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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퇴계로 344
한양도성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창과 함께 수도 방어 및 내부 통제 등을 위해 쌓아올린 성곽으로서 총길이가 약 18.6킬로미터, 높이는 5~8미터에 달합니다. 특히 현존하는 전세계의 도성 가운데 가장 오랫 동안, 즉 1396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514년 동안이나 도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왔습니다.
성은 북쪽의 백악(북악산)에서부터 동쪽의 낙타(낙산), 남쪽의 목멱(남산), 서쪽의 인왕을 거쳐 다시 백악으로, 이른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요, 산과 산 사이에 숭례문과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등 4개의 대문을 두었었고, 대문과 대문 사이에는 역시 4개의 소문을 설치해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그 중 오늘 코스의 시작점인 광희문은 원래 태조 5년(1396) 한양도성을 쌓을 때 함께 세웠던 소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당시의 것이 그대로 이어져온 것은 아닙니다. 일제 때 문루가 헐린 이후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대 중반 도로를 확장하며 지금의 위치로, 즉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5미터 정도 옮기면서 문루를 다시 지어 올린 것입니다. 한양도성의 성문 가운데 일제가 헐어버리거나 위치를 바꾼 것이 적지 않은데 광희문만은 해방 뒤 한국인의 손으로 위치를 옮긴 문입니다.
광희문의 또다른 명칭으로 ‘수구문’과 ‘시구문’이 있습니다. 수구문은 남산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이곳 근처로 흘러 나갔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광희문은 십여 차례 언급되는 데 반해 수구문은 70여 건이나 발견됩니다. 또 시구문은 평상 시 도성 안에서 사망한 이의 시신을 성 밖으로 빼 매장할 때 이용한 문이라 해서 붙은 별칭인데, 아예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나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문 주변으로 시신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또한 광희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문이기도 하며,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된 문이기도 합니다. 문의 규모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서려있는 역사는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