묘사한자 전적작품이다.
소설 속 서울은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으로 외형상 근대적 도시로 변모해 가는 모습이었다.
가로등과 전차가 등장한 것은 물론, 기와집과 초가집밖에 못 본 동시대인에게화강석을 붙인 고층 건물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밖에 은행, 약국, 다방, 역 등 '듣도 보도 못한' 신문물이 주인공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보씨가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는데 모티브를 얻어 당시 주요 전차 노선인 종로, 동대문, 을지로지역에 산재한 다양한 유형의 미래유산 세상속으로 들어가본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자기와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차에 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저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中에서

서울미래유산관 관람안내 - 입구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기념품만들기(서울미래유산 책갈피), 우리동네 서울미래유산 둘러보기, 잠실종합운동장(88올림픽 프로야구), 포토존(청룡열차), 어린이대공원(특별한 휴일), 서울미래유산이란? 음악다방(학림다방에서 그 시절의 낭만), 서울의 휴일(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관람) 순으로 관람
1차전시 전차 노선도 : 청진옥 → 종로 → 종로 2가 → 귀금속제조업 → 종로 3가 → 광장시장 → 이명래 고약 → 종로5가 → 동대문 종합시장 → 동대문 → 을지로 4가 → 을지로 노가리 골목 → 을지로3가 → 송림수제화 → 을지로 1가 → 종로 양복점 → 충무로 입구 → 남대문 → 서울역 광장 → 세종로
동대문 행 전차노선 따라 돌아보기 슬라이드
피맛골과 청진옥
"고단한 서민의 삶을 위로한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

청진동과 관철동에는, 조선시대에 말을 탄 높은 벼슬아치가 운종가(종로) 큰길을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거나 돌아갈 수 있는 골목길이 존재했는데, ‘말을 피한다’는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피맛길’이 그것이다.
피맛골에는 자연스럽게 서민들이 즐겨 먹는 먹거리들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자주 찾는 해장국 음식점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청진옥’은 80년 넘게 뚝배기 해장국과 깍두기 한 접시의 소박한 매력을 이어오고 있는 서울미래유산이다. ‘상중이라도 국솥의 불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대를 이은 청진옥의 경영철학이다.

청진옥의 성냥갑(각 1990년대, 2000년대), 1~3대(代) 명판 도장
피막골의 옛모습, 80년대 청진옥 전경, 2000년대 거래처 대장
귀금속 제조업
"도심공방에서 만나는 옥방골 장인의 손길"

종로2~4가 대로변에는 귀금속·시계 도매 상가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종로4가의 예지동은 예로부터 돌이나 옥을 다듬는 공인(工人)들이 모여 살아 ‘석수방골’, ‘옥방골’이라고 불렸다.
6·25 전쟁 이후 화신백화점, 신신백화점 주위로 귀금속상가와 공방들이 속속 들어섰고, 세운상가 뒤쪽에는 시계노점상들이 자리를 잡았다. 시계와 귀금속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팔면서 상권은 점점 커졌고, 이 일대에 금은 세공업소가 밀집하게 되었다. 또한 1980년경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가 종묘 옆 봉익동으로 이전하고, 1985년 훈정동 일대의 재개발로 상인들이 합류하면서 국내 최대 귀금속 거리가 되었다. 예물을 맞추거나 커플링을 맞추는 이들이 꼭 한 번씩 들르는 곳으로서, 오랜시간 시민들 곁에서 자리를 지켜 온 거리이다.

이순용 명장 작업실, 귀금속 조각품, 작업스케치 노트
이순용 명장 작업대, 귀금속제조업 일대
광장시장
"순수 조선자본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상설시장"

광장시장은 처음엔 ‘동대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1905년 시장개설 허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경영권을 행사하던 다른 시장들과는 달리 동대문시장은 순수 조선 자본을 바탕으로 한 상설시장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광장주식회사가 운영하던 조선인 시장의 명맥을 꿋꿋이 지켜온 동대문시장은 1960년대 이후에는 ‘광장시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 청계천변의 광교(너른 다리)와 장교(긴 다리) 사이를 복개하여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첫머리를 따서 ‘광장(廣長)시장’이라고 작명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토목 기술로는 복개가 어려워 배오개에 터를 잡았고 이후 한글 발음은 그대로 둔 채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을 담아 현재의 ‘광장(廣藏)시장’이 되었다.

광장시장 옛모습1, 1980년대 광장시장, 광장시장 옛모습2 광장시장 옛모습1, 1980년대 광장시장, 광장시장 옛모습2
이명래 고약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준 만병통치약"

‘고약(膏藥)’이란 한의학을 배경으로 하여 종기나 상처에 붙이는 약의 통칭이다. 이명래 고약은 프랑스 신부로부터 서양 약제술을 배운 이명래(李明來, 1890~1952)가 1906년에 민간요법을 바탕으로 개발한 흑갈색과 담황갈색 경고제를 합친 종기치료제이다. 한때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을 정도로 당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 ‘이명래 고약’은 사람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한 국내 최초의 상표이기도 하다.
위생이 열악하고 영양이 부실했던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종기는 특히 아이들에게 흔히 찾아오는 달갑잖은 손님이었다.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명래 고약은 값이 저렴하고 효과는 톡톡하여 문턱이 낮은 피부과 의원이나 다름없었다. 기름종이에 싸인 검은 고약을 적당히 덜어 불에 녹여내어 환부에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이명래(1890~1952) 중림동 진료실 (1939~1940년대), 공세리 성당-이명래고약 유물, 1949년 지도에 표기된 이명래고약집과 명래제약 위치, 이명래고약 본포, 이명래고약-광고, 과거 이명래고약 봉투 이명래(1890~1952) 중림동 진료실 (1939~1940년대), 공세리 성당-이명래고약 유물, 1949년 지도에 표기된 이명래고약집과 명래제약 위치, 이명래고약 본포, 이명래고약-광고, 과거 이명래고약 봉투
동대문종합시장 / 을지로 노가리 골목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에 남은 전차의 추억"

동대문종합시장 일대는 과거 동대문 전차차고지가 있었던 곳이다. 1898년 미국의 사업가 콜브란의 전차 부설 계획이 허용되면서 약 8킬로미터의 전차 노선이 건설되었다. 전차는 교통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70년만인 1968년에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전차차고지에는 동대문 시외버스터미널이 건설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에 동양 최대 규모의 단일 시장인 동대문종합시장이 시외버스터미널과 연계되면서 ‘생산-판매-유통’ 기능이 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복합 시장으로 성장했다.

"한국판 옥토버페스트’의 진풍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양의 맥주가 팔리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는 노가리를 메인 안주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일 밤 맥주 축제가 열리고 있다. 80년대 맥주 프렌차이즈 업체에서 안주를 제공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면서, 맥주가게들이 고심 끝에 노가리를 안주로 제공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길거리엔 접이식 탁자와 의자를 펼쳐 놓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누군가에겐 추억의 골목인 이곳을 누군가는 맥주의 본고장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와 비교하기도 한다.

동대문 전차, 동대문 현재 사진, 을지 노가리 골목 동대문 전차, 동대문 현재 사진, 을지 노가리 골목
송림수제화
"수제화의 자존심을 꿋꿋이 지켜가고 있는 산증인"

을지로3가역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에 자리 잡은 송림수제화는 1936년 개업하여 한국 최초로 수제 등산화와 산악스키화를 만들었다. 기성화가 휩쓸던 1960년대에도 고집스럽게 한 자리를 지킨 송림수제화는 국내 수제화의 산증인이자 역사라 할 수 있다.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체로 한 달이다. 발 크기와 너비, 발등의 높이를 꼼꼼히 잰 후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폼에 체중을 실어 발 모양을 뜬다. 발을 찍은 폼에 석고를 부어 족형을 뜬 후 재단과 재봉, 밑창 등의 작업을 거치면 수제화 한 켤레가 완성된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제화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기술을 쌓아온 송림수제화는, 오늘도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신발을 만드는 일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등산화창 몰드-실물, 송림수제화 몰드, 최초의 등산화 실물, 사양서 실물 등산화창 몰드-실물, 송림수제화 몰드, 최초의 등산화 실물, 사양서 실물
종로양복점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맞춤양복점"

1916년 이두용 씨가 개업한 종로양복점은 국내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맞춤 양복점이다. 1920년대 개성과 함흥까지 분점을 내고 2층 건물을 지으며 직원만 200명이 넘는 규모로 발전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40년대 종로 1가로 자리를 넓혀 이전한 후, 6·25 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길에 오를 때도 옷감을 다 들고 갔을 만큼 맞춤옷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남달랐다. 3대에 걸쳐 운영되고 있는 종로양복점은 지금도 직접 고객들의 몸 치수를 재고, 원단을 자르며 103년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는 이두용씨의 철학이 지금의 종로양복점을 있게 한 힘이다.

종로양복점 사장님, 다리미-실물, 종로양복점 전표, 1916년 종로양복점 전경 종로양복점 사장님, 다리미-실물, 종로양복점 전표, 1916년 종로양복점 전경
서울역 광장
"익명화된 거대 도시 서울의 한 단편 서울역 광장"

경부철도의 종착역이었던 남대문역은 서울의 관문 역할을 담당했다. 1923년 경성역으로 개칭된 남대문역은 1925년 좌우대칭의 중앙에 돔을 얹은 붉은 벽돌 건물로 재탄생하였다. 철도 역사 앞에는 열차가 도착하여 쏟아내는 승객을 수용하기 위한 텅 빈 마당이 만들어졌는데, 이 마당은 역전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시대에 따라 역사의 이름이 바뀌었던 것처럼 역전광장도 각기 다른 풍경을 담아 왔다. 남대문역 앞 광장으로 불리던 때에는 독립을 향한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고, 경성역 앞 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는 살길을 찾아 만주로 향하는 사람들과 전선으로 강제 징집되는 병사들이 이곳을 빼곡하게 메웠다. 서울역 앞 광장이 되면서 명절 때마다 고향을 찾는 인파와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서울을 찾은 이와 떠나는 이가 공존하는 이곳은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며 익명화되어 가는 거대 도시 서울의 한 단편이라 볼 수 있다.

1968년 서울역 전경, 1977년 구정 귀성객 행렬, 2017년 서울로 7017 프로젝트 1968년 서울역 전경, 1977년 구정 귀성객 행렬, 2017년 서울로 7017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