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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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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게시물 : 36건   |   페이지 1 /4
만리창터

만리창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77 작성일19.07.15
공물로 거두어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의 별창 만리창은 현재 용산구 효창동 199번지에 있었다. 갑오개혁 전까지도 효창동, 도원동 일대에 만리창(새창, 신창)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창계(契)라고 칭했다. 만리창은 선혜청의 별창고로서 본래 진휼(賑恤)을 실시하던 곳으로 해서(海西)와 호남을 구관(句管)하였다. 본래 설진(設賑)하던 곳이었던 것을 지금은 해서(海西)ㆍ호남(湖南)의 구관으로 하고, 혹은 만리창(萬里倉)이라 칭하였다. 만리현(萬里峴)에 있음. 고가 58문. 진청(賑廳) 35문 ○ 해서 3문 ○ 호남 20문. [네이버 지식백과] 만리창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청파배다리터

청파배다리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53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 ? 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 터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청파 배다리는 청파와 원효로를 통하는 길목에 있는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이다.배다리를 지나는 큰 길을 ‘주교대로’라고 했다. 남대문에 걸려있던 숭례문이라는 현판이 임진왜란 때 없어져서 다른 사람의 글씨로 쓴 현판을 걸었지만 자꾸 떨어졌다. 광해군 때 청파 배다리가 있는 웅덩이에 이상한 기운이 비쳐서 그 웅덩이를 팠더니 양녕대군이 친히 쓴 숭례문의 현판이 나왔는데, 그 현판을 건 뒤로는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서계동은 서울역 뒤 쪽 일대에 위치한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배다리골로 불렸다. 그 이유는 이 근처에 청파 배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일정터

천일정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46 작성일19.07.15
조선 성종기 문신인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지은 정자 천일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이란 구에서 취하여 지었다 한다. 천일정은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로, 고려시대 때에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때문에 천일정 주변으로 절터였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강화의 쑥돌로 된 양길이 2.1m와 1.8m, 깊이 0.8m의 큰 돌연못이 남아있었다. 천일정은 김국광에 의해 처음 지어진 이후,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후 두세 차례의 변천이 있은 후 한때는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일정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강진나루터

한강진나루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33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한남동과 신사동을 연결하던 나루터 한강진 나루터는 한남동과 사평나루(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터이다. 일명 한강도, 사수도, 사리진도, 사평도라고 했다. 신라시대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사평도라 하고 나룻배를 배치하여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중요한 나루터로서 송파, 노량과 더불어 삼진(三津)의 하나였다. 그 중 한강진 나루터는 왕래가 가장 빈번하고 큰 나루였다. 조선시대 한강진에는 10척의 나룻배가 있었는데 세종 때 삼전도(나중에 송파진)가 신설되면서 배 1척이 삼전도로 옮겨져 9척이 운행되었다. 연산군은 통행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이곳에 부교(배를 연달아 이어서 강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 일명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조선후기 부교는 철거되고 다시 나룻배가 운행되었다. 하지만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사공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나룻배를 고칠 수 없게 되었다.이로 인해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물에 빠지거나 나룻배가 서로 충돌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한남대교가 설치되어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강진나루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독서당터

독서당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1 조회수39 작성일19.07.15
젊은 학자들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던 독서당이 있던 곳 일명 호당(湖堂)이라고 하는데,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독서를 하게 한 것이 그 효시였다. 독서당은 성종 23년 용산 청암동에 있는 절을 수리하여 마련된 남호독서당이 첫 정식 장소였으며,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가 중종 12년부터 두뭇개 동호당, 즉 동호독서당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이후에는 한강별영에서 독서당의 명목이 이어지게 되었다. 독서당의 당원은 한 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또한 독서당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내어 그 권위가 높았는데,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율곡 이이(李珥)도 이곳 독서당의 당원 중 한명이었다. 독서당은 숙종 35년에 이르러 폐지되면서 35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이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서당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이태원터

이태원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9 작성일19.07.15
조선 초기 공무수행 관리자와 여행자가 머물던 숙소 현재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았는데 이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하여 살았다는 점에서 어원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다고 해서‘이태원(異態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태원은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숙소로 설치된 ‘한양 4원(院)'중 하나로 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었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은 주로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 숙박시설을 가리킨다. 이태원은 남대문-이태원-서빙고-동작진-과천을 거쳐 남쪽지방에 이르는 길목이자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원터이다. 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는 전혀 다른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이태원동 마을은 원래 현 이태원 2동 중앙경리단 주변으로, 이 부근에는 지금도 이태원부근당이 있어, 매년 당제가 열리는 등 예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남산기슭 급경사상에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이태원’은 구 이태원 마을자리로부터 해밀턴 호텔을 중심으로 한 현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일대는 군기사 등 군사관련 시설이 많았으나, 군사직역의 색채가 본격화 된 것은 일제 시대 이후로 용산, 남영동 등이 군용지로 책정되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입지하였으며(현 미8군 자리), 구 군인아파트(현 남산2호 터널 입구, 대림아파트단지)가 일본군의 사격장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를 강화하였고,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인근에 ‘해방촌’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이태원동, 한남동에 외국공단이 들어서고, 1963년 사격장터에 군인아파트가 건설되는 등 외국인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도시화가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생활용품과 잡화류 위주의 상가들이 존재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970년대 초반 121후송병원이 부평에서 미8군 영내로 이전된 이후 1만 여명의 미군과 관련 종사자 및 기지촌 상인(현 상인의 30% 차지)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현재 모습의 이태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섬유산업의 호황과 더불어 값싸고 특색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값싼 노동력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공급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각종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이태원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일본인을 위시한 많은 관광객들의 쇼핑관광명소와 유흥업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미군 중심의 거리에서 세계인의 거리로 변모하고 있고, 1997년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전통과 현대,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혼재하는 ‘퓨전’의 장소로 변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태원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와서터

와서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8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기와를 만들어 공급하던 관청 1392년(태조 1) 조선의 새 관제(官制)를 정할 때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설치하고 각각 직(直) 1명씩을 배치하여 기와 굽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05년(태종 5) 공조의 속아문(屬衙門)이 되었다. 1460년(세조 6)에 동요와 서요를 합쳐 와요(瓦窯)라고 칭하였으며 이후 얼마 안 되어 와서(瓦署)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1882년(고종 19) 재정절약 차원에서 와서를 혁파하였다. 와서의 관원으로는 겸직인 제조 1명과 종6품의 별제(別提) 3명이 있었으며, 전국에서 뽑아 올린 승려 수백 명과 기와 굽는 기술자인 와장(瓦匠) 수십 명이 근무하면서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였다. 기와 수요가 늘어나면 국가에서는 기존의 와서 외에 특별히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여 기와를 굽도록 했는데, 1406년(태종 6)에 설치한 별와요가 그 시초였다. 당시 승려 해선이 서울에 초가집이 많아 미관상 좋지 않고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별요(別窯)를 설치해서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면 10년 안에 서울 집이 전부 기와집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에서 해선의 제안을 수용하여 별와요를 설치하고 해선을 화주(化主)로 삼고 전국에서 승려 270명과 와장 40명을 상경하게 하여 기와를 구워 민간에 판매하게 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큰 흉년이 들자 별와요를 없앴다. 별와요는 이처럼 설치와 혁파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와서는 기와를 굽는 일을 담당하여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도성 밖의 남부(南部) 둔지방(屯之坊) 지금의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와서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군자감 강감 터

군자감 강감 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9 작성일19.07.15
태조4년(1395)一광무2년(1898) 전국 군전(軍田)에서 군량을 받아들여 저장하던 관아자리 조선시대 군량미 및 군수품 저장과 출납을 맡은 국가 관청 군자감은 조선시대 때 군량미 및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국가관청이다. 1392년에 최초로 설치하였는데, 성 안에 본감 · 분감과 성 밖 용산강가에 강감을 두었다. 원래 군량미는 한 곳의 창고에 보관하였는데, 점차 그곳이 좁아지자, 1413년에 용산강창을 준공하였고, 이후 송현에도 창고를 세웠다. 서강에 있었던 기존의 창고를 본감, 새로 지어진 두 창고를 분감이라 하였는데, 판사가 세 곳을 총괄하고, 관원들은 분담하여 각 창고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1744년 이후 분감만 두고 관원들의 월급인 녹미도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보통 30만 섬의 곡식을 저장했다고 한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자감 강감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구 용산철도병원 본관

구 용산철도병원 본관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9 작성일19.07.15
등록문화재 제 428호 1928년 용산철도병원(구 철도국 서울진료소) 본관으로 지은 건물. 1928년 철근콘크리트조 적벽돌 마감으로 재건된 지상 2층 규모의 병원 건축물. 일제강점기 철도기지로서 신시가지로 개발되었던 용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 건립 당시의 구조, 재료, 공간구성을 간직하고, 절제된 장식과 함께 서양의 고전적 양식에서 근대 건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  
연복사탑중창비

연복사탑중창비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8 작성일19.07.15
1494년 세워진 연복사탑의 중창 내력을 담은 석비이며, 본래 경기도 개성에 소재하였던 것인데 20세기 초반에 서울로 이전되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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