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모바일 메뉴

서울미래유산서울미래유산

I.SEOUL.U
전체메뉴닫기

주메뉴

 
 

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한옥과 예인의 동네 상촌
1 2073 2017.01.18 약4시간

※ 오른쪽 화살표 버튼을 클릭하여, 각 코스를 확인해주세요.

이전코스 다음코스
1
통의동 동척 관사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길 21
경복궁 서쪽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옥 외에 일본식 건물들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통의동 대림미술관 근처에 있는 집들이 대표적입니다. 기와를 얹은 모습이 한옥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본식 건물들입니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이 살던 관사입니다. 애초 조선 21대 왕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창의궁 터였지만, 식민지가 되면서 그 운명이 바뀌고 만 것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줄여서 ‘동척’이라고도 합니다.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입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받거나 매입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면적의 농토와 삼림을 가로챈 뒤 일본인 이주자들에게 헐값에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조선인 소작인들에게 빌려준 뒤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했으며,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두어 들였습니다.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허물고,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를 장려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조선인들은 토지를 잃고 북간도 등으로 이주해 갈 수밖에 없었던 반면, 1942년 당시 동척은 16만 헥타르 이상의 임야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정치적인 방식으로, 조선은행이 경제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일본 군경이 무력으로 조선인을 억압하고 수탈했다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토지를 수단으로 삼아 조선인의 삶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랬던 동척이 있던 서울 을지로2가에는 지금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을 뿐 당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동척에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나석주 열사의 동상만이 우두커니 서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이 살던 통의동의 동척 관사만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른 채 가량이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상당수가 고급주택으로 변했고 남아 있는 건물들마저도 겉모습이 일부 바뀌긴 했지만, 지난 식민지 시대의 기억만은 아직도 오롯합니다.
통의동 동척 관사
2
통의동 보안여관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통의동 2-1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맞은편에 지난 1960~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간판을 단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보안여관’입니다. 근처에 청와대가 있어 ‘보안’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런 이름으로 불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얀 바탕에 파란 볼딕체 글씨가 인상적인 보안여관…. 다만 지금은 ‘보안’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습니다. 잠 자는 여관도 아닙니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13개의 전시실을 가진 2층짜리 갤러리이자 이른바 ‘문화 투숙객’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입니다.
지난 2004년까지 근 80여 년을 여관으로 이용되어온 건물을 사들인 뒤 갤러리로 문을 연 건데요, 용도를 바꾸면서도 간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은 여관의 독특한 역사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즉 이곳은 지난 1936년 시인 서정주가 친구이자 시인인 함형수와 하숙하면서 김달진과 김동리, 오장환 등 문학 청년들과 교류하고, 또 함께 문학동인지인 ‘시인부락’을 만들었던 공간입니다. 화가 이중섭이 이곳에서 작품을 창작했다고도 전해집니다. 해방 이후에는 꿈을 안고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이들이 장기 투숙하던 ‘문화 예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유심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설마 여기가 갤러리겠어?” 하는 생각에 지나치기 십상인 통의동 보안여관. 밖에서 본 건물은 별 말을 하고 있지 않은 듯하지만, 80여 년 동안 여관으로 쓰인 데 이어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생멸변화해가고 있는 곳이 바로 통의동 보안여관이 아닐까 합니다.
보안여관 전경(1)
3
서촌 한옥밀집지역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체부동, 효자동 일대
최근 ‘서촌’이라 불리는 동네가 인기입니다. 이때 서촌은 우리가 지나온 동척 관사나 보안여관 등이 있는 서울 종로구 누상동과 누하동, 통인동 등 경복궁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분위기 좋은 카페나 아기자기한 식당들이 그 좁은 골목을 비집고 여럿 들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서촌은 그 동네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강합니다. ‘북촌’이나 ‘남촌’과 같은 지명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나뉘는데, 마찬가지로 서촌은 청계천의 서쪽 즉 서울역사박물관과 정동 언저리의 새문안길 일대를 가리켜왔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요즈음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의 명칭은 사실 오랜 기간 ‘상촌(上村)’이나 ‘웃대’ 혹은 ‘웃마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서촌이라 불리는 그 지역을 종로구청에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며 '세종마을'로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하튼 이 지역에는 2016년 현재 2,100여 채의 한옥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추진된 주택 계획에 따라 작은 필지로 쪼개져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입니다.
서촌 한옥 밀집지역에는 사실 빈집도 적지 않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상전벽해 같은 변화의 물결이 들이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접근성이 좋은 데다 재래시장인 영천시장과 통인시장이 대형마트의 홍수 속에서도 번화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고, 또 서울 안에서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보니 카페나 베이커리, 맛집 등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정작 원래 있던 상점이나 주민들이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쫓겨나게 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진앙지’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 서촌 한옥 밀집지역…. 언뜻 보면 오래된 동네 같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여러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문제들이 녹아 있기도 합니다.
서촌 한옥밀집지역 한옥1
4
이상의 집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통인동 154-10
이 일대에는 조선시대 때엔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종에 종사하던 중인들이,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몰려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필운 이항복 등이 조선시대의 인물들이고, 화가 이중섭이나 이상범, 박노수, 시인 윤동주 등이 일제강점기 이래 이 지역에서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거기에 한 명이 더 있으니 바로 시인 이상입니다. 지난 2002년 김수근문화재단이 그가 살았다던 통인동 154-10번지(자하문로7길 18)의 한옥을 매입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한옥이 이상이 살았던 집은 아닙니다. 이상이 1912년부터 1932년까지 살았던 곳이기는 하지만, 그 땅에 들어서 있는 한옥은 최근 보수공사를 하면서 보니 1933년 이후 집장수들이 지은 집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등록문화재로 등재됐다가 2008년 문화재 목록에서 말소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현재 ‘이상의 집’ 혹은 ‘제비다방’이라 불리는 이곳은 이상이 살았던 '집 터’라고 하는 게 적확한 표현일 겁니다.
빨리도 변해가지만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한 지명이 붙고 또 충분한 고증도 없이 문화재 등재가 결정되는 한국의 오늘…. 서촌 혹은 세종마을 같은 지명이나 이상 집 터를 둘러싼 에피소드들은 우리사회의 가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함께 운영했던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제비다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2012년 이래 시인 이상의 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일종의 문학기념관으로 활용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존 가치가 적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이상의 집 전경1
5
배화여고 캠벨 기념관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필운동 12
이상의 집터에서 골목길을 통해 서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이대 배화여고에 닿습니다. 그 안에도 서울미래유산이 있는데요, 바로 지난 1926년 12월 7일 배화여고 설립자인 조세핀 필 캠벨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캠벨기념관입니다.
배화여고는 초창기 근대식 교육기관이 그러하듯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데요, 지난 1898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인 캠벨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캠벨기념관은 이후 교실 등으로 이용되어 왔는데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일본군 통신부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한국전쟁 중에는 반파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었습니다. 그후 1977년 대규모 리모델링이 이뤄졌고, 2009년에는 스팀난방과 에어컨 개별 냉방 방식이 중앙 냉난방 시설로 교체되었습니다. 또 목재 창틀이 금속 창틀로 비뀌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붉은색 치장 벽돌이 원래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갈아끼워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의 건물 특징을 상당 부분 유지함으로써 원형이 잘 보존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배화여고에는 캠벨기념관 외에 초기 미국 윌슨 선교사의 집으로 사용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철수했던 미국 선교사들이 해방 후 다시 돌아와 사용했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1971년 이래 생활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인데요, 지금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또 1915년 들어서 보통과와 고등과, 유치원 등으로 이용되던 건물도 남아 있습니다. 애초에는 2층 규모로 지어졌는데 1922년에 3층과 지붕층이 4층이 증축되어 지상 4층짜리 건물로 변모했습니다. 건물 한복판에 앞뒤로 출입구와 계단을 두고 양쪽으로 교실을 배치해 실내 구성이 특이한 편인데요, 현재 과학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그것입니다.
배화여고 캠벨 기념관 전경1
6
윤동주하숙집터
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길 57
배화여고를 나와 북쪽으로 이동해 볼까요?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에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집 터가 있습니다. 종로구 옥인길 57 혹은 누상동 9번지가 그곳입니다.
지난 1917년 지금의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요, 초기에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뒤 1941년경부터 후배 정병욱과 하숙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하숙집이 바로 이 일대에 있었습니다. 후배 정병욱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金松(김송)’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김송은 윤동주보다 8살이 많았던 함경도 출신의 대표적인 항일 작가였습니다. 윤동주은 김송의 집에 하숙을 하며 세상사와 문학 등에 대한 지평을 넓혀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집에 머물며 <별 헤는 밤>을 비롯하여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윤동주가 하숙을 하던 그 집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이 그러하듯 그곳 역시 다세대 주택으로 개발되어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하숙집은 사라졌지만 그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그리고 작품 세계를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 하숙집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청운동 위쪽에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이 그곳인데요, 상수도 가압장으로 쓰이다 버려진 건물을 리모델링해 2012년 문을 연 공간입니다.
내부에는 윤동주 시인의 친필과 문집, 그리고 고향인 명동촌에사 가져온 우물 시설물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상수도 가압장의 물탱크 시설은 영상 감상실로 이용되고 있고요.
또 옥상에서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도 닿게 됩니다. 누상동에서 하숙 생활을 하던 윤동주 시인은 아침에는 종종 인왕산 바로 아래 수성동계곡에서 세수를 하고, 인왕산 자락으로 산책을 나갔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발걸음을 따라 동네를 돌아보는 것도 인상적인 추억을 남기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윤동주하숙집터
7
통인시장 및 원조 할머니 떡볶이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필운대로6길 6
윤동주 하숙집 터에서 옥인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도로 한복판에 정자가 하나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서울미래유산인 통인시장이 있고 역시 서울미래유산인 원조 할머니 떡볶이 집이 있습니다.
통인시장은 지난 1941년 이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설시장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확장 발전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입니다.
공설시장 주변으로 정식 상점과 노점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크게 확장되었고, 지난 2005년에는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현행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인정시장(認定市場)으로 등록된 뒤 지붕 아케이드 시설 등을 갖추며 비바람으로부터 편안하게 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변모해왔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시장상인회가 주축이 되어 재래시장 중에서는 드물게 통합콜센터와 배송센터를 설치하고, 온라인 쇼핑몰(http://tonginmarket.co.kr/mall/index_shop.php)까지 개설한 상태입니다.
또 2012년 초에 시작된 ‘도시락 카페 통(通)’은 통인시장을 넘어 서울과 전국의 여러 전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이디어 중의 아이디어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즉 1냥에 500원짜리 엽전을 구입한 뒤 그 엽전들을 가지고 여러 매장에서 자유롭게 먹을거리를 구입해 시장상인회가 제공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도시락 카페 통을 통해 하루 평균 방문객 1,500명이 넘는 시장으로 활성화된 통인시장에는 70개가 넘는 식당과 반찬가게 등 요식업종이 제일 많고, 채소나 과일, 육류, 생선 등을 파는 매장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원조 할머니 떡볶이’입니다. 지난 1956년 실향민이었던 한 할머니가 노점 형태로 개업한 뒤 2016년 현재까지 성업을 이어가고 있는 떡볶이 집인데요, 특이한 것은 떡볶이는 고추장으로 볶고 조리는 것이 아니라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간을 한 뒤 기름으로 볶아 낸다는 겁니다. 국물이 없기에 조리한 뒤 시간이 지나도 불지 않아 직접 먹기 보다 구입해 집이나 직장으로 가는 손님도 적지 않은 편입니다.
시장1
1
탑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