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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게시물 : 54건   |   페이지 2 /6
이태원터

이태원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42 작성일19.07.15
조선 초기 공무수행 관리자와 여행자가 머물던 숙소 현재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았는데 이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하여 살았다는 점에서 어원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다고 해서‘이태원(異態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태원은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숙소로 설치된 ‘한양 4원(院)'중 하나로 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었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은 주로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 숙박시설을 가리킨다. 이태원은 남대문-이태원-서빙고-동작진-과천을 거쳐 남쪽지방에 이르는 길목이자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원터이다. 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는 전혀 다른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이태원동 마을은 원래 현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으로,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부근당이 있어, 매년 당제가 열리는 등 예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남산기슭 급경사상에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은 구 이태원 마을자리로부터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한 현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일대는 군기사 등 군사관련 시설이 많았으나, 군사직역의 색채가 본격화 된 것은 일제 시대 이후로 용산,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되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입지하였으며(현 미8군 자리), 구 군인아파트(현 남산2호 터널 입구, 대림아파트단지)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를 강화하였고,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에 ‘해방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이태원동, 한남동에 외국공단이 들어서고, 1963년 사격장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도시화가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위주의 상가들이 존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970년대 초반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된 이후 1만 여명의 미군과 관련 종사자 및 기지촌 상인(현 상인의 30% 차지)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현재 모습의 이태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값싸고 특색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값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공급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각종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이태원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일본인을 위시한 많은 관광객들의 쇼핑관광명소와 유흥업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고, 1997년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하는 ‘퓨전’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태원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와서터

와서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40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기와를 만들어 공급하던 관청 1392년(태조 1) 조선의 새 관제(官制)를 정할 때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설치하고 각각 직(直) 1명씩을 배치하여 기와 굽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05년(태종 5) 공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다. 1460년(세조 6)에 동요와 서요를 합쳐 와요(瓦窯)라고 칭하였으며 이후 얼마 안 되어 와서(瓦署)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1882년(고종 19) 재정절약 차원에서 와서를 혁파하였다. 와서의 관원으로는 겸직인 제조 1명과 종6품의 별제(別提) 3명이 있었으며, 전국에서 뽑아 올린 승려 수백 명과 기와 굽는 기술자인 와장(瓦匠) 수십 명이 근무하면서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였다. 기와 수요가 늘어나면 국가에서는 기존의 와서 외에 특별히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여 기와를 굽도록 했는데, 1406년(태종 6)에 설치한 별와요가 그 시초였다. 당시 승려 해선이 서울에 초가집이 많아 미관상 좋지 않고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별요(別窯)를 설치해서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면 10년 안에 서울 집이 전부 기와집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에서 해선의 제안을 수용하여 별와요를 설치하고 해선을 화주(化主)로 삼고 전국에서 승려 270명과 와장 40명을 상경하게 하여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큰 흉년이 들자 별와요를 없앴다. 별와요는 이처럼 설치와 혁파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와서는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여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성 밖의 남부(南部) 둔지방(屯之坊) 지금의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서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군자감 강감 터

군자감 강감 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41 작성일19.07.15
태조4년(1395)一광무2년(1898) 전국 군전(軍田)에서 군량을 받아들여 저장하던 관아자리 조선시대 군량미 및 군수품 저장과 출납을 맡은 국가 관청 군자감은 조선시대 때 군량미 및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국가관청이다. 1392년에 최초로 설치하였는데, 성 안에 본감 · 분감과 성 밖 용산강가에 강감을 두었다. 원래 군량미는 한 곳의 창고에 보관하였는데, 점차 그곳이 좁아지자, 1413년에 용산강창을 준공하였고, 이후 송현에도 창고를 세웠다. 서강에 있었던 기존의 창고를 본감, 새로 지어진 두 창고를 분감이라 하였는데, 판사가 세 곳을 총괄하고, 관원들은 분담하여 각 창고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1744년 이후 분감만 두고 관원들의 월급인 녹미도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보통 30만 섬의 곡식을 저장했다고 한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자감 강감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27 작성일19.07.15
소월로20길 군인아파트 단지내에 위치해 있음. 1949년 4월 15일 해병대가 진해 덕산 비행장에 창설됨에 따라 1951년 3월 12일 ‘해병대 초대교회’로 시작되었으며 한국전쟁 직후 해병대사령부가 현재 방위사업청 부지로의 이전에 맞춰 ‘장막교회’와 ‘퀀셋교회’ 등을 거쳐 1959년 12월 31일 영구적인 건물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됨과 동시에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수도방위사령부 창고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 2003년 4월 7일 해병대 창설 제54주년을 기념하여 훼손, 변형된 교회건물을 중수하여 예배당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 시기 교회 명칭은 ‘방패교회’로 불렸으나 2005년에 이르러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의 명칭을 회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등록문화재 674호  
구 용산철도병원 본관

구 용산철도병원 본관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42 작성일19.07.15
등록문화재 제 428호 1928년 용산철도병원(구 철도국 서울진료소) 본관으로 지은 건물. 1928년 철근콘크리트조 적벽돌 마감으로 재건된 지상 2층 규모의 병원 건축물. 일제강점기 철도기지로서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던 용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 건립 당시의 구조, 재료, 공간구성을 간직하고, 절제된 장식과 함께 서양의 고전적 양식에서 근대 건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  
한강철도교

한강철도교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21 작성일19.07.15
한강철교는 용산구 서부이촌동과 동작구 노량진동을 잇는 한강 최초의 다리로 1897년 3월에 착공하여 1900년 7월에 준공되었다. 다리 건설은 1896년 3월 29일 미국인 모오스가 경인철도부설권을 취득한 후 1900년 7월 5일 이 다리가 준공되기까지 총 4년여에 걸친 대공사였다. 그러나 6·25전쟁의 발발로 1950년 6월 A·B·C 3선이 모두 폭파되어 가복구하여 임시로 사용하다가 1957년 7월에 C선을 복구하고, 1969년 6월에는 3선이 모두 완전 복구되었다. 1995년 D선을 건설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상부구조는 모두 트러스 형식이고, 하부구조는 모두 중력식 교각과 교대이다. 기초공법은 잠함공법 ·우물통공법 ·강시판공법 등을 채택하였다.  
연복사탑중창비

연복사탑중창비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41 작성일19.07.15
1494년 세워진 연복사탑의 중창 내력을 담은 석비이며, 본래 경기도 개성에 소재하였던 것인데 20세기 초반에 서울로 이전되었다고 함.  
구 용산수위관측소

구 용산수위관측소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20 작성일19.07.15
1924년 12월 한강의 수위를 자동 관측하기 위해 한강변에서는 최초로, 전국에서는 아홉번째로 세워진 자기관측소(自記觀測所). 1925년 1월에 관측이 정식으로 개시되었고, 1976년 9월까지 실제 수위 관측이 이루어지다가 1977년 폐쇄.  
서빙고 부군당

서빙고 부군당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23 작성일19.07.15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 돈의문 · 숭례문 · 숙정문이며 4소문은 혜화문 · 소의문 · 광희문 · 창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한양도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되었다.  
서울원효로예수성심성당

서울원효로예수성심성당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43 작성일19.07.15
사적 제255호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을 해제하고 문화재를 분리하여 재지정 함. 서울에서 세번째로 완공된 서양식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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