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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게시물 : 55건   |   페이지 5 /6
공간을 취하다, 예술에 취하다 구의창작오픈스튜디오

공간을 취하다, 예술에 취하다 구의창작오픈스튜디오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158 조회수2880 작성일14.04.01
서울, 문화에 빠지다 “ 공간을 취하다 ,  예술에 취하다 ”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이웃님들 !     바로 지난 주  6 월  15 일 ( 토 )~16( 일 )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구의취수장 에서 재미난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  ‘ 취수장 ’ 과  ‘ 문화 ’ ,  전혀 연결되지 않는 이 두 단어의 조화를 보여준 행사였지요 .   구의취수장 을 무대로  거리예술가들이   모여 투철한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색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            의외의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적 의미 찾기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W 호텔을 지나 굽이굽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구의취수장 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떨어지는 이 취수장에 누가   올까   싶기도 하지만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는 찾아오는 길부터   ‘ 의외의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적 의미 찾기 ’  라는 숨겨진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거리예술 창작기지로 탈바꿈할 구의취수장은   서울시민을 위한  물공급을 담당하던 곳 이었습니다 .  하지만 새로운 취수장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다른 용도로의 활용방안이 제기되었지요 .  이번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에서는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시범삼아 운영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 6 개의 국내외 단체들이 구의취수장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 ,  구의취수장 공간의 특성을 활용하여 재해석한 작품 ,  구의취수장 에서 만들고 연습되어져 다른 축제에서 선보일 작품의 시연 및 제작과정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었지요 .  취수장 입장부터 배우와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를 따라 관람을 하게 되는 이 오픈스튜디오의 공연은 모든 퍼포먼스가 끝마치면 어느새 취수장 한 바퀴를 다 돌게 된답니다 .        여기서 잠깐 !  구의취수장 은 ?     구의취수장 은  1976 년부터 최근까지  30 년이 넘는 시간동안 서울시민을 위한 물공급의 원천지로 기능하였습니다 .  그러나  2011 년  9 월 ,  강북취수장의 신설로 인해 기존의 구의취수장은   일부 운영중단이 되었습니다 .   이에 따라 취수장 공간의 용도 변경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  공간의 특성과 환경적 조건 등을 고려하여 거리예술작품의 제작 ,  연습 ,  배급이 가능한 창작기지로 변화하고자  2013 년 시범 운영을 진행중입니다 .        버려진 공간의 예술적 활용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퍼포먼스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는 제작 과정 중에 있는 작품들을 공개하고 시연하는 자리로써 개별 공연들이 완성된 형태는 아니었으나,  앞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상상해보는 자리로써의 의미가 컸습니다.  6월15(토)~16(일)에 거쳐 치러진 이번 행사에서는 9월에 선보일 작품들을 미리 시연해보는 자리였지요. 2시간 반에 걸쳐 시연된 여섯 개의 작품들은 아직 미완성인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습니다.                   - 엑스니일로 (Ex nihilo) 와 프로젝트 외가 함께한  ‘ 날봐  Nal-Boa 첫 공연은 취수장 밖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엑스니일로라는 프랑스의 거리무용단과 프로젝트 외의 젊은 무용수들이 함께 하여 역동적인 춤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들이 공연한  ‘ 날봐  Nal-Boa’ 는 한국을 주제로 공동창작 한 거리무용극으로  2010년 과천에서 초연을 시작하여 프랑스, 유럽, 멕시코 등지의 여러 거리예술축제에서 선보인 독특한 춤 퍼포먼스입니다.   무용수들은 건물 밖에 놓여진 기존의 취수장 기구들을 소품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 줬습니다.  흙먼지 사이를 뒹굴고 벽을 활용하여 춤을 추는 그들의 공연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모습처럼 거칠었는데요.  그런 그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에 관객들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답니다.     - 프로젝트 외  ‘ 거인 가르강튀아  1’ 의 탄생을 체험하다   두 번째 공연은 안내자의 인솔을 따라 건물 안에서 진행되었습니다 .  흥미로운 점은 공연장을 따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취수장 건물 내부 자체가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인데요 .  때문에 다소 위험할 수도 있지만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취수장 내부의 사다리 ,  장치들을 지나 퍼포먼스를 보러 입장했습니다 .   ‘ 거인 가르강튀아  1’ 은 프랑스의 구전설화를 가지고 만든 특정 공간형 무용극입니다 .  동굴 같은 취수장 내부의 특징을 살려 거인이 엄마의 몸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인데요 .  취수장 내부를 달리고 뒹굴며 연기하는 배우들을 따라 관객들은 이동하면서 그들의 연기를 관람하였답니다 .     - 창작중심 단디  + 김묵원  +  김경민  ‘ 찰나에 피다 ’   취수장 내부 공연의 매력은 다양한 장치의 활용이었습니다.  취수장 내부에 존재했던 각종 기계와 설치물을 사용하면서도 기존에 없던 영상과 스크린을 활용하여 또 다른 분위기의 모습을 연출하였는데요. ‘ 찰나에 피다 ’ 는 스크린을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 찰나에 피다 ’ 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여 공연을 하고 스크린을 활용해 드로잉 아트를 선보였습니다.  라이브인 음악과 드로잉 아트 그림을 배경으로 공중엔 배우가 매달려 춤 퍼포먼스를 선보였지요. ‘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들어낸 꽃은 바로 예술 ’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구의취수장 안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워낸 것입니다.     - 프로젝트 잠상  < 아주 작은 꿈 >   프로젝트 잠상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구의취수장의 특징을 그대로 가져와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  미디어 - 설치퍼포먼스가 혼합된 이 공연은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고 , 커다란 스크린과 영상을 활용하여 취수장의 환경적 특성을 살려냈습니다 .   ‘ 아주 작은 꿈 ’ 은 서울시의 모든 물을 한데 모아 펌프를 활용해 다시 물을 내보내는 취수장의 특성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  사람들의 꿈을 모아 다시 뿌린다는 컨셉의 이 퍼포먼스는 취수장을 하나의 우주같이 표현하기도 하고 ,  실험실같이 표현하기도 하면서  공간의 새로운 이면을   보여줬습니다 .     - 배낭속사람들 < 멈춘 시간 ,  흐르다 > 취수장의 공간 활용을 가장 멋있게 표현한 배낭속사람들의  '멈춘 시간 ,  흐르다' 는 취수장 내부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영감을 받아 재구성된 공간탐색형 공연입니다.  바닥에 세워진 조형물과 배우의 기묘한 움직임을 바로 옆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공연이지요.  인간의 탄생-진화-변화를 모티브로 한 퍼포먼스는 마치 하나의 영화 장면을 보는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세심한 연출을 뽐냈습니다.   서울시민의 참여와 관심으로 만들어지는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구의취수장 은 산업유산이 거리예술의 장으로 재활용되는 국내 1호의 사례입니다.  그만큼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는 여러분들의 풍성하고 다양한 생각이 필요하답니다.  산업유휴시설이 거리예술 창작기지로 변해 가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면 아래와 같이 연구 프로젝트 공모 진행을 참고하셔서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모기간은  2013.6.12( 수 )~2013.7.2( 화 ) 까지 이뤄질 예정이며 위와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만 18 세 이상 누구나 참여 가능하니 참여해보세요 !  자세한 사항 및 신청은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는 버려진 공간에서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찾는  흥미로운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 동안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의 오픈스튜디오와 달리 거칠고 본연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거리예술의 가치를 보여준  < 구의취수장 오픈스튜디오 > 는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는데요 .  이제 막 그 의미를 찾아가는 초기단계이지만 앞으로 거리예술의 주역이 되는 장소로  구의취수장이 거듭나기를 응원합니다 .     *  구의취수장은 현재 일부 ( 제 2 취수장 ) 가 가동 및 운영 중인 산업시설로 일반인 출입제한구역입니다 . 이번 행사 외의 다른 목적으로는 개별 방문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 점 유의해 주세요 !    서울, 문화에 빠지다  |  서울메이트   http://blog.naver.com/i_sfac/10170585733
만리동 성우이발관

만리동 성우이발관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4 조회수2630 작성일14.04.01
나는 오늘 머리를 잘랐다.  마포 만리동에 있는 성우 이발관에서...........   바로 이곳이 지금 이발사의 장인(부인의 아버지)으로부터 2대째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대로 였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에 다니던때 그대로.....   실내는 형광등 불빛으로 약간은 어두워서 역시 옛날의 어린 시절의 분위기는 그대로...   어느곳하나 오래되지 않은것이 없다. 스카치테이프로 붙여가며....   아마 이의자는 이제 골동품에 속하지 않을까?...     자, 이제부터 머리를 맡겨보자,   고객이 이발중에 혹시 더울까봐 빨래집게로 천을 들어 올려주는 센스, 능숙한 아저씨의 솜씨가 믿음직 스러웠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면도용 비누거품솔이다. 이건 또 몇년이나 사용 했을까? 솔의 끝이 닳고 낡아서 오히려 면도 전에 비누를 발라줄때 부드러워서 좋았다.   자, 이제는 마지막 코스인 머리감기와 세면! 물뿌리기 조루와 세면대가 유난히 작아보인다. 어려서는 많이 커보였었는데..... 그래도 불편한점은 전혀 없었다. 얼굴 세수까지 할수 있으니 너무 시원하고 편리했었다.   샴푸와 린스는 사용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헹구는 물에 약간의 양조식초를 넣어서 머리를 헹구어 내면 끝이다. 샴푸나 린스를 사용하면 아무리 물로 헹구어내도 잔유물이 남아있어서 두피나 머리결에 절대 좋지않다고 주장하시는 주인 아저씨의 말이다.  내생각도 그렇다.   요금도 이렇게 겸손하다. 이발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모두 30분여 걸린다. 물론 아저씨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시고,   이곳을 찾아 가려면 서울역 서부역에서 만리동 고개로 가다가 배문고등학교 쪽으로 좌회전 하고 배문고등학교를 지나 오른쪽 두번째 골목에서 찾을수 있다. 만리동 성우이용원   머리를 잘 자른다는 것은 일단 이발사가 고객의 스타일을 먼저 알수 있어야한다. 고객의 머리를 10번을 이발해도 최소한 8번은 같은 머리스타일을 만들수 있어야한다.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가 자랐을때에도 머리카락이 길어졌을뿐 스타일의 변화가 없어야한다. 이것이 성우이용원 사장님의 말하는 진정한 이발의 기술이란다.   기술이 있었고,추억이 있었고,정감까지 묻어나는 이발소를 나는 오늘 알았다. 다음 또 이곳 성우이용원에 갈때를 나는 지금부터 기다린다. (매주 수요일은 휴무) [출처] 만리동 성우이발관 | 작성자 칸  
홍익문고에게 위기란 없다

홍익문고에게 위기란 없다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3 조회수2008 작성일14.04.01
홍익문고에게 위기란 없다       흔하디흔했던 동네 서점은 언제부턴가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의 등쌀에 밀려  이제 눈 씻고 찾아도 그 흔적을 보기란 어렵죠. 하지만 무려 50여 년 동안이나 한 곳을 지켜온 서점이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바로 1960년 창천동에 문을 연 이래 무려 반세기의 역사를 지닌 신촌 <홍익문고>인데요.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아버지를 이어 2대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박세진 사장은 홍익문고를 찾는 사람들을 보면 인터넷에서 싼 값에 책을 사지 않고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더 귀한 손님으로 느껴진다고 하는 데요, 저는 꼭 신촌에 들릴 때면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홍익문고에 들어가보곤 했답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장소 또한 종종 홍익문고 앞에서 보자, 이런 식으로 잡고 말이지요.   파란 간판 위에 군더더기 없이 홍익문고 네 글자로 새겨진 이름을 보면서 저는 가끔 왜 하필 홍익문고로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는데요, 홍익문고의 뜻은 박세진 사장의 아버지께서  “홍익의 뜻이 4명을 이롭게 하라.  그 중에서 손님, 직원, 거래서, 가족 이렇게 이롭게 하면 그게 바로 홍익의 뜻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점 운영을 단순한 장사로 생각하지 않고 고객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아버님의 올곧은 마음가짐처럼 참 멋진 말이죠^^?   이와 같은 보기 드문 서점인 홍익문고에게도 큰 위기가 닥쳤었는데요. 바로 지난 봄, 서대문구청이 홍익문고 건물 부지 일대를 신촌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이었죠. 즉, 재개발에 떠밀려 존폐위기를 맞은 것인데요.     신촌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홍익문고의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주민과 학생, 그리고 시민단체 등 74개 단체에서 약 5.000여 명이 ‘홍익문고지키기 주민모임’을 결성하여 홍익문고가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서울시와 서대문구에 촉구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주민들의 힘 덕분에 홍익문고는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요, 책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박세진 사장님의 경영철학이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서점 또한 홍익문고와 같이 곳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동장군의 기승이 살짝 꺾인 요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책 한 권 구입하러 신촌 거리를 거닐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출처] 홍익문고에게 위기란 없다 | 작성자 carrott_bab
모두가 문인이 될 수 있는 공간, 문학의 집 서울

모두가 문인이 될 수 있는 공간, 문학의 집 서울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2 조회수1919 작성일14.04.01
                                                                                                                                        (사진 = 허인형)      우리는 지금 수많은 텍스트가 범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너도 매일 아침 쏟아져나오는 뉴스, 셀 수 없는 SNS의 게시글, 그리고 종이뿐만 아니라 전자책도 등장해 수많은 읽을 거리가 넘쳐나지만 정작 정제된 양질의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서울 남산 기슭의 자연에 둘러쌓여 고즈넉히 있는 곳, 문학의집 서울에서는 문인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의 글을 접하고 그들과 함께 교류할 수 있다.                                                                                                                                           (사진 = 허인형)  문학의 집 서울은 2001년 10월 26일 개관하여 문학을 더욱 아름답게 꽃피우려는 문학인들과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을 표방하고 있으며 문인회원, 시민회원 등으로 자유롭운 활동이 가능하다.  문학의 집 서울은 명동역과 충무로역 사이, 남산 한옥마을과 가까이 있으며 교통방송국 뒤에 위치해있다. 문학의 집 서울은 과거 국가안전기획부장의 공관을 개보수해 만들었다. 본관은 세미나실, 전시실, 사랑방, 책읽는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장문학공원이 본관 뒷편에 있어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사진 = 허인형)  본관 맞은 편에는 산림문학관이 있고 이곳에서는 각종 행사와 세미나가 열린다. 산림문학관은 유한킴벌리 우리강산푸르게 푸르게 기금과 산림청의 후원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세미나와 시낭송대회 등 행사가 진행되는 곳이다. 평소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문학회 모임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문학의 집 서울 입구에는 조그마한 카페가 있는데 이곳에는 문학의 집 갤러리, 아카데미, 우수문학서고 등이 있어  을 할 수 있다.                                                                                                                                           (사진 = 허인형) 11월에는 <문인들이 사랑한 화가 김점선 - 추모전>이 열려 김점선 화가의 원화, 판화 30여점과 생전에 박완서, 최인호 소설가, 이근배 시인, 이해인 수녀 등 많은 문인과 인연을 맺은 사연도 전시하였다.  2013년 12월 4일부터 2014년 1월 25일까지는 제1전시실에서 기획전시로 <문학, 그림을 읽다>가 진행되고 있다. 2011년, 문학의 집 서울 개관 10주년이 되는 해에 문학과 그림의 조화로운 만남을 위한 '그림으로 보는 한국문학 공모전'이 진행되었고 이후 매해마다 공모전을 열어 수상작을 선정하였다. 이 공모전은 근현대의 시와 소설을 선정하여 작품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 김광균의 시  <설야>,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빛> 등을 주제로 많은 작품이 출품되었다. 제1회에서는 소설 <운수 좋은 날>, 제2회에서는 시 <설야>, 제3회에서는 소설 <표보실의 청개구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사진 = 허인형)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다양한 행사들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제13회 시낭송경연대회를 열어 100여 명의시민들이 참가하여 20명의 참가자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12월 7일와 8일에는 시와 소설, 음악이 함께하는 연극,  라이브 문학 콘서트 <가족>이 서울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열렸다. 정지아 소설가, 김태형 시인, 김경주 시인 등이 출연하였고 그림작가 으니, 음악창작 그룹 the 륜이 참여하였다. '어색하고 편안하기도 하며 곁에 있어서 소홀하고 사랑해서 다 이해할 거라 믿는 우린 가족이다.'를 주제로 하여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사랑으로 쓰는 서울, 우리 동네 이야기 공모>를 통해 서울시민의 동네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였다.                                                                                                                                            (사진 = 허인형)    우리는 흔히 문학을 '글쟁이' 문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그저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수동적인 관객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문학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는 하나의 표현매체이며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문학특강,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등 문학을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시민들이 문학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문학이 담고 있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접하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문학으로 담아내보는 것은 어떨까.   [출처] 모두가 문인이 될 수 있는 공간, 문학의집 서울 | 작성자 영현대  
북촌 한옥마을

북촌 한옥마을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20 조회수3349 작성일14.04.01
서울 북촌 삼청동 한옥마을,   서울 도심속에  유일하게  전통 한옥이  밀집되어 있는곳인데 약간 언덕길을 따라  마을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도심속에  과거의 어느한지점 의 시간속에 정지되어 있는것같은 아련한  추억속으로 빠져드는  행복한  나들이를  할수 있는곳.           국내인뿐만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으로  즐겨찾는 명소가 된  삼청동 한옥마을.       한옥을 바라보면  항상 포근하고 정겨움을 느끼면서도 우리 할머님  세대에   추억이  가득  담겨 있을 것만 같아요        실지로 이곳에는 주민들 거주 지역이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늘  관광객이  밀집하고  모여드는곳이니 이곳 주민들에게  혹시나  불편하지나  않을까,,,,,,       즐거운 북촌 나들이를 위해 우선은  주민들이 불편 하지않도록  하는 약속도  있군요       골목길 관광  해설사분도  있군요 인터넷 예약도 하실수 있고   전화도 하실수 있어요 아래  표를 참조 하세요       북촌코스만 해도 2시간 30분이 소요 된다는데 골목길  관광 해설사 분의 도움을 받으면 좋을듯 합니다         참, 올라오는입구에 관광통역가이드분들이  다미약국 옆에서 도움도  주고 계시더라구요 올라오는길옆  북촌 박물관이  있어요       서울도심  한복판에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서   조상의 얼과 전통이 가득담긴  정지된시간의 느낌       그래서 한옥을 더욱 느끼고싶고 즐기고 싶고  함께 하고싶은 간절함 인가봐요       혹시라도  한옥 체험살이를 해보고 싶으시다면 숙박안내및  예약 대행 서비스도 있으니 아래 표를 보시고  참조 하세요     곳곳에  이런  팻말들이  보입니다 이곳 주민들을 위한  배려가  중요할것 같아요 "주민이 거주지역이니  조용히  해주세요"       추운겨울인데도  대나무 와 함께  어우러진 골목길          예쁜 모습을 담는  다정한  친구들의 모습         우리가 다녀 간날은  평일 이었는데도  이렇게  골목길이  붐빈답니다       골목길아래로는  도심  한가운데  시내  풍경이  보이기도 하구요       서울삼청동 북촌 한옥 마을을  찾아 오시려면 전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를 따라 쭉  올라오세요       재동  관광 안내소를 지나 정독도서관까지 올라와서  정독 관광 안내소 에서  친절한  안내를  받을수도 있답니다         정독도서관  길을 따라  내려와서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100m 정도 가서 돈미약국 골목으로 올라가시면  전체가  삼청동 북촌 한옥마을 전망대까지 쭉 올라가면  한옥 마을 전체를 볼수가 있답니다     리문이 의블로그  |  리문이   http://blog.naver.com/mlwapril/40205327050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ㅇㅇㅇ 1부 - 제과점(태극당)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ㅇㅇㅇ 1부 - 제과점(태극당)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5 조회수2790 작성일14.04.0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거...     내 얼굴 아니야?   약간 부패한 것 같은데. 자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멸종됐다고 하는데 닥쳐 내가 살아있으니깐.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생존신고했으니 이제는 서울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찾아서. . .                               태극당은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과점 '미도리야'를 인수해 1946년에 개업했다고 한다. 장충동에 자리 잡은 건 1973년.     동대입구역 2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중간쯤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태극당 건물만 딱 보이는데 순간 지하철 타고 70년대로 거슬러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빨리 빵 먹고 싶은 마음에 셔터를 누르는 내 손은 급해지고. 앞에 있던 아가들을 앞질러 빵집 털이범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감.     손들어 빵 내놔             쟁반 들고 집게로 빵 집는 상상하면서 들어갔는데 나와 빵을 가로막고 있는 진열장.     부숴버려.         내부가 굉장히 넓고 고급스러우면서도 금붕어 어항, 돌 조각품, 액자 등 인테리어가 정말 옛날 그대로여서 태극당 안으로 들어가면 1970년대 그 시절, 그대로 시간이 딱 멈춘 느낌이 든다.           와 진짜 겁나 오랜만이다 이 어항과 이 금붕어... 왠지 나보다 나이 더 많이 먹어서 밤 되면 어항에서 걸어 나와서 빵 포장할 것 같아.       잠깐 가격은... 미래에서 온 것 같은데?           글씨체 하나로 40년대를 넘나들다니 그 정도야 뭐... 난 얼굴 하나로 원시시대를 넘나드는데.       우와 추억 떠오른다 진짜...   내가 정자였던 추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니 저 때 난 태어나지도 않았어.       헐... 완전 커 저거 사서 다 먹는 사람 이해 못할 것 같음ㅋㅋㅋㅋ   그리고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 했다.       요즘에는 거의 대부분 우유 생크림 케이크라서 근 5년간 버터케이크는 구경도 못해봤는데. 완전 추억 돋았다.    할머니 칠순잔치 때 볼 법한 세기말 디자인의 케이크.       글씨체가 다...했잖아요...   처음에 모니카 아이스크림인 줄 알았다. 모니카라는 선교사가 들여온 아이스크림인 줄 알고 조금 고마워했지만 헛짓거리였음.   개당 1500원이고 10개 20개 30개 등 묶음으로도 판다.               얘기해주시는데 난 이미 빵에 영혼이 팔려서   "주세요... 그냥 주세요... 계산...빨ㄹ리 계산이요..."     옛날엔 여기가 미팅의 핫플레이스였다던데   "제가 맘에 드시면 크림빵을, 맘에 안 드시면 다른 빵ㅇ...   "곰보빵!!! 곰보빵!!!!!"   왜 갑자기 이런 시나리오가 생각나는 거지.       클래식한 포장지가 제일 맘에 든다. 왠지 안 버리고 간직해야 될 것 같음.   이걸 한 입 먹기 전까진 붕어싸만X 같은 눅눅한 질감의 과자를 상상했다.       하지만 한 입 먹었을 때,   대박...뭐야 완전 바삭바삭하네?!! 와 맛있어ㅠㅠㅠㅠㅠ 헐 다 먹음. 왜 10개, 20개, 30개 묶음으로 파는지 깨닫는 순간.     태극당 빵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크고 속이 꽉 차있다. 빵을 반쯤은 먹어야 속이 나오는 그런 빵 나부랭이와는 달라.       5000원...? 하지만 크기와 두께가 어마무시하다.   모나카만 여기 앉아서 먹고 나머지는 어무니아버지 드리려고 집으로 가져감.   가져가서 식탁에다 놨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가족들 아무도 안 먹는 거 그래서 왜 아무도 안 먹느냐고 했더니   빵 봉지만 보고 어디서 불량식품 가져왔냐며... 내가 먹고 싶은 거 참고 가져왔더니 아무도 안 먹어 참나...     나이쓰.   [출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OOO -1부- | 작성자   20trend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ㅇㅇㅇ 2부 - 중국집(안동장)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ㅇㅇㅇ 2부 - 중국집(안동장)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5 조회수2968 작성일14.04.0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찾아다니느라   자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추억팔이하러  다니는  조상님 된 기분. 이제 신문물이 낯설어 지려고 해... 왠지 한지에 붓글씨로 포스팅 해야 될 것 같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을 찾아다닐 때 맛집 탐방의 순간이 가장 설렌다.   아 내 심장 조용히 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은 1948년에 개업한 안동장이다.   오래됐다고 해서 낡고 중후한 분위기 일 줄 알고, 그냥 편하게 하고 나갔는데   세상에... 가게가 리모델링을 했네. 리모델링은 내 얼굴이 해야 될 거 같은데. 3층까지 있는 안동장. 주인아저씨께서 주문받으시다가 갑자기 다른 직원분한테 큰 소리로     "이열솨우디디 찍었어???" "!$#%@^*"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0개 국어를 하는 건가? 순간 주문을 손짓과 발짓으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화교 출신인 분이  3대째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이 정도 양이면... 내가 집에서 부엌 지나가다 식탁에 있는 음식  집어먹는 정돈데?   안동장에서 제일 유명한 메뉴는 바로 굴짬뽕. 이곳이 굴짬뽕이라는 음식을 처음 선보인 곳이라고 하는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나를 반성해 본다.         이건 그냥 짜장면.     여기서 목격담 하나 텀. 어떤 여자가 짜장면 하나 다 먹고 좀 있다 그 여자 아빠처럼 보이는 분이  오셔서  송이 짜장면 시키셨는데, 딸이 그거 또 먹더라...ㅋㅋㅋ 좀 보기 그렇던데... 왜 저러고 사나 몰라ㅋㅋㅋㅋ       죄송합니다 아빠.     비록 전체적으로 서울에 서 가장 오래됐다는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맛은 진짜 담백하고 소박한  옛날 전통의 맛이었다.     옛날에는 졸업식이나 특별한 날에만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는데... 정말 그 아련했던 추억이 떠오르는 맛. 은 무슨 나 졸업식 날 소고기 먹음.     아 맛 표현하기 너무 어렵네... 솔직히 음식물 쓰레기 아닌 이상 다 맛있게 먹는데... [출처]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OOO -2부- | 작성자 20trend
서울시 도로원표

서울시 도로원표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7 조회수2735 작성일14.04.01
서울특별시 도로원표(道路元標)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연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광화문에 있는 코리아나 호텔에 대기중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대기하면서 지루하여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 보고 있던 중 이 이정표를 보았습니다.   도로원표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다가가 확인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도로의 시점은 서울 시청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도로의 원점이 시청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고 또한 그것도 이 표지판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사진기를 꺼내 촬영한 것입니다.   위치는 코리아나호텔과 동화면세점 중간, 파출소 앞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울시 도로원표입니다.                   도로 원표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이런 동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 방향으로 지역과의 거리가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말이죠.....     요즈음 독도 문제가 일본과 국제적으로 난리를 치고 있는 가운데 독도와 도쿄의 거리가 동시에 있는 동판을 보고 조금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너무 대조적인 감을 느껴 촬영했습니다.       우리들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촬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각 방향으로 외국 도시와의 거리도 함께 동판으로 만들어져 있더군요.     도로 원표에 대한 자료 정리입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는 도로의 기점(起點) ·종점(終點) 또는 경과지를 표시하는 것으로 도로법 제2조 제1항 4호에 도로의 부속물로 정해져 있고, 도로법시행령 제27조 및 도로법시행규칙 제16조에 설치와 관리에 관한 규정이 있다.     도로법시행규칙 제16조에 의하면 도로원표의 위치는 도청ㆍ시청ㆍ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 교통의 요충지, 역사적ㆍ문화적 중심지로 정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도로원표가 위치한 곳은 역사적으로도 도시의 중심, 교통의 중심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국 시·군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다만, 고속도로에서의 거리표시는 나들목(I.C)간 거리이므로 도로원표와 무관하다.   통상적으로 네거리중심점은 차도이므로 도로원표(조형물)를 설치할 수 없어 그 곳에는 도로노면과 같게 동판으로 도로원점(眞위치)임을 알리는 표식(진표)을 설치하여 관리하고, 인근에 조형물(이표)을 설치하여 도로원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의 도로원표(진표)는 세종로 네거리(세종로와 종로가 나누어지는 4거리 중심점, 교보빌딩 앞)에 있다.   이표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의 도로원표만은 도로법시행령 제27조 제2항의 규정으로 그 위치를 세종로광장의 중앙으로 정하였다. [출처] ■ 서울시 도로원표를 보다. (제 3의 인생) |작성자 정택열
한옥문화 혜화동주민센터

한옥문화 혜화동주민센터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7 조회수2803 작성일14.04.01
아름다운 절 성북동 길상사         벌써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지 4년이 되었네요     길상사는 서울에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나 삼청동 쪽으로 나가게 되면   맘 편히 자주 찾아가게 되는 사찰 중의 한 곳입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원래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이란 분으로부터 시주를 받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창건한 것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사연을 알고 난 뒤부턴 올 때마다 가슴 아프고 이 절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원래 이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몇 번씩이나 법정 스님을 찿아가 당시 시가로 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몇 번이나 고사하다가 마침내 1995년 대법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길상사 창건 법회 때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습니다.   그때 당시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는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답니다.        언젠가 그녀는 기부한 천억 원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천억 원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은 바로 천재 시인 백석이었고   그녀는 백석이 사랑했던 그녀 자야였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대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기생과의 만남을 못마땅히 여긴 백석의 부모로 인해   백석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이후로도 백석은 몇 번이나 김영한의 곁으로 돌아가다가   결국 같이 만주로 도망가자고 설득했지만 김영한이 이를 거절하고 혼자 만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의 이별이 얼마 후 남북이 분단되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될 줄은....       김영한은 육신의 옷을 벗기 하루 전 목욕재계 후 길상사에 와서 참배를 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49재 후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물들인 날 시와 사람을 사랑한 그녀는   하얀 눈이 되어 길상헌 뒤쪽 언덕 바지에 뿌려졌습니다.           주차장에서 길상사 정문으로 향하는 길   삼각산 길상사 입구 일주문   입구에 있는 조감도     길상사는 서울 시내에서 조용히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지요.       입구에서 안내판 작업을 다시 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많이 벗겨졌나 봅니다.     입구를 들어서서 오른 편에 보이는 설법전   극란전과 법종각   여기는 여느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없습니다.   예전 건물의 일부는 보수를 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그 당시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청 하나 없는 전각이 더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범종각   이곳에서 맑고 장엄한 종소리가 그녀의 소원대로 울려 퍼지겠죠     극락전     대웅전 대신 있는 곳으로 다른 절에서는 무량수전이라고도 불린다니 대웅전과 같은 개념인 듯합니다.     설법전을 거쳐 극락전으로 오르는 길       지장전과 도서관   2층은 지장전이고, 1층은 도서관입니다.     관세음보살상   길상 7층 보탑과 안내 표지판     여기 부처님의 사리도 봉안되어 있다니 역사가 짧은 사찰치고는 대단하지요.       200년이 넘은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     침묵의 집   여기는 누구나 들어가서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다음에는 우리도 아이들과 조용히 명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적묵당     사찰에서 필요한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랍니다. 연등도 여기서 제작한다는군요.     스님들의 처소     스님들의 처소인데,  능인당, 죽림당, 반야당 등 각 방마다 머무시는 스님에 따라 모두 이름이 있더군요.       길상선원     선원인데, 여기는 침묵의 집과는 달리 수련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개방된다고 합니다.       길상화 공덕비와 다리   길상화 보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덕비입니다.   길상사에서는 그녀의 유골이 뿌려진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공덕비를 만들어서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10월 07일마다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고 합니다.     길상헌   길상화 보살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처소입니다.   곳곳에 있는 안내 표지판     사찰 곳곳이 현대에 지은 사찰임에도 고찰을 느낄 수 있어 더 좋습니다.   법정 스님의 좋은 말씀들   여기는 법정 스님께서 생전 아끼시던 시나 하신 좋은 말씀들이 곳곳에 있어 글을 읽으며 마음이 편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효제   길상사 정문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어 한번 들러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가게가 크지는 않지만 오목조목 예쁘고 수작업을 한 작품들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어 구경할 만합니다.     부산에서 후배 부부가 놀러 왔을 때 여기를 꼭 가보고 싶어 해서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길상사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께서 만드신 곳이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사찰입니다.     다른 사찰에 비해 일반인 누구나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도 있어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또한 주변에 삼청각과 같은 유명한 식당이자 드라마 촬영장도 있으니  구경하시고,   삼청동에 내려와서 골목 구경도 하면서 산책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니 한번 가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bandipa님의블로그  |  반디아빠   http://blog.naver.com/bandipa/120208776161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에서 가장오래된 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작성자  |  미래유산
추천수3 조회수3282 작성일14.04.01
' 늦가을 이웃 동네 나들이 ~ 서울 방학동의 명소들 ' (방학동 은행나무, 양효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 묘역) ▲  방학동 은행나무                                         ▲  양효 안맹담 신도비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마지막 주말, 이웃 동네인 방학동(放鶴洞)으로 마실을 갔 다. 방학동은 내가 사는 도봉동과 더불어 도봉구(道峰區)를 이루는 동네의 하나로 북한산 과 맞닿은 방학동 서부(방학3동)에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 무를 비롯하여 속세(俗世)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소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우리집에 서 도보 30분 거리로 무척이나 가깝지만 이웃 동네임에도 지금까지 겨우 3~4번 밖에 가지 못했다. (그에 비해 북촌이나 성북동, 부암동은 1년에 몇 번씩이나 갔음...) 본글에서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학동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원당샘, 정의공주 부 부 묘역, 목서흠 묘역과 신도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연산군묘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830년 묵은 노거수, 가을이 이곳에 있었구나~~ 방학동 은행나무 (방학동 은행나무 2013년 3월 28일에 서울시 지방기념물 33호로 지정됨) - 서울시 보호수 10-1호 ▲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 방학동 은행나무의 자태 방학동 연산군묘 앞에는 도봉구(道峰區) 10대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학 동 은행나무가 만추(晩秋)의 절정을 즐기고 있다. 지나가던 가을도 흠뻑 반하여 오랫동안 머물 렀다 가는 이 나무는 황금 옷으로 화사하게 갈아입으며 늦가을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아무리 잘난 화가라 할지라도 그대로 흉내내지 못할 아름다운 은행잎들, 이제 가을이 꽤 깊어지고 겨울제국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실감케 해준다.  이 정도의 휼륭한 나무면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화양 리(華陽里) 느티나무처럼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텐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보호 수 등급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그저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이 나무의 나이는 무려 830살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런데 1990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안내문 에 800년이라 나와 있었는데, 2004년에 와보니 그새 30년이 더해서 830년이라 나왔다. 1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나무의 나이는 그 곱으로 더해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830년이라 나와있다. 정확한 나이까지는 헤아리기 어렵겠지만 대략 800년 이상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의 높이는 25m, 둘레 10.7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이다. 은 행나무는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으로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로지 그만이 알 뿐이나 너무 어렸을 적이라 누가 심었는지 기억 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 이곳은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땅이 되면서 그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며, 그 이후 그의 후손과 외손인 신씨 집안의 나무로 부족함이 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의정궁주(義貞宮主)와 연산군 가족의 장례까지 말없이 지켜봤을 것이며, 묘역에 늘 시원한 그늘 을 드리워 그들과 함께 한다. 예로부터 지역 사람들이 특별히 아끼고 신성시하던 나무로 나무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 이 생긴다고 한다. 실례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 큰 불이 나서 소방차를 동원해 간신히 불을 껐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주변은 밭과 논두렁이 널린 시골로 은행나무가 여기서는 단연 규모가 큰 존재였다. 허나 2000년 이후 주변에 빌라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나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말 독보적인 존재였는데, 이제는 인간들이 지어놓은 높다란 아파트의 위세 에 눌려 조금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또한 무분별한 주택 건설로 나무의 건강에 빨간 불까 지 켜지게 된다. 다행히 동네 주민들의 강력한 민원으로 나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아파트의 구조가 변경 되었으며, 주변을 정비하여 나무 주위로 은행잎이 마음 놓고 내려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경관을 배려하지 못한 인간들의 성냥갑 건축물들이 나무 동쪽과 남쪽을 막고 있고, 북쪽 에는 연산군묘가 있는 언덕까지 있어 그야말로 사방이 막힌 답답한 형태가 되버렸다. 정말 햇볕 이라도 제대로 받고 있는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은행나무의 아랫쪽에 둥글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은행잎이 마음 놓고 떨어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지를 가득 뒤덮은 은행잎에 귀를 기울이면 세월과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의 조용한 절규가 들려올 것만 같다. 지역 주민과 북한산 등산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그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마다하지 않으니 정말로 아낌없이 베푸는 소중한 나무이 다. 내가 제일 흠모하는 나무로 집 근처에 이런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는 것에 그저 고마울 따름 이다. 게다가 근래에 도봉산 둘레길이 앞을 지나가게 되면서 그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나무의 모습은 계절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변함이 없다. 단 달라진 것이 있 다면 나무의 주변 풍경들, 그리고 나무를 찾은 사람들의 모습 정도, 우리나라 은행나무의 지존 으로 일컬어지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은행나무도 시샘할 정도인 방학동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자태는 나그네의 마음을 충분히 빼앗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우쭐거려도 그 나무 앞에서는 일개 초라한 두발 동물에 불과하다.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장수(長壽)를 누리며 별탈없이 살아온 이유는 자연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 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도 이제 은행나무의 그런 철학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 겨울을 재촉 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들이 외마디 괴로운 소리를 지르며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쓸쓸 히 땅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은 땅에 떨어진 그들 이른바 낙엽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지 만, 귀를 접은 은행잎은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서히 땅속으로 흡수된다. 그렇게 겨울제국의 시 련을 준비하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한편으로 이제 곧 나이 1살을 먹는다는 우울감을 던져주기도 한다. ▲  은행나무에서 만난 알록달록 묘공(猫公) 그도 나무 구경을 하러 온 것일까? 나무 주변을 한참 어슬렁거리다가 몹내 지쳤는지 한쪽 구석에 쭈그려 앉아 낮잠을 청한다. * 연산군묘 남쪽에 자리한 원당천(원당샘) 원당천은 이곳에 있던 원당마을의 식수로 600년이 넘은 오래된 샘터이다. 예전에는 우중층한 모습으로 수질도 많이 악화된 상태였으나 2010년 이후 샘터를 깨끗하게 정비하고 수질도 개선하여 동네 약수터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 원당천 샘터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원당천 표석은 그대로이다. * 원당천 안내문 * 원당천 주변에 조성된 공원 - 이곳은 예전에 너른 채소밭이었음 원당천과 그 주변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공원으로 변신했다.     * 방학동 은행나무 -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2013년 서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예전에는 서울시보호수로 83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전해졌으나 지방기념물 지정시 나이를 다시 재보니 600여년 정도로 나왔다.     ♠  양효공 안맹담(良孝公 安孟聃),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0호 연산군묘로 들어가는 정의공주묘 버스정류장 북쪽에는 품위가 깃든 잘 정비된 묘역이 있다. 바 로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부부의 묘역이다. 묘역 주변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녹색 철책을 둘렀는데, 묘역 전체가 밖에서도 훤히 바라보이므로 굳이 울타리를 넘을 필요는 없다. 이곳에 누운 안맹담(1415~1462)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호는 덕수(德壽)이며, 1415년 가선대부 (嘉善大夫) 안망지(安望之)의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 세종의 2번째 딸이자 동갑내기인 정의공 주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1432년에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지고, 1450년에 연 창위(延昌尉)가 되었다. 1457년 수록대부(綏祿大夫)가 되고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그해 8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책봉되었으며 1462년 47세의 나이로 병사하니 세조(世祖)는 매형인 그에게 양효공(良孝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는 활을 잘 쏘았다고 하며, 음악과 서예에도 매우 능했다고 한다. 안맹담의 부인인 정의공주(1415~1477)는 세종의 2째 딸로 세조의 누님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 의 소생으로 훈민정음 프로젝트 때 큰 공을 세웠는데, 다음의 일화가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끝내지 못하여 왕자들에게 보내 풀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정의공주에게 풀라고 하니 공주가 바로 풀어서 보냈다는 것이 다. 이에 부왕은 크게 칭찬하고 노비 수백 명을 내렸다. 남편이 죽은 이후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했다. 이후에 뚜렷한 족적(族籍)은 없으며, 1477년 62세의 나이로 남편을 따랐다. 안맹담 부부의 묘역은 쌍분(雙墳)으로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을 각각 두었고, 문 인석(文人石) 2쌍을 무덤 앞에 벌려 세웠으며, 그 바로 밑에는 아들인 안상계의 묘를 두었다. 안상계(安桑鷄)는 호가 전은(田隱)으로 작은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을 일으키자 저자도(楮子島)에 은거했다. <저자도는 압구정동과 옥수동(玉水洞) 사이 한강에 떠 있던 섬이었으나 강남 개발로 폭파되어 사라짐> 그는 수양대군(세조)과 사이가 좋지 못해 그의 재위 시절에는 시와 술을 벗삼아 숨어 지냈으며, 성종 때는 수원부사와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을 지냈다. 그의 묘는 비석과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단촐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적 은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 신도비는 보통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묘의 동남쪽이 풍수지리적으로 신도(神道)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도비란 존재는 왕족과 고위 관리의 무덤에만 쓸 수 있었던 정말로 특권층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1466년에 세운 것으로 비신(碑身)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내용은 정인지(鄭麟趾)가 짓고 글씨는 안맹담의 4번 째 아들인 안빈세(安貧世)가 새겼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5m, 귀 부(龜趺)의 높이 약 1.6m, 길이 약 1.7m로, 비석을 등에 맨 거대한 거북이 고개를 앞으로 쑥 내 밀며 서쪽의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귀부는 시원스레 뻥 뚫린 콧구멍이 인상적이며,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은 약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머리 아랫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선이 새겨져 있고 땅바닥과 마주하는 양쪽 모퉁이 에는 거북의 발이 새겨져 있으나 축 늘어진 듯, 발과 다리가 몸에 너무 붙어버려 발가락의 일부 만 확인이 가능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육중한 그의 등껍데기에는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신 위에는 2마리의 이무 기가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새겨진 이수(?首)가 있다. 이수의 이무기는 여의주 를 우러러 보며 이렇게 외치는 듯 하다. "저건 내꺼야, 너는 건드리지 마라, 오직 나만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 그들의 표정은 그런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올랐다. 허나 저들은 죽었다 깨도 여의주를 차지하지 못한다. 그저 열심히 노려보며 신경전만 벌이다가 인생을 종치기 때문이다. 결국 여의주는 허공 에 떠 있는 허구일 뿐이다. 보주를 둘러싼 이무기들의 다투는 모습을 보니 오늘날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서로 아옹다옹 거리는 오늘날 인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성공의 자리에 오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 이들 모두 허공에 뜬 저 여의주와 같거늘.. 그저 티끌의 욕심도 없이 동글동글하게 살다 갔 으면 좋겠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 ♠  도봉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충정공 목서흠 묘 역(忠貞公 睦?欽 墓域) - 서울 지방기념물 27호 ▲  충정공 목서흠 묘 정의공주 부부 묘역에서 도봉산 둘레길로 인도하는 좌측 흙길로 들어서면 커다란 기와집이 나온 다. 그 집은 사천목씨(泗川睦氏)의 재실(齋室)로 그 재실로 들어가지 말고 그 우측에 넓은 공터 로 쭉 들어서면 재실 뒤쪽에 목서흠 신도비가 모습을 내민다. 그 신도비에서 왼쪽, 그러니까 북 쪽을 보면 묘들이 주렁주렁 자리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목서흠 일가의 묘역으로 묘역 제일 위 쪽에 목서흠의 묘가 묘역을 굽어보고 있다. 목서흠(睦?欽, 1571~1652)은 사천목씨로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貞 )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목첨(睦詹)의 아들로 1603년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 고, 1610년 알성시(謁聖試)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623년에 함경도선유어사(咸鏡道宣諭御史)가 되어 인조반정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살폈으며, 광 주목사(廣州牧使)와 좌승지(左承旨)로 승진,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인조를 호종했다. 그 이후 참찬관(參贊官), 우승지(右承旨), 한성부 좌우윤(左右尹)을 지내고 1642년 개성유수(開 城留守)로 있으면서 병자호란 뒷수습에 나섰다. 또한 상소를 올려 붕당(朋黨) 정치의 폐해를 지 적했다. 165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70세 이상의 관원만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 이 되었다. 그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청렴하기 그지 없던 인물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목서흠 묘역은 조선 중기 무덤양식이 잘 반영된 점이 인정되어 2009년 6월 신도비와 함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목서흠 묘역 외에도 방학동과 도봉동(道峰洞)의 도봉산 자락에는 조선 왕족/귀족들의 무덤이 엄청나게 많다.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명성이 나있기 때문이다. 목서 흠묘는 그중에 하나일 뿐이고, 그보다 더 괜찮은 묘역도 많은데 왜 이곳만 문화재로 지정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곳 묘역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목서흠묘는 그의 부인인 연일정씨와 같이 묻힌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의 크기는 조촐하다. 봉 분 앞에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로 작은 동자상(童子像) 1쌍 이 두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엽다. 무덤 좌우로 망주석이 1쌍 있을 뿐, 그 흔한 문인석도 없어 간소하기 그지 없다. ▲  400년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하는 목서흠 신도비 묘역 아래 재실 뒤쪽에는 목서흠의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그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명문장가 조경(趙絅)과 이정영(李正英), 조위명(趙威明)이 쓴 것으로 그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 한 비문이다. 앞에 나온 안맹담 신도비와 달리 귀부가 없고, 그냥 비석을 세우는 비좌(碑座)만 있다. 지붕도 현란한 조각의 이수 대신에 지붕돌로 조촐하게 마무리를 지어 청렴했던 그의 명성을 가늠케 해 주며, 비신 밑부분이 좀 검게 그을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상태도 양호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목서흠묘 (묘비와 상석, 동자상) ▲  목서흠묘에서 바라본 사천목씨 묘역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숲 너머로 방학동 신동아아파트가 보인다. ▲  목서흠의 선조인 목진공(睦進恭)의 묘 목서흠묘 아래쪽에는 그의 조상인 목진공의 묘가 있다. 그는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태종 때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참판(參判)울 지냈다. 1417년 부평부사(富平府使, 인천 부평)를 지낼 때 우희열(禹希烈)과 함께 들판을 개간하여 농업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 당시 부평(富平) 지역 의 논이 450결에서 1,000결로 크게 늘어났다. 목진공의 묘는 목서흠의 묘와 비슷하나. 동자석 대신 조그만 문인석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600 년 세월의 떼가 입혀진 문인석과 비석에서 무덤이기에 앞서 고색의 멋이 풍긴다. ▲  목림일(睦林一)의 묘 목서흠의 묘에서 우쪽 산길로 들어가면 목림일의 묘가 있다. 목림일은 목서흠의 아들로 그의 딸 은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李重煥)의 생모이다. 무덤의 구조는 앞의 2개의 묘와 비슷하며, 동자석이 없다. ▲  사천목씨 시조단소(始祖壇所) 목진공의 묘 왼쪽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비석 6개가 늘어선 공간 이 나오는데, 사천목씨 시조에게 제를 지내는 단소이다. 모두 근래에 만든 것으로 비석 앞에 길 쭉한 상석을 눕히고 문인석 1상과 망주석 1쌍, 장명등을 세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서 흠 묘역과 단소가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사천목씨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방학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가져온 곳  : 블로그 >도봉산고양이의 여행공간| 글쓴이  : 박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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