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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서울 최고의 한옥 동네 북촌
1 1872 2017.01.18 약3시간
코스 경로
1.경복궁 - 2.기기국번사창 - 3.북촌 한옥밀집지역 - 4.계동 48-12 건물군 - 5.춘곡 고희동 가옥 - 6.공간건축 - 7.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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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복궁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이라고 하면 보통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설된 고색창연한 공간이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여행을 하든 답사를 하든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런 면에서 경복궁이야말로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경복궁을 세세하게 들여다 보면 건물들 가운데 조선시대 때 지은 것이 사실 많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해방 뒤에 지은 것들입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이나 임금이 업무를 보던 사정전, 임금과 신하가 만나 연회를 즐기던 경회루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렇습니다. 실제로 가장 최근에 지은 건물이 2015년에 완공한 소주방 권역입니다. 소주방 권역은 경복궁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수라를 만들던 내소주방, 궁중 잔치와 고사 음식을 차리던 외소주방, 임금의 별식을 준비하던 생물방 등으로 이뤄져있습니다.
그럼 원래 건물들은 어떻게 됐었냐고요? 일단 경복궁의 대략적인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요,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면서 상당 부분이 훼손됐습니다. 서애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에 따르면 선조가 몽진을 떠나자 성난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경복궁은 그렇게 1592년경에 불에 탄 뒤 1868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짓기까지 자그마치 270여 년 동안 거의 폐허에 가깝게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또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이 맺어지면서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는데요, 이후 경복궁도 파괴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1915년에 경복궁에서 큰 행사가 열렸는데, 이름하여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였습니다. 일제가 시정(始政), 즉 통치를 시작한 지 5년이 된 것을 기념해 그 동안 조선의 물산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행사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엑스포 비슷한 겁니다. 그런데 이 행사 때 전시장을 만든다면서 건물들을 헐어버렸던 건데, 조선물산공진회 이후에도 조선박람회다, 산업박람회다 하면서 줄잡아 대여섯 차례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습니다.
경복궁은 단순한 궁궐이 아닙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조선의 역사가 보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가 보이기도 하며, 해방 뒤 문화재를 대하던 한국인들의 시각이 읽혀지기도 합니다. 면적도 넓고 깊이도 깊기에 한 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유를 내 계절마다 시간대에 따라 여러 차례 찾아 돌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2
기기국번사창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118
북촌의 삼청동길을 따라 삼청공원이 있는 북쪽으로 걷다 보면 한국금융연수원에 도착합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무로 만든 한옥이 아니라 구한말에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요, 한국금융연수원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 ‘기기국 번사창’입니다.
여기서 ‘번사’는 흙으로 만든 주형에 금속 용액을 넣어 주조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형 무기공장이자, 최초의 신식무기 공장의 일부입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8년이 흐른 뒤인 1884년에 만들어진 건데요, 고종이 파견한 유학생들이 청나라 천진에서 배워 온 신식무기와 화약 등을 제작하기 위해 건설한 것입니다.
벽을 벽돌로 쌓은 것이 이전까지의 건물과는 달리 독특하게 생겼는데요, 맞배지붕의 위쪽에 다시 작은 지붕이 있는 듯한 모습도 다른 건물과는 다릅니다. 무기를 만들 때 발생하는 열과 가스 등을 외부로 배출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지금의 건물, 그러니까 주물을 만들기 위해 모래를 뒤치던 번사창만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금속 주형을 만드는 숙철창이나 목양창, 동모창, 그리고 창고 용도의 고방과 같은 건물 등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공장이 사실상 신식무기를 제대로 만들어보지도 못한 채 문을 닿았다는 겁니다. 10년 뒤인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과 뒤이어 청일전쟁까지 벌어지자 일본이 모든 무기공장을 폐쇄해 버렸기 때문인데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아예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대한제국이 자강을 위해 제도를 바꾸고 신식무기를 만드려고 시도했지만, 일본의 위세 앞에 힘 없이 그 뜻을 접을 수밖에 없던 겁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심지어 해방 뒤에도 이 건물들은 잊혀진 듯했습니다. 존재 자체는 물론 ‘자강을 위해 신식무기를 만든다’는 건물의 용도마저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지난 1984년, 그러니까 만들어진 지 정확히 백 년이 흐른 시점에 건물을 개보수하면서 번사창의 용도와 의미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습니다.
지난 수십 년... 우리의 삶에 보다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구한말과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모른 채 지내왔습니다. 혹시 북촌 한옥마을에 가실 일이 있다면 한국금융연수원 안에 있는 번사창을 한 번 찾아보시라고 권하는 이유입니다.
3
북촌 한옥밀집지역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가회동, 계동, 원서동, 안국동, 재동, 화동, 사간동, 소격동, 송현동, 팔판동, 삼청동 일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서울 최고의 한옥 동네인 북촌입니다. 주변에 고층빌딩이 없어서인지 다른 지역에 비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원인은 아닐 겁니다. 그냥 걷다 보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사대문 안에서 자연지세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 바로 북촌입니다. 백악산과 응봉 사이, 즉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크고 작은 언덕들에 위치한 북촌은 조선시대에 왕실 채소밭이 있던 구릉의 자연지세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자연하천을 복개한 길은 구불구불 마을 사이를 흘러갑니다. 쭉 뻗은 도로와 반듯한 블록을 기본으로 하는 개발 방식이 일반화된 지금의 한국, 특히 서울에서 이런 지형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지형 위에 서울미래유산인 종로구 북촌로 11가길41 일대의 북촌한옥밀집지역과 계동 48-12 일대의 한옥 건물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종로구 북촌로 11가길41 일대의 북촌한옥밀집지역은 조선시대 세도가들의 대표적인 집거지이자, 1930~194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들이 자리한 곳입니다. 대부분 300㎡ 이하의 작은 필지에 3층 이하의 저층 한옥들이어서 하늘을 많이 가리지 않습니다.
북촌 한옥밀집지역 도로1
4
계동 48-12 건물군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계동 48-12번지 일대
이어 계동 48-12 일대의 한옥 건물군도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들로 추정되는데, 역시 조선시대에 이곳에 자리했던 양반가의 큰 필지를 잘게 쪼개 한옥들을 지은 경우입니다. 북촌로 한옥밀집지역과의 차별점이라면 지난 1941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2층 한옥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숨가쁘게 변해가는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해 있으면서도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동네 북촌… 하지만 이러한 공간이 저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경제개발시대에는 새 도로가 뚫리고 넓혀지는 과정에서 옛 정취가 상당 부분 사라지기도 했고, 1999년 들어서는 제도 변화에 따라 한옥들이 상당수 사라지기도 했었습니다. 또 지난 2013년에는 5~6도 남짓한 완만한 고갯길을 평평하게 깎으려는 시도가 있어 논란이 된 적도 있습니다. 예전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지금의 정독도서관과 북촌 아트선재센터가 만나는 지점에서 계동 방향으로 있는 화동 고갯길이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북촌을 돌아보는 데 경사진 고갯길은 불편하니 길을 평탄화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자연지세를 큰 고민 없이 바꾸려는 자세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정작 그 지역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평탄화 사업 자체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행히 1990년대 말 이래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한옥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지자체도 한옥을 지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또 북촌을 북촌 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 화동 고갯길도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옛 정취를 간직한 몇 안 되는 동네 가운데 하나이자 몇 남지 않은 한옥 동네인 북촌… 앞으로도 오랜 기간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읽고 또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남길 기대해 봅니다.
계동 48-12 건물군 정문1
5
춘곡 고희동 가옥
주소 서울 종로구 창덕궁5길 40
북촌 한옥밀집지역에서 서울중앙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동쪽으로 걷다 보면 이내 한 한옥집을 만나게 됩니다. 한국 첫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 고희동 선생의 거처입니다.
고희동 선생이 191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직접 설계해 지은 뒤 40여 년 동안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한식과 일본식, 그리고 서양식 주거문화의 특징들이 모두 녹아있는 근대 문화유산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은 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난 1965년 고희동 선생이 세상을 뜬 뒤 소유주가 바뀌었고, 이후 2003년 들어서는 아예 헐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민과 지자체의 노력으로 지난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됐고, 2008년에는 종로구가 사들여 안채와 사랑채 등을 보수했습니다. 지난 2012년 말부터는 누구나 춘곡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일반 공개도 시작됐습니다.
춘곡은 1909년 한국 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전통적인 동양화에 서양화의 기법을 결합한 ‘수묵 채색화’를 발전시킨 예술가로 평가받습니다. 해방 뒤에는 대한미술협회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 대한민국예술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1915년 조선총독부가 연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라는, 일종의 엑스포에 ‘가야금을 타는 미인’을 출품하는 등 친일부역을 한 미술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해방 뒤인 지난 1956년에 작품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화첩을 제작하고 이듬해에 회고전을 한 번 연 것, 그리고 2005년 그의 40주기를 맞아 개최한 특별전 말고는 변변한 전시회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춘곡 선생의 집 일반 공개와 함께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등의 도움으로 시작된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이라는 전시회가 돋보이는 이유인데요, 춘곡이 그린 작품 넉 점 등 여러 서화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춘곡의 화실을 재현해 둬 책상과 이젤 등 활동 당시의 작업 도구와 유품도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육당 최남선의 개량 한옥을 그의 자손들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이 덧난다는 이유로 철거해 버린 것과는 대조적인 춘곡 고희동 선생 옛집의 일반 공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보고 예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되짚어볼 수 있게 하는 값진 결정이 아닐까요?
6
공간건축
주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 18
춘곡 고희동 가옥에서 남쪽으로 600여 미터를 걸으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서 우회전을 검은 벽돌로 마감한 외벽을 풍성한 담쟁이덩굴이 타고 넘어가는 독특한 외양의 건물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요, 한국전쟁 이후 황무지와 같았던 한국 현대건축계에서 산파와 같은 역할을 해온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즉 ‘공간건축’의 옛 사옥입니다.
1960년 고 김수근 씨가 설립한 공간건축은 지난 50여 년 동안 서울 잠실의 88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비롯해 남산의 타워호텔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 서울 법원종합청사 등 주요 건축물을 여럿 설계했습니다. 김원이나 김석철, 승효상 등 현재 60대 이상 주요 건축가들의 절반 가량을 배출해내기도 했습니다. 2011년에는 매출액 296억원을 기록해 업계 6위권을 달릴 정도로 튼실한 건축사사무소였습니다.
그런데 김수근이 건축 설계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1966년 11월 창간돼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예술잡지 타이틀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후 이름이 <스페이스>로 바뀐 잡지 <공간>을 창간한 이도 다름 아닌 그였습니다.
또 <공간>을 통해 그 동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비롯해 김덕수 패의 사물놀이, 무용가 홍신자 선생 등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2008년 1월호부터는 국내 잡지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학술정보 제공기관 ‘톰슨 로이터’의 예술인문학 인용 색인에 등재돼 학술적인 권위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또 포스트모던 건축을 정의한 세계적 건축가 찰스 젠크스가 ‘세계 현대건축을 기록해온 잡지’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세계 건축계에서 전문지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공간건축은 지난 1970년대 후반 소극장 운동이 태동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유명한 김덕수패의 사물놀이와 공옥진의 병신춤 등이 공간건축 사옥 지하 한쪽의 공연장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말 현재 공간건축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해외 건축시장과 일반 건축물 수주에도 눈을 돌리는 등 자립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폈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부동산 경기침체에 따른 설계 미수금 누적과 경영부실 등이 맞물려 공간건축은 결국 2013년 초 최종 부도 처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공간건축 사옥은 현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라는 갤러리로 바뀐 상태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한국 건축의 역사도 부단히 생멸변화하고 있는데요, 공간건축이 사라진 것은 안타깝지만 과연 이 건물은 앞으로 또 어떤 역사를 써 갈까요?
7
운현궁
주소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
북촌에서는 좀 벗어나 있지만 한옥은 옛 공간건축 사옥 주변에도 상당수 남아 있습니다. 안국역 사거리 바로 남쪽에 있는 운현궁은 한옥 중의 한옥이라 불릴 만합니다.
지난 1990년대 초중반 수십억 원을 들여 실시한 중수?복원공사로 잘 다듬어진 운현궁은 그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과 함께 구한말 비운의 역사가 갖는 처량함때문인지 답사 내내 차분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먼저 우뚝 선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나옵니다. 위엄있는 모습의 노안당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기거하던 생활 공간이자, 고종 즉위 이후 섭정을 하던 구한말 정치의 중심과도 같은 곳입니다. 여느 한옥들과는 달리 툇간이 노안당의 삼면을 빙 두르고 있고, 마루는 최고급으로 꼽힌다는 우물마루입니다.
이어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노락당이 나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열린 곳으로 유명한데요, 가례는 왕이나 왕세자가 왕비나 세자빈을 맞는 혼례를 의미하며 국혼이라고도 합니다. 그 안쪽에 있는 이로당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궁으로 치면 중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
그런데 운현궁 답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운현궁의 바로 북서쪽, 즉 안국역 사거리 한쪽 모서리에 붙어 있는 지금의 일본문화원 자리는 구한말 당시 일본의 헌병 초소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1971년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관실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후 1988년 주한 일본대사관 광보문화원, 그리고 1993년 공보문화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요, 원래는 운현궁에서 생활하던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조선황실 인사들의 동태를 감시하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운현궁 뒤쪽에 있는 ‘양관’이라는 근대 건축물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는 덕성여대 법인사무국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요, 역시 일제가 지은 건물로 황실 인사들을 회유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문화유산 답사를 하면 해당 건물이나 현장만을 둘러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상황들을 함께 돌아볼 때, 비로소 그 문화유산과 역사의 이면까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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