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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서울 중심도로의 기억과 보전, 남대문로와 태평로 일대
1 2596 2017.01.18 약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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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광장 및 강우규 의사 동상미래유산
주소 중구 봉래동2가 122-28
서울역광장을 지날 때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동상을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강우규 의사의 동상입니다. 강 의사는 지난 1919년 9월초 옛 서울역 광장에서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인물입니다.
비록 사이토 총독의 목숨까지 빼앗지는 못했지만 당시 강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본 경찰관을 포함하여 37명을 폭사시키거나 다치게 하는 등의 성과만이 아니라 당시 강 의사의 나이가 64세였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항일 의거는 주로 혈기왕성한 20~30대 청년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환갑을 넘긴 노투사도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19세기말 일제가 경인선을 놓은 이후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기능해온 옛 서울역과 서울역광장은 늘 치열한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강 의사의 의거 6개월 전인 3·1운동 때에는 이곳에서 출발한 열차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그 소식을 실어 날랐고, 해방 때에는 기쁨에 겨운 수많은 조선인들이 태극기를 휘날렸습니다.
해방 뒤에도 서울역과 서울역광장의 가치는 이어졌습니다. 지난 1960~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젊은이들이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는 창구였고, 동시에 이들을 위해 곡식이며 온갖 먹거리를 싸들고 상경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맞이하던 곳이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87년 6월항쟁을 기억하는 이들은 서울역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10만여 대학생과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을 떠올릴 것입니다.
1993년말에는 쌀 개방에 반대하는 대단위 집회가, 1994년에는 ‘12.12 군사반란자 기소를 위해 군사반란재판회부와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이행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궐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KTX서울역이 문을 열면서 ‘중심’에서는 다소 멀어진 듯한 것도 사실이지만 사이토 조선총독 저격 사건, 서울의 봄, 6월 항쟁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 현장이자, ‘민족 대이동’이라 표현되는 귀성귀경길의 중심지로서 서울시민을 너머 한국인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서울역광장… 그 동안은 우뚝 서 눈에 잘 보이는 서울역의 가치에만 주로 집중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사건 현장으로서의 공간에 주목해 서울역광장이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서울역광장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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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태평로1가 31
서울광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두고 현재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옛 서울시청사, 즉 원래 일제 때의 경성부청사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광장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서울광장은 제26대 조선 왕인 고종이 대한제국을 개창할 때 황제의 거처인 경운궁(덕수궁)을 국가 통치의 중점으로 삼고자 조성한 광장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광장은 늘 한반도 역사의 중심 역할을, 특히 민의가 표출되는 공간으로서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난 1919년 탑골공원에서 첫 독립선언서가 선포됨과 동시에 이 광장도 독립만세시위의 중심 현장으로 떠올랐으며, 해방 뒤에는 이승만 독재를 꺼꾸러뜨린 1960년의 4.19민주혁명, 박정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 움직임에 반대해 일어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전두환 독재에 저항해 일어난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 시발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습니다.
근래에도 장소의 역사성을 이어져 왔습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즉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당시 대대적인 집회가 열리기 시작한 곳도, 2008년 이명박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집회의 시작점도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나 돈과 사람이 몰리는 테헤란로 또는 강남대로 등이 아닌 서울광장이었습니다. 구한말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민의 표출의 장으로서의 역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정치 집회만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서울광장에서 ‘붉은 악마’들의 거리응원이 시작되며 지금까지도 국가적 차원의 다양한 행사가 치러지는 축제장으로 기능해오고 있는 곳이 서울광장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시청사 앞에 위치한 상징성과 더불어 시민들이 각종 행사 및 시위 등을 통해 민의를 표출했던 대표적인 장소로서의 서울광장…. 서울미래유산 등재를 통해 그 역사성을 더욱 오래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서울광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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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극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정동 3-1
옛 부민관에서 덕구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영국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쯤에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세실극장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 4대 주교였던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에서 이름을 따론 세실극장은 지난 1976년 개관 당시 지하 1층 지상 4층 구조로 320석의 객석을 갖춰 소극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으며, 사실상 한국 연극계의 메카 역할을 해온 곳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977년부터 80년까지 국내 창작극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연극제’가 시작된 곳이 바로 세실극장이었습니다.
IMF 때는 재정난으로 1년 정도 문을 닫기도 했었지만, ‘점프’나 ‘비밥’ 등 논버벌 퍼포먼스 공연은 물론 전인권이나 최백호, 정태춘 박은옥, 안치환, 강산에 등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장으로도 이용되며 주요한 공연장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세실극장은 건축적인 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넓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채꼴의 공간 구성으로 관객의 시야 확보가 용이해 배우와 관객의 친밀도가 높은 극장인데요, 이는 한국 1세대 건축가로서 지난 1950~1970년대 우리나라의 건축 설계 능력을 크게 확장한 고 김중업의 설계 덕분입니다.
부가적으로 세실극장 지하에 있던 세실레스토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실레스토랑은 지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해외에 본부를 둔 영국성공회성당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터라 군사정권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민주화운동가들이 모여 시국 상황과 관련한 논의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선언문 낭독을 비롯하여 각종 시국선언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자회견 장소로 이용되면서 ‘기자회견 전용 레스토랑’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다만 지난 2009년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세실레스토랑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세실극장 정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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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민관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125
서울시청 근처를 지나실 때 시청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서있는 흰색 건물을 유심히 살펴본 적 있으신가요? 지금은 ‘서울시의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7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근 25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는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각종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비롯해, “인심을 혼란케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일본의 전시 형법을 참고한 내용을 추가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된 현장입니다. 또 5?16 군사쿠데타 때에는 국회 간판을 떼고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차려졌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한일협정 비준 파동과 3선 개헌 파동, 그리고 국가보위법 파동 등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물 앞 화단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표석 때문입니다. 거기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애당초 이 건물은 지난 1935년 일제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과 같은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만 사실상 이곳에선 각종 친일 정치집회도 잇따라 열렸습니다.
세 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며 노동운동 등을 하던 조문기 등 3명의 10대 청년들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의거 가운데 하나를 결행한 겁니다.
당시는 해방을 채 안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지지부진해 보이기도 했던 독립운동이 해방의 그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작은 표석 하나 뿐입니다. 건물만 하더라도 지난 1980년 태평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대부분 헐렸고, 1985년 제3별관을 헌 뒤에는 지금처럼 목욕탕 굴뚝같은 첨탑과 성냥갑 같은 어색한 건물만 남게 됐습니다.
3명의 청년들도 결국엔 하나둘 스러져 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랜 삶을 산 조문기 선생만 하더라도 평생을 일제잔재 청산운동에 주력하다가 지난 2008년 향년 81로 생을 마쳤습니다.
근처를 지날 때면 한 번이라도 더 뒤틀린 역사와 그걸 바로 잡기 위해 목숨바친 이들의 역사를 되새겨 보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옛 부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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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원표(칭경기념비전 내)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세종로 142-3
세종로광장 동쪽에 교보빌딩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혹시 그 앞에 서있는 오래된 건물 한 채를 유심히 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로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전’이라 불리는 건물입니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그 건물이 아니라 그 건물 한쪽에 숨겨져 있는 한 작은 돌 조각입니다.
기념비전의 정문인 만세문을 정면으로 보고 섰을 때, 만세문 뒤 오른쪽 구석에 가로세로 길이가 채 1미터가 안 되는 돌 조각이 앉아 있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평양과 대전, 목포, 대구, 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가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에 만든 ‘도로원표’입니다.
도로원표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 지배의 ‘지리적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때까지만 해도 거리 기준점은 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었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해 도로원표로 알 수 있듯 지금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세종로 네거리 한가운데로 바뀌었고, 1935년 도로 확장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일본의 도량형을 따라 ‘10리는 4킬로미터’로 확실히 굳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일제가 만든 기준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좌우하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삼정권 시절이던 지난 1997년 말, 일제가 만든 도로원표를 대체한다며 세종로파출소 앞에 큼지막한 새 도로원표를 세우기는 했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지리적 기준점이나 셈법만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승만정권 때 반일 감정을 이유로 표준자오선을 ‘동경 127.5도’로 바꿨던 7년여를 빼면, 대한민국은 여태껏 1912년 일제에 의해 정해진 일본의 표준자오선, 즉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계적 시간과 태양의 실제 위치 사이에 30분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입니다.
우리 사회는 1990년대 말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서구를 따라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낙후한 제도를 정비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뒤따랐지만, 정작 해방된 지 70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시공간의 기준’은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도로원표(칭경기념비전 내)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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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이순신 동상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
도로원표에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세종대로 한복판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지난 1968년 높이 6.5미터, 폭 3미터 규모로 10.5미터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장엄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일제에 의해 변형된 세종로의 중심축을 바로 잡고 수도 서울의 기를 바로잡으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상은 단순한 공공 예술작품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애초 국민적인 위인인 이순신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국가 중심도로라는 세종로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근본적으로는 당시 정치현실을 떼어놓고 볼 수 없습니다.
박정희정권은 태생적으로 크게 두 가지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데서 오는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 본인을 비롯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친일부역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데서 오는 민족적 정통성의 문제…
그러한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1968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출범시켜 이순신이나 김유신 등 외국 군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군인이나 영웅적인 군인들의 동상을 만드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침으로써, ‘적화통일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권력’으로서의 군사정권의 당위성을 설파하려 했습니다. 앞서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1965의 한일협정 비준 반대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박정희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에 대응하려 구상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균열을 비롯한 이런저런 훼손 부분을 정비하기 위해 지난 2010년 보수작업을 실시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상 자체는 아무 말이 없지만 그 안에는 복잡다단했던 한국 현대사의 장면들이 오롯이 녹아 있습니다.
세종로 이순신 동상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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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세종로 81-3
서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직접이든 텔레비전에서든 최소한 한 번쯤 보았을 건물 가운데 ‘세종문화회관’이 있습니다. 지난 1978년 건립된 세종문화회관은 기념비적 건물을 지으라는 박정희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건데요, 국가 중심도로라고 할 수 있는 세종로 한 복판의 입지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 한옥에서 차용한 구조가 여느 건물들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마치 한옥의 안채와 별채처럼 두 건물을 짓고 그것들을 이어주는 회랑을 만든 겁니다. 줄지어선 육중한 돌기둥에 두꺼운 추녀, 완자문양을 한 벽장식 등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루어내려는 듯 다채롭습니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은 하마터면 지금보다도 더 거대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들어설 뻔한 건물이기도 합니다. 건립 당시 청와대에서 최소한 5천 명이 들어가는 대회의실을 갖춰야 하며 기와지붕을 얹고 서까래도 내도록 요구해온 건데요, 그건 누가 봐도 앞서 지어진 북한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이나 만수대극장을 의식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문화회관 건축을 맡은 건축가가 ‘그것은 평양의 특징일 뿐 우리는 우리대로 만들어갈 문화가 있다’며 거절한 나머지 지금의 선에서 일단락되었습니다.
건축가는 ‘건축은 시대의 상징이자 변이이다. 건축기술이 발달해서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우리 정서가 들어가는 전통을 살릴 수 있다. 그것만은 건축가에게 맡겨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칫 규모에만 집중했을 경우에는 덩치만 큰 관제 건축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 건축가는 바로 지난 1일 향년 93으로 타계한 엄덕문 선생입니다.
한국 현대 건축가 1세대인 엄덕문은 지난 1962년 완공한 국내 첫 대단위단지인 마포아파트 설계자이기도 한데요, 그 외에도 서울의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 리틀엔젤스 예술학교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간 작품들입니다.
대형 공공 건축물을 지을 때는 건물주인 관청과 건축가가 대립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정치적인 목적과 건물의 용도, 그리고 건축물이 지니는 상징과 의미 등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인데요, 최근 들어서고 있는 공공 건축물의 수준은 과연 어떠한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세종문화회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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