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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광희동에서 장충동까지, 한양도성 따라 만나는 지난 100년
1 1398 2016.10.06 약 3시간
코스 경로
1.광희문 - 2.한양도성 신당동-장충동 구간 - 3.자유센터(한국자유총연맹) - 4.옛 타워호텔(반얀트리 클럽 스파 서울) - 5.국립극장 - 6.장충테니스장 - 7.장충리틀야구장 - 8.장충체육관 - 9.박문사 터와 장충단 - 10.장충동 족발골목
1
광희문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 344
한양도성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창과 함께 수도 방어 및 내부 통제 등을 위해 쌓아올린 성곽으로서 총길이가 약 18.6킬로미터, 높이는 5~8미터에 달합니다. 특히 현존하는 전세계의 도성 가운데 가장 오랫 동안, 즉 1396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514년 동안이나 도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왔습니다.
성은 북쪽의 백악(북악산)에서부터 동쪽의 낙타(낙산), 남쪽의 목멱(남산), 서쪽의 인왕을 거쳐 다시 백악으로, 이른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요, 산과 산 사이에 숭례문과 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 등 4개의 대문을 두었었고, 대문과 대문 사이에는 역시 4개의 소문을 설치해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그 중 오늘 코스의 시작점인 광희문은 원래 태조 5년(1396) 한양도성을 쌓을 때 함께 세웠던 소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당시의 것이 그대로 이어져온 것은 아닙니다. 일제 때 문루가 헐린 이후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대 중반 도로를 확장하며 지금의 위치로, 즉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5미터 정도 옮기면서 문루를 다시 지어 올린 것입니다. 한양도성의 성문 가운데 일제가 헐어버리거나 위치를 바꾼 것이 적지 않은데 광희문만은 해방 뒤 한국인의 손으로 위치를 옮긴 문입니다.
광희문의 또다른 명칭으로 ‘수구문’과 ‘시구문’이 있습니다. 수구문은 남산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이곳 근처로 흘러 나갔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광희문은 십여 차례 언급되는 데 반해 수구문은 70여 건이나 발견됩니다. 또 시구문은 평상 시 도성 안에서 사망한 이의 시신을 성 밖으로 빼 매장할 때 이용한 문이라 해서 붙은 별칭인데, 아예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나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문 주변으로 시신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또한 광희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문이기도 하며,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허가된 문이기도 합니다. 문의 규모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서려있는 역사는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2
한양도성 신당동-장충동 구간
주소
다만 한양도성의 긴 성벽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철거되었으며, 해방 뒤에도 오랜 기간 한양도성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탓에 변변한 대접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의 장충동과 신당동의 경계 부분을 걸으며 만나는 한양도성이 바로 그러합니다. 1930년대 들어 이 일대에 이른바 ‘문화주택’ 단지를 만들면서 적잖이 훼손되었고, 해방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호로20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주택이나 공장의 축대나 벽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양도성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왕복9차선의 동호로를 건너 동호로17길 골목에 들어서면서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택의 주택으로도, 공장의 담장으로도 이용되지 않는 온전한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慶山始面(경산시면)”이나 “興海始面(흥해시면)”이라 새겨진 성돌을 만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경북 경산 지방의 사람들이 쌓기 시작한 부분과 지금의 포항시 흥해읍 사람들이 쌓기 시작한 부분을 가리킵니다.
태조 때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에는 경복궁 건설공사에 동원된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사람들과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던 압록강 및 두만강 지역 이외 지역의 장정 11만8천여 명을 동원해 모두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건설했는데 각 구간의 시작점에 이처럼 지역명을 새겨두었습니다. 조선 중후기 들어서는 날짜를 비롯해서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등 더욱 상세한 기록을 새기는데, 요즘으로 치면 공사실명제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자유센터(한국자유총연맹)
주소 서울 중구 장충단로 72
이 길을 따라 계속 남산자락을 오르다 보면 이내 반얀트리 클럽스파 서울 호텔과 남산 제이그랜하우스에 닿게 됩니다. 애초 명칭이 ‘타워호텔’과 ‘자유센터’였던 건물들입니다. 이 두 건물은 지난 1950~60년대의 남북 대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먼저 자유센터는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주도해 만든 아시아민족반공연맹 한국지부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공 지도자를 기르고, 반공 게릴라 요원을 양성하며, 정보 교환 및 선전 활동의 전개 등 반공 활동의 중추신경적 역할을 맡아 한다'는 목적을 띠고 창설된 이 단체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인 1963년 들어 한국반공연맹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12월에는 이 기구의 사무실 겸 반공 교육장, 전시관 등으로 쓰기 위해 자유센터를 지었습니다.
설계자는 ‘한국 현대건축의 풍운아’라고도 일컬어지는 고 김수근 씨였습니다. 건물 탄생의 배경과 용도가 그러해서인지 외관에서도 군사문화의 색채가 뭍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향을 하고 있는 건물의 정면에 늘어선 12개의 기둥과 그 위의 거대한 콘크리트 처마는 마치 장병들의 군홧발과 북쪽을 향해 전진하는 전함의 뱃머리를 닮아 자유와 반공의 의지를 건축적 요소로 끌여들였다는 평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은 오랜 기간 반공을 위한 여러 국제 행사를 비롯하여 서울 시내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일승공학교’ 등 반공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4
옛 타워호텔(반얀트리 클럽 스파 서울)
주소 서울 중구 장충단로 60
한편 자유센터와 함께 한국전쟁 참전국인 17개국의 희생을 기려 17층으로 지으려 했던 반공연맹의 연수원 겸 숙소는 함께 완공되지 못했고 결국 1969년 들어 타워호텔로 개관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리모델링을 거쳐 반얀트리 클럽스파 서울로 바뀌었습니다.
근대 건축의 대가 르 코르뷔지에가 시도한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김수근에 의해 국내에 처음으로 시도된 건물인 자유센터와 역시 김수근의 작품인 타워호텔은 그러나 한계도 안고 있습니다. 자유센터의 정면 우측 축대를 유심히 살펴 보면 경북 경주 사람들이 쌓기 시작한 지점을 알리기 위해 놓았던 ‘慶州始面(경주시면)’이란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지금은 문화재로서 보호하기 위해 노력 중인 한양도성을 400미터 가까이나 허물어 자유센터의 축대로 이용한 흔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97개 구간을 천자문에 따라 구분한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 성돌과 “劍字六百尺(검자육백척)” 성돌도 축대로 이용되고 있는 등 전통과 현대의 부조화가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냅니다.
5
국립극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장충동2가 산 14-67
이번 도보 코스에서 처음 만나는 서울미래유산, 바로 국립극장입니다. 국립극장의 역사는 서울시청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부민관’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선 건물인데, 해방 뒤인 1950년부터 국립극장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개관 두 달만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피난과 함께 국립극장 지위를 ‘대구문화회관’에 물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쟁은 멈췄지만 국립극장은 부민관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환도한 국회가 한발 앞서 부민관을 차지하면서 어쩔 수 없이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 입주해야 했습니다. 현재 명동예술극장으로 쓰이고 있는 그 건물입니다.
남산에 국립극장을 세우자는 계획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박정희정권 들어서였습니다. 당시 정권은 이른바 ‘민족’과 ‘전통문화’를 유독 강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민족문화센터’와 ‘국악사(國樂士) 양성소’ 건립 등이었고, 그 터로 낙점한 곳이 바로 지금의 남산 국립극장 자리였습니다.
설계를 맡은 이는 이희태란 인물이었습니다. 1973년 완공된 남산 국립극장은 경복궁 경회루를 모티프로 삼아 설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기둥 끝에 십자형 날개를 달아 자칫 육중해 보일 수 있는 기둥에 상승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애당초 외벽에는 화강석을 붙이려고 했지만 공사비가 부족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건 노출된 콘크리트 벽면을 일일이 정으로 쪼아 오돌도톨한 자연 화강석 느낌을 나게 함으로써 해결했습니다. 화강석 가격보다 인건비가 싼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외관은 노후해져갔고 대형 공연을 하기에 내부 공간이 협소하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결국 완공 30년만인 지난 2003년, 리노베이션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이때 설계를 맡은 것은 고 이희태 선생이 설립했던 설계사무소였습니다. 선학이 세우고 후학이 고쳐짓게 된 셈인데, 선학인 이희태 선생이 경회루를 재해석해 국립극장을 지었다면 후학들은 그 국립극장을 다시 재해석해 한층 산뜻하며 보다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1973년 첫 완공 당시의 권위적인 모습을 일신했다는 점입니다. 당시만 해도 군사정권의 권위주의가 만만치 않았고, 비슷한 시기에 북한 평양에 짓고 있던 인민문화궁전과 만수대예술극장을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단과 계단을 유독 높게 설계하고 14개나 되는 기둥을 건물 외부에 5미터 간격으로 곧추 세우는 방식으로 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둥 사이의 수직벽을 투명한 유리로 교체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색채를 빼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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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테니스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장충동2가 산14-63
장충테니스장의 정식 명칭은 장충 장호테니스장입니다. ‘장호’는 대한제분 회장 및 조흥화학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대한테니스협회장을 두 차례 역임한 고 종문 회장의 아호인데, ‘한국 테니스의 대부’라 불리는 그는 대한테니스협회가 정작 변변한 테니스장 하나 보유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 지난 1971년 사재 1천5백만 원을 쾌척해 서울시유지 1만여 제곱미터에 8면의 클레이코트와 1면의 센터코트(하드)를 만들어 서울시에 기부체납한 인물입니다.
장충테니스장은 완공 직후 열린 제4회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데이비스컵 예선전 등 각종 국제대회는 물론, 대통령영부인배쟁탈 전국여자테니스대회와 전한국테니스선수권대회, 2016년 기준 60년째를 맞은 장호배 주니어테니스대회 등 각종 대회를 치러내며 한국 테니스의 산실 역할을 해온 테니스장입니다. 그런 역사에 걸맞게 그 동안 이곳을 거쳐간 선수도 한국 프로테니스 1호 선수인 이덕희를 비롯하여 한국 남자테니스의 산증인 이형택 등 화려합니다.
지난 2002년 9개 면 중 7개 면이 하드코트로 교체된 장충테니스장은 지금도 ‘프로 테니스 아카데미’가 운영되는 등 한국 테니스의 고향 역할을 현재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충테니스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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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리틀야구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장충동2가 산 7-22
한국 최초의 유소년 전용 야구장인 장충리틀야구장은 장충테니스장과 같은 해인 지난 1971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한국 야구의 부흥과 어린이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 설립된 곳으로 한국 유소년 야구의 성지이자 메카 역할을 해온 곳입니다.
실제로 개장 이래 매이저리거인 박찬호 선수를 비롯하여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야구사를 새로 쓰게 한 이승엽 선수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배출한 한국 야구의 살아있는 젖줄입니다. 그런 면에서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 2009 세계야구클래식(WBC) 준우승의 성과가 장충리틀야구장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물론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동대문야구장처럼 철거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난 1990년대에는 도심 소음이 많은 데다 화장실과 락커룸 등이 열악하고 주차공간마저 부족하다는 이유로, 2010년대 들어서는 남산의 녹지를 늘린다는 이유로 헐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야구사에 있어 장충리틀야구장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어 지난 2007년 리모델링을 통해 국제규격에 맞는 어린이 야구장으로 탈바꿈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승엽 선수가 “야구를 시작하고 처음 전국대회 4강을 치른 곳”이자 김태균 선수가 “난생 처음 제대로 된 야구시설에서 경기하면서 꿈을 펼쳤던 곳”이라고 했던 장충리틀야구장…. 한국 야구사를 빛낸 많은 선수들이 야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워온 곳이자 지금도 많은 어린이들 야구 선수들이 꿈을 키워가고 있는 곳, 바로 서울미래유산인 장충리틀야구장입니다.
장충리틀야구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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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미래유산
주소 중구 장충동2가 200-102
오랜 기간 ‘필리핀이 가난한 한국에 지어준 선물’이라는 소문에 시달려온 건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지요. 1955년 들어선 육군체육관을 1959년 서울시가 맡아 수리한 뒤 1963년 장충체육관으로 개관한 이 건물은 사실 한국 최초의 건축설계사무소인 ‘종합건축연구소’를 설립했던 고 김정수 씨의 설계와 삼부토건의 시공으로 지어졌습니다. 엄연히 한국 기술력으로 지어올린 건물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YMCA나 평양 숭실전문학교 등에 실내 코트가 있었다고는 전해지지만 해방 뒤 명실상부 최초의 ‘돔’ 경기장으로서 건립된 장충체육관에서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영웅들이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과 당수치기로 황소를 때려눕힌 천규덕 등의 프로레슬러들이 거구의 서구 선수들이나 일본 선수들을 거꾸러 뜨릴 때면 국민들은 반 세기 동안 억눌렸던 한까지 함께 풀려 나가듯 열광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16주년인 1966년 6월 25일, 프로복서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언을 따내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에는 경기를 관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챔피언 벨트를 감아줄 정도였습니다. 프로레슬링이나 복싱 외에 농구대잔치와 민속씨름이 출범한 곳이자 대통령배 배구대회가 시작된 곳이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태권도와 유도 경기가 열렸던 장소로서 장충체육관은 한국 스포츠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까지 1960~70년대 장충체육관에서는 그야말로 다채로운 행사들이 연이었습니다. 정치 집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 2천359명의 대의원 가운데 단 2표만 무효이고 나머지 전부가 찬성표를 던져 박정희가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된 곳도 바로 장충체육관이었습니니다. 언론과 국민의 입을 틀어막은 독재정권은 그 뒤 12대 대통령 선거 때까지 장장 16년 동안 5번의 ‘체육관 선거’를 치렀는데 그 중 4번의 선거가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됐습니다. 8천 명이나 들어갈 수 있고 지붕도 있어 투표를 은밀하게 진행할 수 있는 구조였기에 간택된 걸로 보입니다.
역사성을 고려하여 철거 대신 지난 2012년부터 약 2년 반 동안 오랜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리모델링을 하면서 기존 돔을 아예 없애 버린 것이 아니라 체육관 외부에 전시를 하고 새로운 구조물 사이로 옛 구조물을 일부러 노출시킴으로서 장충체육관의 역사성을 살린 결정은,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 짓는 데 유독 능한 우리 사회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배려입니다.
장충체육관 전경1
9
박문사 터와 장충단
주소 서울 중구 동호로 249
장충체육관을 마주 보고 섰을 때 오른쪽 안쪽으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대문이 인상적입니다. 지금 현재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이는 문으로서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본따 지은 문입니다.
애당초 신라호텔이 자리한 곳은 현재 작은 공원으로 쪼그라들어버린 장충단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 때 순국한 조선 군인들의 죽음을 기리는 제단이었으나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본은 장충단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작게 축소시켜 버린 뒤 1932년 이등박문, 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사찰을 짓습니다. 이름하여 박문사. 조선 왕실에 대한 신하와 백성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공간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이끈 인물을 기리는 공간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상징의 전복을 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그냥 새 건물을 지어 박문사를 조성한 것이 아니라 흥화문을 비롯한 조선 궁궐의 건물을 헐어다 재활용했으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석고각을 헐어와 종각 등으로 이용했습니다. 즉 조선왕조를 공간적으로 지탱해온 건축물들을 일본제국을 위한 시설물로 이용함으로써 조선인들로 하여금 패배주의에 젖게 하고 나아가 떠오르는 나라인 일본의 통치에 순응할 것을 유도한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신라호텔 정문은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이 아닙니다. 1980년대 후반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경희궁을 재건축하면서 다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신라호텔 정문은 흥화문을 다시 떼어가는 대신 똑같은 디자인으로 세워준 문입니다. 박문사의 본 모습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하지만 신라호텔 정문 안쪽의 돌계단은 박문사 당시의 그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박문사 본전이 있던 터에 자리한 신라호텔 영빈관 왼쪽 암벽에는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인지“民族中興(민족중흥)”이란 네 글자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져 있습니다.
10
장충동 족발골목미래유산
주소 중구 장충동1가 62-10 일대
그러고 보면 이유 없는 입지(立地)는 별로 없습니다. 음식점 하나를 차리는 데에도 상권 분석이나 유동인구 파악 등을 하지 않습니까.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 북쪽으로 자리한 장충동 족발골목…. 언뜻 우연하게 자리한 식당 골목 같지만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일제 때 문화주택 단지가 있던 장충동은 필지가 큰 탓에 해방 이후에도 이른바 부잣집 동네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전쟁을 계기로 월남한 실향민 중에는 이왕이면 구매력이 있는 이들이 사는 장충동 일대에서 가게나 식당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또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던 장충체육관은 식당업을 하기에 더 없이 훌륭한 입지였습니다. 장충동 족발골목은 그러한 배경에서 1960년대 초부터 본격 형성되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대의 식당들이 처음부터 족발만 파는 식당으로 문을 연 것은 아니었습니다. 빈대떡에 탁주 따위를 주메뉴로 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실향민들이 돼지 부산물로 저렴하게 거래되던 족발 부위를 왜간장으로 삶고 조려 안주화한 것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중국식 오향장육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음식사의 대부분이 그렇듯 무엇이 원조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80년대 들어 족발 씨장, 즉 족발을 여러 번 반복해 삶아 진득해진 간장으로서 족발 요리에 핵심적인 재료를 훔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반복되고, 서로 원조집 경쟁을 하는 통에 시조집에 일대조집이란 간판을 내건 식당들까지 생겨나는 등 어느새 족발은 한국 음식문화사의 일부분을 확실하게 점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장충동 족발골목 원조장충동할머니집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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