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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미래유산

와서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2 조회수126 작성일2019.07.15

조선시대 기와를 만들어 공급하던 관청

1392년(태조 1) 조선의 새 관제(官制)를 정할 때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설치하고 각각 직(直) 1명씩을 배치하여 기와 굽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05년(태종 5) 공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다. 1460년(세조 6)에 동요와 서요를 합쳐 와요(瓦窯)라고 칭하였으며 이후 얼마 안 되어 와서(瓦署)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1882년(고종 19) 재정절약 차원에서 와서를 혁파하였다.

와서의 관원으로는 겸직인 제조 1명과 종6품의 별제(別提) 3명이 있었으며, 전국에서 뽑아 올린 승려 수백 명과 기와 굽는 기술자인 와장(瓦匠) 수십 명이 근무하면서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였다.

기와 수요가 늘어나면 국가에서는 기존의 와서 외에 특별히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여 기와를 굽도록 했는데, 1406년(태종 6)에 설치한 별와요가 그 시초였다. 당시 승려 해선이 서울에 초가집이 많아 미관상 좋지 않고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별요(別窯)를 설치해서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면 10년 안에 서울 집이 전부 기와집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에서 해선의 제안을 수용하여 별와요를 설치하고 해선을 화주(化主)로 삼고 전국에서 승려 270명과 와장 40명을 상경하게 하여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큰 흉년이 들자 별와요를 없앴다. 별와요는 이처럼 설치와 혁파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와서는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여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성 밖의 남부(南部) 둔지방(屯之坊) 지금의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서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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