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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미래유산

이태원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51 작성일2019.07.15

조선 초기 공무수행 관리자와 여행자가 머물던 숙소

현재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았는데 이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하여 살았다는 점에서 어원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다고 해서‘이태원(異態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태원은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숙소로 설치된 ‘한양 4원(院)'중 하나로 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었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은 주로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 숙박시설을 가리킨다.
이태원은 남대문-이태원-서빙고-동작진-과천을 거쳐 남쪽지방에 이르는 길목이자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원터이다. 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는 전혀 다른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이태원동 마을은 원래 현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으로,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부근당이 있어, 매년 당제가 열리는 등 예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남산기슭 급경사상에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은 구 이태원 마을자리로부터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한 현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일대는 군기사 등 군사관련 시설이 많았으나, 군사직역의 색채가 본격화 된 것은 일제 시대 이후로 용산,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되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입지하였으며(현 미8군 자리), 구 군인아파트(현 남산2호 터널 입구, 대림아파트단지)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를 강화하였고,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에 ‘해방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이태원동, 한남동에 외국공단이 들어서고, 1963년 사격장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도시화가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위주의 상가들이 존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970년대 초반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된 이후 1만 여명의 미군과 관련 종사자 및 기지촌 상인(현 상인의 30% 차지)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현재 모습의 이태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값싸고 특색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값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공급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각종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이태원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일본인을 위시한 많은 관광객들의 쇼핑관광명소와 유흥업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고, 1997년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하는 ‘퓨전’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태원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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