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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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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게시물 : 54건   |   페이지 1 /6
만리창터

만리창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4 작성일19.07.15
공물로 거두어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의 별창 만리창은 현재 용산구 효창동 199번지에 있었다. 갑오개혁 전까지도 효창동, 도원동 일대에 만리창(새창, 신창)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창계(契)라고 칭했다. 만리창은 선혜청의 별창고로서 본래 진휼(賑恤)을 실시하던 곳으로 해서(海西)와 호남을 구관(句管)하였다. 본래 설진(設賑)하던 곳이었던 것을 지금은 해서(海西)ㆍ호남(湖南)의 구관으로 하고, 혹은 만리창(萬里倉)이라 칭하였다. 만리현(萬里峴)에 있음. 고가 58문. 진청(賑廳) 35문 ○ 해서 3문 ○ 호남 20문. [네이버 지식백과] 만리창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창회정터

창회정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8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정자로 군사 훈련을 사열(査閱)하는 곳으로도 사용됨.    
수표터

수표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7 작성일19.07.15
조선조 세종때 한강의 수위(水位)를 재기 위해 제천정(濟川亭) 아래에 세웠던 수표터  
청파배다리터

청파배다리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12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 ? 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 터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청파 배다리는 청파와 원효로를 통하는 길목에 있는 만초천에 놓였던 돌다리이다.배다리를 지나는 큰 길을 ‘주교대로’라고 했다. 남대문에 걸려있던 숭례문이라는 현판이 임진왜란 때 없어져서 다른 사람의 글씨로 쓴 현판을 걸었지만 자꾸 떨어졌다. 광해군 때 청파 배다리가 있는 웅덩이에 이상한 기운이 비쳐서 그 웅덩이를 팠더니 양녕대군이 친히 쓴 숭례문의 현판이 나왔는데, 그 현판을 건 뒤로는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서계동은 서울역 뒤 쪽 일대에 위치한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배다리골로 불렸다. 그 이유는 이 근처에 청파 배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일정터

천일정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9 작성일19.07.15
조선 성종기 문신인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지은 정자 천일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있는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이란 구에서 취하여 지었다 한다. 천일정은 지금의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로, 고려시대 때에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때문에 천일정 주변으로 절터였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강화의 쑥돌로 된 양길이 2.1m와 1.8m, 깊이 0.8m의 큰 돌연못이 남아있었다. 천일정은 김국광에 의해 처음 지어진 이후,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후 두세 차례의 변천이 있은 후 한때는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일정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제천정터

제천정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5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정자 터로 한강가 절경지의 하나 한남당과 보광동 사이 아래 기슭에는 조선시대의 제천정이 있었다. 제천정 터전의 정자는 모두 나라의 소유였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 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고려 때부터 한강루, 한강정이라 불리우던 작은 정자로 조선 초에 중국 사신을 위해 주연(酒宴)을 베풀던 장소이기도 했는데 성종때 크게 고쳐 짓고 『제천정』라 하였다.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난하는 길에 이 정자를 태워 그 불빛으로 무사히 건넜다고 한다.  
새남터

새남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6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곳에 군사 훈련했던 연무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대하여 중한 죄를 지은 사람(國事犯)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새남터는 연무장이자, 군문이 있었던 까닭에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세조 2년, 1456년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올리려다 처형당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다.  
서빙고 터

서빙고 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6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얼음의 채취·보존·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두모포(豆毛浦)에 있던 동빙고와 더불어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의 용산구 서빙고동의 도선장(渡船場)이다. 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궁중에서 주로 종묘(宗廟) · 사직(社稷)의 제사에 이용되었다.    
한강진나루터

한강진나루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8 작성일19.07.15
조선시대 한남동과 신사동을 연결하던 나루터 한강진 나루터는 한남동과 사평나루(지금의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터이다. 일명 한강도, 사수도, 사리진도, 사평도라고 했다. 신라시대 이곳에서 큰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사평도라 하고 나룻배를 배치하여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중요한 나루터로서 송파, 노량과 더불어 삼진(三津)의 하나였다. 그 중 한강진 나루터는 왕래가 가장 빈번하고 큰 나루였다. 조선시대 한강진에는 10척의 나룻배가 있었는데 세종 때 삼전도(나중에 송파진)가 신설되면서 배 1척이 삼전도로 옮겨져 9척이 운행되었다. 연산군은 통행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이곳에 부교(배를 연달아 이어서 강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 일명 배다리)를 설치하였다. 조선후기 부교는 철거되고 다시 나룻배가 운행되었다. 하지만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사공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나룻배를 고칠 수 없게 되었다.이로 인해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물에 빠지거나 나룻배가 서로 충돌하는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한남대교가 설치되어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강진나루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독서당터

독서당터

작성자  |  라라랜드
추천수0 조회수9 작성일19.07.15
젊은 학자들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하던 독서당이 있던 곳 일명 호당(湖堂)이라고 하는데,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독서를 하게 한 것이 그 효시였다. 독서당은 성종 23년 용산 청암동에 있는 절을 수리하여 마련된 남호독서당이 첫 정식 장소였으며,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다가 중종 12년부터 두뭇개 동호당, 즉 동호독서당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 이후에는 한강별영에서 독서당의 명목이 이어지게 되었다. 독서당의 당원은 한 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또한 독서당은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내어 그 권위가 높았는데,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율곡 이이(李珥)도 이곳 독서당의 당원 중 한명이었다. 독서당은 숙종 35년에 이르러 폐지되면서 35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폐지된 후에는 부군당이 세워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서당 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문화재 기념표석들의 스토리텔링 개발),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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