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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 서울시우수한옥 평산재 및 평산재소장 문화재 (전 국회의원 이윤용씨 자택 태종대왕17대손)
작성자 : 평산재 추천수26 조회수336 작성일2020.12.09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71-10 문화재 소장품 의 안내말씀입니다     010-5383-1957 

조부님과 선친으로부터 소장하고 있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 청자, 백자 등 민속품(안경,지팡이,자수,가구)과 조선시대석물(문인석, 벅스, 솟대) 등 근현대물을  소개합니다. (하단 사진들)



아래는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류성룡교수님의 평산재 의견서 입니다.



평창동 471-10번지(평창 7길 9) 한옥에 대한 의견



종로구 통의동 133-1번지 1959년에 태종대왕 17대손이며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이윤용(李允鎔)씨와 홍형예 부부가 신축한 35평 한옥이 있었다. 대지 98평에는 50평 규모의 3층 양옥 건물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1978년 궁정동-내자동 도시계획으로 집이 철거되면서, 1977년 10월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현재의 대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손수 지은 35평 한옥을 옮기면서 확장하기로 하였다. 현재 대지 213평, 건평 1층60평 ,지하20평.

확장에 필요한 부재를 추가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에 있던 30평 건물의 한옥을 구입하였다. 해당 한옥은 오뚜기식품 대표가 살던 곳으로  한옥을 이전하고 증축하기로 계획한 이후에는 서울 시내에 위치한 유명 한옥들을 참고하기 위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민비 가옥, 연경당, 성북동 심상준 가옥, 용인 민속촌, 서세옥 씨 한옥, 세검정 대원군 별장 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였다. 이윤용씨는 당시 친분이 있었던 장인기(한양대 건축학과), 김동현(문화재관리국 보존관리 연구실장), 증명호(원강대학교 교수, 확인 필요), 윤효준교수 내외분(한양대학교 최교수, 조경 전공), 김정자(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등의 자문과 협조를 구하고 현재의 한옥 및 정자, 연못을 재건축하였다.

한옥 시공을 위한 대목일의 실무를 위하여 현장감독으로서 신경수 대목을 초빙하였는데 장인기 교수가 추천한 것이었다. 신 대목장의 지시를 받아 실질적인 대목일을 진행한 사람들은 김상배 목수, 장 목수 등이었다.



10여개월 공사 끝에 1978년 12월 20일 현재의 한옥이 완성되었다. 목재 외부에는 들기름칠을 3회에 걸쳐 실시했다. 그리고 1978년 12월 28일 이사가 완료되었다. 한편 수맥 권위자인 임응승 카톨릭 신부에게 부탁하여 지하수를 찾아 우물을 마련하였다.

집의 현판에는 남쪽산 기슭이라는 뜻으로 남강루라고 썼는데, 중국의 서예가인 사자심선생이 직접 써서 보내준 것이었다. 사자심 선생은 단국대학교 전락희 박사와 이화여자대학교 장공자 박사 덕분에 알게 된 사이였다. 한옥 뒤편 경사에 지은 정자는 평산정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주인인 이원용의 아호를 붙인 것이다.

이러한 집을 지은 내력에 대한 사실은 1978년 12월 30일 이원용과 신윤선이 글을 쓰고 기록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확인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1970년대의 남성 중심의 한옥애호가들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는 낡고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과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던 뿌리깊은 나무가 1976년 한창기(1936~1997)에 의해 발간되었던 때였다. 실제로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서세옥 한옥에서 대목 작업을 맡았던 배희안 대목장의 구술서인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를 1981년에 발간하기도 하였다. 서세옥 화가가 배희안 대목장과 작업한 연경당 닮은 성북동 한옥은 한옥 애호가들 사이에서 성지로 자리 잡는 시기였다. 따라서 연경당, 서세옥 화가 한옥 등과 함께 장안의 유명 한옥을 스터디하고 그것의 장점을 바탕으로 남자 주인의 개성적 취향을 반영하는 한옥 건축 가운에 평창동 한옥도 포함되는 것이다.



평산재 도면


서세옥씨 한옥이 당시 경향을 주도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옛 재목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오래된 옛 재목으로 집을 지을 경우, 변형이 적다는 장점에 주목했던 것이다. 평창동 한옥은 선대에 지었던 한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경향에 따르는데 유리했다. 확장을 위해 필요한 건축 자재 역시 도시개발 붐으로 멸실될 운명의 한옥 한 채를 매수해서 옛 재목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편복도형과 중복도형을 조합한 한옥 평면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정면 대청을 바라보고 오른편 한옥은 현관이 있는 편복도형 평면으로 되었고 왼편 한옥은 가운데에 통로를 구성한 중북도형의 평면이다. 생활의 편리함을 충분히 고려한 결과였다.

이처럼 한옥의 기능적 측면에 주목한 모습은 대문과 가까이에 돌출한 현관에서도 볼 수 있다. 현관 안쪽으로 1간에는 ㄱ자 단을 설치해서 신발수납장으로 사용하고 편복도를 통해 사랑채 남자주인의 별도 공간을 길게 마련하였다.

4간 대청에서는 목수일의 대목이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는데 적극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대청은 앞쪽으로 설치한 복도와 뒤쪽으로 설치한 복도가 만나는 공간이 되도록 함으로써 동선이 건물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집의 구조를 대칭으로 설치하고 있다.

이렇게 뒤쪽으로 설치한 복도를 통해서 진입하게 되면 안채의 중앙을 분리하는 복도로 이어진다. 중앙 복도는 안채의 안방 공간과 주방 및 식당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시켜주고 있다.

중앙에 설치된 복도는 전면 끝에서 부출입구가 되는데, 이는 안채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높여주는 효과를 만들어주고 있다.

부출입구 인접하여 마당을 면한 공간에는 집주인의 사색 활동에 이용되었을 법한 잘생긴 누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마당을 안쪽에 둔 ㄷ자의 큰 규모 한옥을 6치 기둥으로 구성한 것은 옛 재목의 한옥을 옮겨온 때문이다.

한옥이 입지한 뒤편 경사에는 과감한 화계와 산정 사랑이 입지해 있는데, 이 역시 남성 취향의 한옥애호가의 경관에 대한 접근 방식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상의 모든 건축적 사실은 원래 있던 한옥을 이전하면서 옛 목재를 기본으로 삼고 새롭고 변화된 생활에 적합한 계획을 반영하여 이를 기술자인 대목과 소통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 남성 한옥애호가들의 취향과 시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이에 서울의 미래유산으로 지정하여 그 가치를 다음 세대에 알리는데 적극 이용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류성룡



이하 소장 문화재입니다.

 

고려청자, 조선시대 청화백자 등





조선 백자주병, 백자합, 사발.







신라시대토기







조선 청화, 청채주병 등







지팡이 (금,은,상아,거북뼈 등), 안경(금,은,상아,거북뼈), 빗, 기타 민속품.







옹기 및 질, 토기 항아리 기타 등







조선 해주 청화 대항아리







조선 장승 및 12지상 및 다수석물 등







조선 18세기 벅스 및 문인석 등 기타석물







세종대왕, 의친왕, 추사 김정희 헌판 다수







한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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