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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권력의 캔버스' 남산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0 1839 2016.11.28 약3시간
코스 경로
1.남산육교 고가차도 - 2.회현 제2시범아파트 - 3.옛 어린이회관 - 4.조선신궁터 - 5.한양공원 비 - 6.노기산사 유구 및 남산모자원 강당 - 7.옛 안기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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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산육교 고가차도미래유산
주소 중구 남창동 235-1
숭례문에서 남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한 육교 겸 고가차도를 지나게 됩니다. 길이 42.6미터에 폭 26.6미터 정도로 그다지 크다고는 볼 수 없지만, 서울에서 가장 이른 시기 즉 지난 1961년 말에 들어선 고가차도 중 하나로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이 길이 지나는 위치에는 원래 한양도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한양도성이 있어야 할 곳에 육교 겸 고가차도가 놓여진셈이죠.
물론 그것이 한국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남산육교 고가차도 자리를 지나는 지금의 소월길이 뚫렸는데, 그때 이미한양도성은 도로에 길을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는 입장에서는남산육교 고가차도 덕에 숭례문에서 남산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한양도성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도로에 깔려 혹은 도로 때문에 철거된 한양도성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산육교 정면
2
회현 제2시범아파트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8길 101
남산육교 고가차도에서 남산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도로가 양쪽으로 갈라집니다. 오른쪽이 소월길, 왼쪽이 소파길입니다. 갈림길에서 소파길을 따라 약 4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왼쪽으로 허름한 아파트가 보입니다. 바로 회현제2시범아파트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주거 형태를 들라면 누가 뭐라 해도 아파트일 테지만, 지난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꽤 생소한 생활공간이었습니다. 집 위에 또 집이 있는 구조가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엉덩이가 번갈아 닿을 수밖에 없는 양변기를 공유해야 하는 아파트는 전에 없이 ‘불경스러운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가 고작 10분의 1 정도만 분양됐던 이유입니다.
사정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불도저 시장’이라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대량의 ‘시민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급증하는 서울 인구를 소화하기 위해 산비탈마다 아파트를 지어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속도전에 치우진 나머지 질이 형편 없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1970년 신촌로터리 근처의 와우산 중턱에 있던 와우아파트가 풀썩 주저 앉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시민아파트 건설사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던 해에 남산 북서쪽 사면에 들어선 ‘회현 제2시범아파트’는 시민아파트가 아니라 명실공히 ‘시범아파트’였습니다. 김 시장이 “앞으로는 이 아파트를 본 받아 튼튼히 지으라”며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탓입니다. 내부시설도 획기적이었습니다. 중앙집중난방을 택해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졌으며 집집마다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연탄을 땠고 층마다 공동화장실을 두었던 기존의 아파트들과는 사뭇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당시 가장 큰 혁신은 ‘튼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하기 편리한 데다 튼튼하고, 지금의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KBS도 있어 은방울자매나 윤수일, 문호장 씨 등과 같은 연예인들도 많이 살았던 회현 제2시범아파트… 적절한 보상이나 이주대책이 세워지지 않아 아직까지 주민들이 살고는 있지만 이 아파트도 머지 않아 영영 사라질 지 모릅니다. 지난 2006년 안전검사에서 위험등급으로 판정됐기 때문입니다. 요즘엔 그저 행복의 잣대나 재산 증식 수단 정도로 여겨지는 아파트라지만 회현 제2시범아파트만은 우리의 오래지 않은 과거를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3
옛 어린이회관
주소 서울 중구 소파로 46
회현제2시범아파트에서 맞은편 남산 쪽으로 높다란 흰색 빌딩이 보입니다. 지난 1969년 5월 5일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7월 25일 개관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회관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이끌던 육영재단이 어린이들에게 정규과정에서는 접하기 힘든 ‘과학지식의 보급, 건전한 민족정신의 함양과 고취, 청소년의 복지 증진과 정서 순화’ 등을 위해 지은 시설입니다.
그래서인지 건물 꼭대기에는 천문대처럼 둥근 돔이 얹혀 있고, 미국 정부가 달착륙선 모형을 기증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을 둘러싼 논란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일단 어린이들이 스스로 찾아오기에는 대중교통과의 연결도 좋지 않고 산 중턱에 있어 전시행정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건물 꼭대기의 돔은 건물 완공 이래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습니다. 철큰-콘크리트 구조로 만든, 모양만 천문대 돔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어린이 복지 증진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권력자들의 의지와 욕망 이면에는 변변한 정규 교육은커녕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각혈까지 해가며 노동하는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린이회관이 능동 어린이공원 내로 이전해간 뒤인 1975년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용되었고, 1988년부터는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2016년 현재는교육연구정보원에서 운영하는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 등이 더 들어서 있는 상태입니다.
4
조선신궁터
주소
지난 2014년 남산식물원이 있던 터에서 서울 한양도성발굴조사를 하던 중에한 구조물이 발견됐습니다.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20여 년 동안 그곳에 있던조선신궁의 흔적이었습니다.
신궁은일본 고유의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인 신사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은 것인데, 19세기 후반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신도가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강력한 중앙집권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민간신앙 차원의 신도를 ‘국가 차원의 종교’로 재정립하면서,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신도에는‘천황은 신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라는 신화적 규약이 존재했기에, 조선에 일본 특유의 천황제를 이식하고동조동근, 내선일체를 주입하는 데 제격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제는‘면(面) 단위 마을마다 신사를 둔다’는 '1면 1신사' 원칙을 고수했는데,지난 1916년 17개에 불과했던 신사가해방 당시 전국에 걸쳐 천4백여 개로 늘어나는 등 급속한 팽창을 거듭했습니다.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이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이었습니다.
조선신궁은 지난 1925년지금의 힐튼호텔에서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는 남산 중턱까지여의도의 두 배에 가까운 대지 위에 들어섰습니다.일본 천황가의 시조로서우리네 단군과 같은 존재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유신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이끈 메이지천황 등 두 명을 제신으로 삼았는데,비슷한 시기에 지은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중심축에서 약 5.6도 기울게 해서일부러 조선신궁을 마주보게 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태평양전쟁 완수를 기원하는 제의 등군국주의적 행사들이 자주 치러졌습니다. 동시에 조선인들의 참배도 강요해1928년에만 해도 11만6천여 명이었던 것이1936년에 들어서는 34만여 명으로참배자가 급증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사 참배만을 강요했던 것도 아닙니다.사람들은집집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두고매일 아침저녁 절을 해야 했고,학교에서는 천황의 사진을 넣은 봉안전을 세우고황궁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조선신궁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서울성곽 복원공사 도중 발견된 탑의 기단부나현재 돌계단으로 재활용되고 있는 화강석들,그리고 옛 남산 어린이 놀이터와 백범광장, 그리고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 등 조선신궁 당시에 조성된 넓은 터들이남아 있는 것들의 거의 전부입니다.해방 직후일본인들이자진해서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이 일대에 대한서울성곽 복원공사가 완료될 예정입니다.부디 이번에 발굴된 조선신궁의 흔적들도 남겨서지나간 신사참배와 식민의 역사를 잊지 않게 하는버팀목이 되게끔 하는건 어떨까 싶은 생각입니다
5
한양공원 비미래유산
주소 중구 회현동1가 산 1-16
조선신궁 터에서 다시 소파길로 나와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비가 한 기 서있습니다. 지난 2002년 발견된 ‘한양공원’ 비입니다.
일본인들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한반도로 건너오는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앞서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서구에서 도입한 근대식 공원을 조선에서도 만들게 되는데,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 직전에 만든 한양공원입니다.
특이한 점은 비에 새겨진 “漢陽公園”이란 넉 자의 한자가 고종의 친필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 비 자체는 191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망한 왕조의 도시명이 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동시에 비 뒷면의 글씨들은 하나 같이 날카로운 정으로 쪼아 읽을 수 없는 상태여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보통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운 이유와 사람이나 조직의 명단을새겨두는데,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이 비 그리고 한양공원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요? 산 사면에 쓰러져 있던 것을 지난 2002년에야 발견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한양공원비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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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산사 유구 및 남산모자원 강당미래유산
주소 중구 예장동 8-6
한양공원비를 지나 소파길을 따라 명동 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다 보면 숭의여자대학교와 노란 교복으로 유명한 리라초등학교에 닿게 됩니다. 노기신사 유구와 서울미래유산인 남산 모자원 강당은 바로 그 사잇길을 올라가면 도착하는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안에 남아 있습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세계 육지전투 사상 가장 치열했다던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인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군신(軍神)으로 삼아 기리던 신사입니다. 즉 일본 제국주의의 기억이 남아 있는 부정적인 의미의 역사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화재로 사라지거나 건물 신축을 위해 철거한 나머지 당시 건물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신사 참배시 손을 씻고 들어갈 수 있도록 했던 수조와 석등 받침 등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거꾸로 뒤집혀진 채 땅 속에 박혀 있던 지름 1미터짜리 석등과 그것을 중심으로 사방을 빙 둘러가며박아둔 석재들입니다. 마치 야외용 탁자와 의자로 이용되는 듯했습니다. 일반적인 한국인들이라면 기억하기 싫은 역사의 흔적이겠으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도잘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장면입니다. 즉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식민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역설적 교훈의 장이 바로 노기신사 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함께 들어서 있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전쟁 중에군인이나 경찰관이 숨진 뒤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최기석 초대원장이 세운 시설인데,지난 1959년 세운 강당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즉 한국전쟁 중 순국한 군경유자녀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아동보육시설로서 보존 가치가 있어 현재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상태입니다.
남산원 본관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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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 청사미래유산
주소 중구 예장동 산 4-5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서울의 남산처럼 도시 중앙에 산을 두고 있는 수도는 극히 드뭅니다. 애초 남쪽 경계였던 것이 도시 확장과 함께 한가운데 위치하고 만 것인데, 인간의 손도 그만큼 더 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남산의 스토리들’은 생각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든지 산책이나 조깅을 하기에 맞춤한 순환로가 있다든지, 요즘의 남산은 그저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으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사실 남산은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참혹했던 인권유린의 현장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1995년까지만 해도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고기 육’자를 써서 ‘육국(肉局)’으로까지 불린 안기부, 즉 국가안전기획부가 있던 곳이 바로 남산입니다.
지난 2006년 문을 연 서울유스호스텔을 비롯해 ‘문학의 집 서울’, 옛 TBS 교통방송, 서울소방재난본부 등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뒤쪽에 위치한 건물 대부분은 안기부 사무동과 취조실, 안기부장 관사 등으로 쓰였습니다. 서울종합방재센터 재난종합상황실로 쓰이고 있는 지하 벙커에서는 모진 고문과 감금이 이뤄졌습니다. 안쪽에 자리 잡은 옛 서울시청 별관은 유독 악랄한 고문이 행해졌던 곳입니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음습하고 공포스러운 취조실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안기부 본관을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기 직전, 그 역사성을 고려해 인권기념관이나 민주화운동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제안이 잇따랐지만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두 가지 위대함, 즉 ‘산업화’와 ‘민주화’ 가운데 산업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이나 역사 유산들은 여럿이지만, 오랜 군사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온 민주화운동 기념시설은 여전히 변변치 않은 실정입니다.
서울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닙니다. 영욕이 점철된 이 땅의 현대사를 서울 한복판에서 증언해주고 있는 거대한 현장 박물관과도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옛 안기부 본관을 인권기념관이나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제안들이 다시 나오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과거 서슬퍼렇던 남산이 인권의 보루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요? 그 여부는 곧 한국인들의 인권 감수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일단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사실 자체도 큰 진일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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