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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예술과 문화의 용광로 대학로
0 1725 2017.01.18 약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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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대학병원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연건동 28
젊음과 낭만의 거리로 불리우는 곳 대학로. 누구나 연극이나 뮤지컬과 같은 공연을 볼 때면 한번씩 들르는 장소가 바로 이곳 대학로일 텐데요, 대학로의 숨어있는 역사는 얼마나 깊을까요?
먼저 서울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에 가면 옛 대한의원 건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난 1907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적인 병원 건물이기도 한데요, 앞서 1885년에 개원한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과 ‘광제원’ 등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근대적인 서양 의료기술과 의학교육을 국내에 도입하는 창구 역할을 한 기구입니다.
하지만 일제에 강점된 뒤에는 의사나 약제사, 사무원들이 대부분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이름도 ‘조선총독부의원’ 나아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등으로 변경됐습니다. 조선인들에 의한 근대적인 의료서비스 제공 노력이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병든 사람들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아니, 병들기 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지석영 선생입니다. 1855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사망한 지석영은 일본으로부터 종두법을 도입해 마마 퇴치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지금이야 그 위험성을 자각하는 이들이 많이 없지만, ‘두창’이나 ‘천연두’라고도 불리는 마마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얼굴에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곰보 흔적을 남기던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사망률이 매우 높아 한 때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세계 전체 사망 원인의 10퍼센트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지석영과 같은 이들의 노고와 끊임 없는 연구 개발을 통해 지난 1979년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발생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마마는 인류가 개발한 백신을 통해 완전 퇴치되었습니다. 물론 일제가 자신들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석영과 같은 인물을 앞에 내세운 반면, 이전의 조선 정부가 했던 마마 퇴치 노력을 폄하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요. 또 지석영 스스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하기도 하는 등 친일부역 혐의마저 안고 있기는 합니다.
여하튼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은 경성의전과 통폐합되어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입니다. 지난 1979년에는 현재 본원으로 쓰이고 있는 신관을 완공했고, 1982년에는 어린이병원을, 1993년에는 치과병원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울대학병원 정면
2
학림다방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명륜4가 94-2
서울대병원 후문을 통해 다시 마로니에공원 맞은편으로 나온 뒤, 좌회전을 해 혜화동로터리 쪽으로 200여 미터만 걸으면 왼쪽에 ‘학림다방’이라 쓰인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1956년 지금의 위치에 창업주인 신선희 씨가 개업한 뒤 1975년 신 씨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지금의 이충열 씨로 대표가 바뀌었고, 1984년에 건물을 신축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다방, 요즘 자주 쓰는 말로 카페입니다.
그런데 학림다방은 많고 많은 카페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일단 학림다방은 서울대와의 인연을 떼어놓고 볼 수 없는데요, 학림다방이란 이름 자체가 서울대 문리대의 축제 이름인 ‘학림제’에서 따온 말입니다. 또 학림다방의 별명은 ‘서울대 문리대 제25강의실’이었습니다. 즉 문리대 학생들이 강의실에서의 수업 뒤 이곳에 들러 ‘세상’을 공부하던 또 다른 의미의 강의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림다방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한 4.19민주혁명, 박정희정권의 5.16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 전두환 등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하던 학생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아지트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대표적으로 ‘학림사건’의 현장이 바로 이곳 학림다방입니다. 학림사건은 지난 1980년대의 대표적인 공안 사건 가운데 하나인데요, 12.12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민주화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가진 대학생들을 반국가단체 조직범으로 몰아 처벌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학림다방이 늘 투쟁의 산실로서만 기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음악이나 연극, 문학을 사랑하던 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 곳이이기도 했습니다. 훗날 문학으로 명성을 얻은 이청준이나 김승옥, 황지우, 김지하 등의 단골집이었고, <목마른 계절>과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의 작가 전혜린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 김민기 등 음악인들의 주요 거처이기도 했고요.
대표가 몇 번 바뀌었고, 내외부가 처음과는 달라졌으나 지금도 옛스런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학림다방…. 그 역사성과 무게감 때문인지 내부를 울리는 은은한 음악소리와 커피향이 더욱 진듯하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학림다방 외부 전경
3
마로니에공원
주소
서울 종로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1.5 킬로미터의 거리. 이곳이 바로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의 거리 대학로입니다. 그리고 대학로의 상징물은 누가 뭐라 해도 마로니에공원이 아닐까요?
학림다방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서울대병우너 후문에 닿기 직전에 대로 건너편으로 아름드리 나무들로 가득 찬 공원이 보입니다. 바로 마로니에공원입니다.
사실 무심코 부르던 이름 가운데 하나인 ‘마로니에공원’... 마로니에는 다름아닌 나무 이름입니다. 유럽 남부가 원산지인 마로니에 나무는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4대 가로수종의 하나로, 지난 1926년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부임해온 일본인 교수 우에노 나호테루가 지중해에서 직접 공수해서 심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마로니에 꽃의 꽃말입니다. 마로니에 꽃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그 첫 번째는 타고난 재주, 천재, 하늘이 준 재능이라고 합니다.
우에노 교수는 마로니에의 뜻을 알고 갖고 온 걸까요? 마로니에의 꽃말처럼 마로니에가 심겨지기 수백 년 전부터 이곳엔 조선시대 최고의 수재들이 모였던 성균관이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 이곳에 젊은이들을 모여들게 한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7백 년 전 조선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1398년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 성균관을 세웠습니다. 이곳에 공자와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선시대 최고의 석학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지역을 당시 사람들은 숭배할 숭에 가르칠 교 자를 써서 숭교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대학로가 자리한 지금의 동숭동은 숭교방의 동쪽 동네라는 뜻이고요.
태학이라고도 불리우며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5백 년 간 계속되던 성균관의 역사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합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그 역할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26년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을 세운 겁니다.
그리고 해방 뒤 경성제국대학과 몇몇 학교를 통폐합 해 서울대학교가 들어섭니다. 2016년 현재 마로니에공원 남쪽에 서서 ‘예술가의 집’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 옛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입니다. 그리고 마로니에공원 자리는 서울대 문리과 대학이 있던 곳이었고요. 지금은 서울사대부설초등학교와 서울사대부설여자중학교가 되었지만 예전엔 서울대 법학대학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마로니에공원
4
아르코 예술극장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동숭동 1-111
아름다운 마로니에 나무로 유명했던 서울대 문리대 교정... 마로니에 꽃말의 예언처럼 타고난 수재들이 이곳에서 캠퍼스의 낭만을 누렸고, 유신헌법으로 암울했던 1970년대에는 이 거리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서울대학교 교정을 수놓은 마로니에의 두 번째 꽃말은 ‘행동하라’였습니다.
즉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 서울 시내 한복판의 서울대학교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늘 “유신 철폐”를 외치는 함성으로 들썩이던 이 일대는 더 이상 낭만의 거리가 아닌 학생운동으로 가득한 거리가 되었고, 이에 고민하던 박정희정권은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1975년 발표된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화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동숭동, 용두동, 종암동, 공릉동 등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들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당시만 해도 서울 변두리였던 관악산 골프장으로 옮겨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서울대가 떠난 자리에 서울시는 공원을 조성했고, 공원을 뺀 나머지 공간은 고급주택지구를 만들기 위해 매각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의 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할 즈음 문화 예술인들의 저항에 부딪힌 겁니다. 결국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조성돼야 한다는 문화계의 의견이 반영돼 서울대 본관 건물은 문예진흥원을 거쳐 지금처럼 예술가의 집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마터면 철거될 뻔했던 서울대 본관 건물은 한국 건축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박길룡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문화예술계의 노력으로 서울대학교가 떠난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일대에는 연극·콘서트·뮤지컬 등이 무대에 오르는 소극장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 중심 역할을 하는 공간들이 있습니다. 마로니에공원에서 보면 북쪽과 동쪽에 붉은색 벽돌로 지은, 마치 아담한 성채 같은 건물들이 보입니다. 동쪽의 건물이 아르코 미술관이고 북쪽 건물이 아르코 예술극장입니다. 모두 서울미래유산들인데요, 각각 1979년과 1981년에 건립된 시설들입니다.
아르코 미술관은 한국문예진흥원 ‘미술회관’으로 들어선 이후 2005년 지금의 아르코 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요, ‘한국 현대건축의 풍운아’라 불린 김수근의 작품으로 건립 당시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외관이 비슷한 아르코 예술극장 역시 김수근의 작품인데요, 문예회관 극장으로 문을 연 이후 2005년에 지금의 아르코 예술극장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아르코 예술극장 전경1
5
이화장
주소
마로니에공원 동남쪽에 오래된 한옥이 있습니다.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5천6백여 제곱미터 면적의 거대한 ‘이화장’입니다.
미국을 근거지 삼아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한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계엄령을 선포해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감금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사사오입’ 즉 변칙적인 반올림과 부정선거를 통해 제3대, 나아가 제4대 대통령에까지 오르기도 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그러나 절대권력자 이승만은 결국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맙니다.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으로 하야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나먼 하와이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서야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사용하던 집이자 4.19민주혁명으로 하야한 뒤부터 하와이로 떠나기 전까지 잠시 거처했던 곳이 바로 이화장입니다.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화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지난 198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세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부역혐의자 김경승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가파른 비탈 위로 눈을 돌리면 언뜻 보기에도 소박해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국무총리와 각부의 장관 등 초대 내각을 구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건물인데요, 내각을 짠 곳이라고 해서 ‘조각당’이라 불립니다. ‘ㄷ’자로 생긴 본관에 들어서면 벽면을 따라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이나 서신 등이 진열되어 있고, 1904년 옥중에서 쓴 국민계몽서 <독립정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한때는 탐스러운 배꽃이 만발했다고 전해지는 이화장…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적막하면서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또 절대권력자로서 혼란했던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데 공헌하기는 했지만, 정작 불법적으로 장기집권을 꾀하는 등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과오를 범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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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 벽화마을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이화동 일대
이화장에서 동쪽에 있는 낙산 쪽으로 난 좁고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벽마다 특이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는 동네에 닿습니다.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기도 한 이화동 벽화마을입니다.
다만 원래부터 이화동에 벽화가 그려졌던 것은 아닙니다. 애초 이화동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서울의 달동네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근처의 창신동 및 보문동과 함께 동대문 의류시장을 떠받치던 둘도 없는 봉제산업 생산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량이 늘어나며 섬유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동네 분위기도 함께 쇠락해 갔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분위기가 대략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이후 큰 변화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일부러 찾아오는 국내외 여행자들로 북적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주민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낙후됐던 이화동의 풍경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이 시작된 겁니다. 7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한 ‘낙산프로젝트’가 그것입니다. 칙칙한 분위기의 동네에 벽화를 그려넣음으로써 분위기를 쇄신해보려는, 한국 최초의 벽화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특히 이 일대에는, 벽화가 그려진 주택들 사이사이로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는 건물들이 있어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LH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이 이화장 주변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1958년 1~2층짜리 소규모 주택들로 조성한 국민주택단지입니다. 9,643제곱미터의 대지에 39~49제곱미터 면적의 주택 104세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의 일반적인 주택들과는 달리 화장실을 실내에 뒀고, 시멘트 블럭을 주재료로 하여 슬레이트 기와를 얹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축재를 활용했고, 2층은 하중을 줄이기 위해 다다미방으로 꾸미는 등 다양한 시도가 가미된 건축물군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살림집으로 쓰이기에 겉에서만 볼 수 있지만 몇몇은 이화동마을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어 직접 들어가볼 수도 있습니다.
이화동 벽화마을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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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이화동 9번지 일대
물론 벽화마을이 되었다고 해서, 국민주택단지가 특이하다고 해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화동에서 시작되어 인기를 얻은 동네 벽화그리기 사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문제점도 가장 먼저 찾아왔습니다. 예컨대 조용했던 마을에 찾아오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생활의 공간임을 인지한 지 못한 채 아무 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불편함을 호소하는 주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사생활 침해를 호소하는 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또 관광객을 상대로 영업하려 카페나 레스토랑을 비롯한 상업시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임대료가 치솟았고, 결국 원래부터 터잡고 살아온 주민들이 동네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까지 맞딱뜨리게 된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민들이 벽화를 지워달라고 요청하거나 직접 지워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가파른 골목과 지난 1950년대의 주택이 남아 있는 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의 보물단지 같은 곳 이화동… 그러나 이화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좀더 나은 동네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는지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치열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화동 낙산 국민주택단지 건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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