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모바일 메뉴

서울미래유산서울미래유산

I.SEOUL.U
전체메뉴닫기

주메뉴

 
 
체험코스 제안하기
  •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시민제안 미래유산
  • 북한산 초등학교
    북한산 초등학교
  • 서울중요문형문화재전수회관
    서울중요문형문화재전수회관
  • 도산공원
    도산공원
미래유산 아카이브
  • 동대문 종합시장
    동대문 종합시장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서울극장
    서울극장

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성북동에 숨어 있는 문화유산과 역사인물의 흔적
0 1658 2017.01.18 약4시간
코스 경로
1.최순우옛집 - 2.간송미술관 - 3.수연산방 - 4.만해한용운심우장 - 5.북정마을과 한양도성 - 6.삼청각 - 7.길상사(구 대원각)

※ 오른쪽 화살표 버튼을 클릭하여, 각 코스를 확인해주세요.

이전코스 다음코스
1
최순우옛집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15길 9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낡은 콘크리트 건물들 뿐만이 아닙니다. 오래된 한옥마저도 재개발 바람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힘을 모으면 때로 역사에 남을 결과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이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2000년대 초 이 일대에 다세대주택 건립 붐이 일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나선 겁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 1895년 영국에서 로버트 헌터와 옥타비아 힐 등이 만든 단체입니다. 아직 덜 알려져 있지만 지켜야할 문화유산이나 자연유산을 사들인 뒤 그에 대한 보존 운동과 교육 사업 등을 하는 단체입니다. 비슷한 운동이 한국에서도 시작된 겁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최순우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집을 매입한 것은 지난 2002년, 옛집이 헐려나가는 걸 막기 위해 시민모금을 통해 약 10억 원을 확보한 뒤 최순우 옛집을 사들인 겁니다. 그 뒤 애초의 시멘트 블록을 걷어내고 마사토를 까는 등 전통 한옥의 정신을 되살려 일반에 공개해 오고 있습니다. 언필칭 '국민문화유산 제1호'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한옥들 가운데 굳이 왜 이 집이었을까요? 바로 전통 한옥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데다 최순우 선생이 살았던 집이라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난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안목으로 그 아름다움을 찾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 개성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는 등 1984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박물관인으로 산 한국 박물관학의 개척자이자, 한국의 미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한 미술사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그였기 때문일까요? 이 단아한 한옥은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그의 지론에 꼭 어울릴 법한 '자연스러움'을 자랑합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는 집은 집대로 보존을 하면서도 전통 한옥이나 생활 양식에 대한 강좌는 물론 전국의 전통마을 답사 프로그램 등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한옥에만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오롯이 계승 발전해 나가기 위해 펼쳐나가는 문화와 역사를 대하는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최순우 옛집에 적혀 있는 글귀입니다. '문을 걸어 잠그니 이곳이 바로 깊은 산 속과 같다'는 뜻입니다. 오늘 걸을 길의 시작점은 도시 안에서도 청량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 최순우 옛집입니다.
2
간송미술관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 102-11
매년 5월과 10월, 1년에 단 두 차례만 문을 여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그곳입니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여느 미술관과 비교해도 그 가치가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풍악내산총람’과 단원 김홍도 및 혜원 신윤복 등의 진경풍속화 등 국보 12점과 보물 10점을 비롯해, 모두 5천여 점에 달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귀중한 문화재들은 한 사나이가 없었다면 해외로 반출됐거나 6.25 때 영영 산화되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나이는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입니다. 간송은 ‘문화의 독립운동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06년 10만 석 지기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미술작품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생애 내내 사재를 털어 선조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는 데 온 정성을 바쳐온 인물입니다.
그가 그토록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린 것은 당시 고서화와 골동품의 상당수가 일본으로 반출되고 있는 걸 안타까워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는 수천여 기의 고분들을 도굴해 그 안의 문화재들이 약탈됐고, 수천 점에 달하는 고려청자와 백자, 회화들이 일본으로 반출됐습니다. 그걸 보다 못한 간송은 당시 서울의 8칸짜리 기와집 14채를 살 수 있는 가격에 청화백자를 구입했는가 하면, 11채 가격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현재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는데요, 지난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이 책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글 창제 원리에 대해 알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간송이 이 책을 구입함으로써 비로소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가 상당히 과학적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 겁니다.
간송은 그저 문화재들을 모으는 데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난 1938년 서울 성북동에 현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만들고, 본격적인 연구를 가능케 했습니다.
잔혹한 식민 지배를 당한 이 땅에서 추사 김정희나 겸재 정선 등 대가들의 작품과 문화재들은 당연하게 남겨진 게 결코 아닙니다. 간송미술관에 들른다면 미술작품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문화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존재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3
수연산방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
간송미술관에서 다시 성북초등학교 앞 삼거리로 나와 우회전을 해 340여 미터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성북다문화빌리지센터가 나오는데, 바로 그 왼쪽에 소담한 한옥이 한 채 보입니다. <왕자 호동>과 <황진이>, <해방전후>등의 소설을 쓴 상허 이태준 선생의 가옥입니다.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상허는 1925년 <오몽녀>를 발표하며 등단했는데요, 이후 잡지 <개벽>을 비롯해 <조선중앙일보>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향수>를 쓴 정지용과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효석, 그리고 <천변풍경>과 <소설가 구보 씨의 1일>등을 쓴 박태원 등과 함께 1933년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부터는 문장미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여럿 쏟아냈습니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아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1930년대에 <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할 때 시인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해 <오감도>가 세상에 나오게도 했습니다.
상허 이태준은 당시의 적잖은 문인들과 달리 ‘친일부역’과 관련한 논쟁이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좌파 문학에 집중했고 1946년경에는 월북까지 하면서, 납북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오랜 기간 한국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상허 이태준 선생이 월북 전 살던 고택이 지난 1900년대 초중반에 지어진 별장형 주택으로 보이나 살림집으로 축소된 것 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의 개량 한옥이 갖는 요소들을 잘 지니고 있어 서울시 민속문화재로도 등재되어 있는데요, 지난 1999년부터는 상허의 외종손녀가 이 집에 이태준이 지은 당호였던 ‘壽硯山房(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으로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답사하면서 한 번 들려볼 만합니다.
4
만해한용운심우장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수연산방에서 나와 북악스카이웨이 방향으로 2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왼쪽으로 쌈지공원이 하나 보이는데 한 가운데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왼쪽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130미터 정도만 올라가면 심우장에 닿습니다.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옥호는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집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3년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짓고 살았던 고택으로서 1944년 그가 열반에 든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집은 특이하게 당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북향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은 터가 남쪽에 높은 한양도성을 두고 자리잡은 북향이기에 북향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는 하나, 남향으로 하면 조선총독부 방향을 보게 되기에 북향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33인의 민족대표 대부분이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변절했지만 만해만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는데, 바로 그와 같은, 열반에 드는 그날까지 꿋꿋이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만해의 의지가 강했기에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물론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부 파괴가 되기도 했고, 또 안에 있던 만해의 유고가 상당 부분 분실되기도 했지만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쓴 ‘尋牛莊(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방에는 만해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회의하는 모습,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찍힌 사진 등도 관람객을 맞고 있습니다. 건물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그 모습은 깊고 융숭한 만해의 모습을 닮은 듯합니다.
5
북정마을과 한양도성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32-3
심우장에서 나와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만나는 동네는 북정마을입니다. 한양도성을 마주하고 있는 동네지요.
걷기 열풍이 어느덧 서울에까지 불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지난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던 서울 한양도성길이 새로운 도보여행 코스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총길이가 약 18.6킬로미터나 되어 규모면에서 여느 올레길이나 둘레길이 뒤지지 않는데, 특히 전체 구간 가운데 12킬로미터 정도는 성벽과 나란히 걸을 수 있어 역사와 자연을 만끽하며 걷기에 제격입니다.
한양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96년경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하면서 고심 끝에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 도성을 쌓도록 했는데, 전란을 겪으며 파괴되기도 했지만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던 한양도성이 대대적으로 파괴된 것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일본 황태자의 한양 방문을 전후해 숭례문 옆의 성벽이 헐려 나갔고, 전차길을 낸다는 이유로 흥인지문의 성벽이 철거되었습니다. 사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은 일제 때 헐린 뒤 여태 빈 자리로 남아 있으며, 사소문에 해당하는 혜화문과 광희문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아 도로 확장과 함께 원래의 위치에서 빗겨난 곳에 서있습니다.
걷기 열풍과 함께 한양도성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모양입니다. 인왕산 정상 부근의 성벽이 최근 다시 세워졌고,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벽도 복원되었습니다. 남은 구간의 성벽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작업해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 도로 때문에 성벽을 잇기가 여의치 않은 숭례문과 혜화문 그리고 돈의문 터 근처는 일단 성벽이 지나는 자리의 보도블록 색깔을 달리하는 식으로 성벽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 만큼 유서 깊은 수도로서 도성의 대부분이 남아 있는 서울…. 비록 그 동안은 외세에 의해 철거되거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낮은 나머지 스스로 파괴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서울 한양도성 복원 작업을 계기로 그러한 세태에도 조금씩 변화가 오길 기대해 봅니다. 또 그러한 한양도성과 함께 살아가는 북정마을을 돌아보며 역사책 속의 한양도성을 넘어 생활 속의 한양도성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는 계기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6
삼청각미래유산
주소 성북구 성북동 330-115
한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밤에 이뤄지고, 정치는 요정에서 이뤄진다.’ 북정마을에서 내려와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삼청터널 못미처에 삼청각이 나옵니다. 삼청각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다른 요정들과 달리 군사독재정권 당시 남북 간의 적십자회담을 앞두고 북한 방문단을 접대하기 위해 1972년 계획적으로 조성한 공간입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요정들에 비해 출발이 늦었음에도 위세나 규모가 남달랐습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대연회장이 있어 준공과 동시에 남북적십자회담 만찬장으로 쓰였고, 주요 정치인들의 밀실 협상 장소로 이용되는 등 삼청각은 주요한 정치 행사와 협상의 장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른바 ‘요정 정치의 산실’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시인 고은은 <만인보 제11권>에 실은 ‘요정 종업원 임도빈’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70년대 성북동 대연각이라 우이동 삼청각이라 / 아니 코밑의 청진동 장원이라 / 거기 가면 / 온통 번드르르르 / 아리따운 연인의 치맛자락 방바닥을 쓸어가며 / 교자상 가득히 / 산해진미 / 점심때라면 밥도 은수저로 떠 넣어주고 / 그렇게 밥 먹고 나면 / 야들야들한 손으로 / 등때기 굳은 살 풀어주고 / 슬슬 졸음 오는 척하면 / 뒷방으로 모셔가 / 그 침침한 방 요 위에 눕혀져 / 졸음은커녕 / 난데없는 운우의 정이 쏟아지니 / 정아무개가 뒹군 방 / 아무개가 뻗은 방 / 박아무개 / 김아무개가 늘어진 방 / 이렇게 점심때 / 대낮 주색 마치니 / 퇴근 후에는 / 영락없는 모범 공직자 아니었던가 / 그것으로도 모자라지만”
고은의 고발처럼 당시 고위 공직자나 기업인들 중에는 요정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에 비례해 요정 숫자도 늘어났습니다. 1996년 1월 28일자 <일요신문>에 따르면 1970년대 서울의 요정이 비밀 요정을 포함해 100곳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북한산 3각’이라 불린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이 가장 유명했고, 특히 삼청각이 정치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중앙정보부는 요정에서 오가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미인들의 숲, 이른바 ‘미림(美林)’팀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요정의 영화는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요정보다 다소 저렴하면서 더욱 비밀스러운, 그리고 산 자락이 아닌 유흥가 안에 룸살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요정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삼청각의 경우에도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변경하고 일반음식점으로 바뀌었습니다만, 1999년 말 아예 문을 닿게 됩니다.
삼청각 입구
7
길상사(구 대원각)미래유산
주소 성북구 성북동 323
삼청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정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대원각이 바로 그곳인데요, 다만 삼청각이 예전의 삼청각이 아니듯 대원각도 지금은 예전의 대원각이 아닙니다. 아예 간판마저 바꿔 달았습니다. 길상사(吉祥寺)라고 말이죠. 네, 요정이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에 딸린 사찰로 바뀐 겁니다.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32년 16살의 나이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 ‘진향’이 된 김영한 씨가 1951년경 ‘청암장’이라 불리던 별장을 매입해서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요정으로 운영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삼청각, 청운각 등과 함께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는데요, 1980년대 중반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 씨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한 겁니다. 법정 스님은 10년 가까이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뜻을 받아들여 1995년 ‘대법사’란 이름의 사찰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1997년 김영한 씨의 법명인 ‘길상화’에 기반해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대원각이 사찰로 변한 것은 그 자체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습니다. 애초 김영한 씨는 일제강점기의 시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는데,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녀 스스로도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백석이 해방 뒤 고향인 북으로 가게 되었고, 그런 백석을 그리워하던 김영한은 시가 1천억 원 정도로 추정되던 대원각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게 됩니다.
길상사는 종교 간 화합을 위한 시도가 엿보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1997년 12월 14일에 열린 길상사 개원 법회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법정 스님과 함께 축사를 했고, 법정 스님은 화답의 의미로 이듬해 2월 24일 명동성당을 찾아 설법을 했습니다. 또 길상사 경내에는 관음보살 석상이 한 기 있는데,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 씨가 조각한 것으로 흡사 성모 마리아상을 닮았습니다.
김영한 씨는 지난 1999년 길상사에서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는데 길상사 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배기에 그녀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역시 길상사에서 열반한 법정 스님의 저서와 유품을 모신 진영각과 유골을 모신 뒤 세운 작은 부도가 경내 가장 안쪽에 남아 있습니다.
길상사(구 대원각) 정문
0
탑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