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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제안 미래유산

한빛교회
작성자 : 나비석호 추천수1 조회수696 작성일2017.11.22
1955년 2월 20일 문재린 목사님이 창립하셨습니다.

한빛교회는 1955년 2월 셋째 주일 6.25로 폐허가 된 강산의 아픔을 보면서, 문재린 목사님의 인도로 서울 중구 필동에서 25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중앙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재린 목사님이 대구에 있는 성경학교 교장으로 이임하면서, 1956년 2월 12일 한신대 교수로 있던 아들 문익환 목사님이 담임하시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아직 자체 건물이 없어서 남의 건물을 빌려 예배를 드리면서 10여 차례 이상 이사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교회와 통합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빛교회라는 명칭은 교인들이 투표로 정하였습니다.

한빛이라는 교회이름은 1965년 5월 16일 동부교회와 2년 6개월 만에 분리하면서 교인들이 투표로 정하였습니다. 큰 빛, 오직 한줄기 빛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랍니다. 지금은 한국에 한빛교회라는 이름이 참 많이 있지만, 당시로써는 원조가 되는 셈입니다. 그 뒤 1960년대 말, 한국의 신?구교가 펼친 공동성서번역사업에 문익환 목사님이 적극 참여하시면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자 후임으로 이해동 목사님이 1970년 3월에 부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1971년 7월에 현 한빛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강북구 미아9동 136-118번지를 매입하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당시로써는 몇 년 동안 임시로 사용하리라 생각하면서 서둘러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여느 교회와 다를 바 없던 한빛교회는 그러나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서사건’, 소위 ‘3.1 명동사건’을 만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빛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던 문익환 목사님과 이우정 집사님, 그리고 담임목사인 이해동 목사님이 구속되었고, 명동사건과 관계된 가족들이 매주일 한빛교회에 모이면서 집중적으로 감시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고난의 길은 유신독재가 끝나기까지, 그리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군사정권이 퇴진하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때로는 담임목사와 장로, 전도사와 청년회장이 함께 구속되는 일도 있었고, 경찰이 교인으로 위장 등록하여 몰래 활동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 법정에서 받은 선고량을 합하면, 징역 200년에 가까운 형량이었습니다. 세계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역사의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은총으로 여긴 세월이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고난을 겪지만, 온 겨레가 얼싸안고 춤추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기도한 세월이었습니다. 깨어진 세계의 평화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와 민주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의 의로운 뜻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하여 미약하나마 온 몸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쁨으로 견디어 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4년 8월말, 유원규 목사님이 부임해왔습니다. 새로 교인이 찾아오면 반기고 기뻐하기 보다는 혹, 감시하러 온 사람은 아닐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던 교인들의 표정도 많이 밝아졌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하셨습니다.

그러나 한빛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에는 아직도 미흡했던 모양입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님의 그 역사적인 방북사건은 한빛교회와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긍정적 지지도 있었지만, 많은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역사 속에서 짊어져야 할 우리의 마땅한 짐이라 여기면서 분단의 현실을 치유하고 평화 통일을 향한 길에 매진하였습니다.

한빛교회는 오직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아프고 굶주린 자들을 위하겠다는 그리스도의 말씀(눅4:18~19)에 따라 이웃과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온 한빛교회는 60년대에는 이승만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 당시 어린이부 부장이었던 김창필 집사님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순국하셨고,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민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습니다. 특별히, 한빛교회는 1975년 민주화 운동으로 해직당한 문동환,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교수를 비롯한 해직교수, 해직 기자,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세운 갈릴리 교회의 예배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한빛교회와 동거를 시작한 갈릴리 교회는 훗날 민중신학의 태동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녘 동포들과 금기시하던 비전향장기수들을 돕고, 남북의 평화통일과 화해와 협력을 위한 실천과 사회연대활동에 적극 동참하여왔습니다. 또 한빛교회는 문익환 목사님의 기념사업회인 통일맞이가 수여하는 ‘늦봄 통일상’의 상금을 매년 담당하고 있으며, 해마다 여러 차례의 통일 세미나를 통해 통일을 준비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유리에 4,455㎡의 부지를 구입하여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꿈을 꾸면서 영성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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