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모바일 메뉴

서울미래유산서울미래유산

I.SEOUL.U
전체메뉴닫기

주메뉴

 
 
체험코스 제안하기
  • 덕수궁 돌담길
    덕수궁 돌담길
시민제안 미래유산
  • 북한산 초등학교
    북한산 초등학교
  • 서울중요문형문화재전수회관
    서울중요문형문화재전수회관
  • 도산공원
    도산공원
미래유산 아카이브
  • 동대문 종합시장
    동대문 종합시장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서울극장
    서울극장

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서민의 공간 종로와 서울의 시장
0 1803 2017.01.18 약4시간

※ 오른쪽 화살표 버튼을 클릭하여, 각 코스를 확인해주세요.

이전코스 다음코스
1
보신각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54
조선 태조 이성계는 당시 남경으로 불렸던 지금의 서울로 천도를 하면서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경복궁과 한양도성 등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건설한 것이 있는데 바로 보신각입니다. 한양도성의 성문들을 여닫는 시간을 관장하는 등 행정과 군사적 목적은 물론 말 그대로 도성 사람들의 시간을 통제하던 시설입니다.
기록상으로는 태조 7년인 지난 1398년 청운교 서쪽 종루에 종을 걸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후 여러 전란을 겪으며 소실되기도 하고 다시 짓기도 하는 과정이 이어졌고, 근래에는 한국전쟁 때 파괴됐던 것을 1953년 다시 지었다가 1980년 들어 오늘날의 모습처럼 2층으로 재건한 것입니다.
성문을 일정 시각마다 여닫지 않는 데다 개인마다 손목시계나 휴대전화가 있어 굳이 보신각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요즘, 시민들이 보신각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제야의 종 타종식 때문이 아닐까요? 선조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이라고 여기는 ‘제야의 종’ 타종식은 매년 1월 1일 자정이면 어김 없이 울립니다. 그런데 이게 ‘만들어진 전통’이라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제야의 종 타종식은 애석하게도 일제의 나팔수 구실을 하던 경성방송국에 의해 시작된 이벤트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지난 1928년 새해를 앞두고 서울 정동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청취자들에게 신선한 소리를 들려주며 방송을 시작하자는 기획을 합니다.
그 신선한 소리는 바로 꾀꼬리 울음 소리였습니다. 방송국 관계자들의 심산으로는 꾀꼬리 3마리를 담요로 정중히 싸고 있다가 갑자기 치우면, 꾀꼬리들이 아침이 온 줄 알고 명징한 울음소리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한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순수하지 않게 활용됐다는 점입니다. 새해 벽두만 되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일 간에 종소리 ‘이원 생중계’가 이어졌습니다. 일제가 주창하던 ‘내선일체’나 ‘동조동근’론을 퍼뜨리는 도구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심지어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는 일제의 승전보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참전을 독려하는 도구로까지 활용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제야의 종을 가리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아시아가 흥하는 소리, 즉 “흥아의 소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며칠 전 보신각 주변은 여느 세밑처럼 제야의 종 타종식을 즐기러 나온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제국주의 망령에 빠져있던 일제의 ‘의도’가 투영된 행사였다는 점은 잊혀진 채 말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와 망각 속에 ‘집단적 기억’은 그렇게 조작되고 있습니다.
2
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관철동 45-5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탈 때면 특정 위치를 지날 때 실내등이 잠깐 동안 꺼지는 곳이 있다는 것을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지상으로 국철만 다니던 지난 1970년에 종로 밑을 지나는 지하철, 즉 한국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국철과 지하철이 서로 다른 전기시스템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국철 시스템을 아예 새 걸로 바꾸면 편했겠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상 국철 시스템 바꾸느라 애먼 돈을 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시작한 지난 1970년은 사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고작 255달러로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부총리가 나서서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우려했을 정도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서울 인구 때문에 두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습니다. 1955년 당시 157만 명이었던 인구가 15년 뒤인 1970년에는 4배에 가까운 552만5천여 명으로 늘어나 있던 겁니다.
그때, 교통수요 뿐만 아니라 교통난도 해소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지하철 건설이 결정된 겁니다. 양택식 서울시장이 ‘두더지 시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며 마치 군사작전하듯 공사를 독려한 끝에 결국 착공 3년 4개월만인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습니다.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 이은 아시아의 세 번째 지하철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통식 분위기가 영 엉망이었습니다. 그날 오전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행사 도중 총탄을 맞고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후 예정되어 있던 축하 행사들은 모두 취소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육 여사의 사망에 따른 불똥은 양택식 시장에게까지 튀고 말았는데요, 당시 광복절 행사의 주관자가 바로 서울시장이었던 겁니다. 결국 지하철 공사를 시작해 완공까지 보았던 양 시장은 그 뒤 채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끝내 시장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총리가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우려했는데, 정작 양 시장의 목이 달아나고 만 셈이었습니다.
이 같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의 지하철… 그 시작점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보신각을 마주보고 섰을 때 잔디밭 오른쪽을 보면 서울의 모든 지하철 노선의 높이 기준점이자 서울 지하철 역사의 시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1970년 10월 30일에 설치한 ‘수준점’이라는 시설물이 바로 그것인데요, 지름 7센티미터, 길이 12센티미터짜리 쇠못이 한 가운데 박힌 한 변 25센티미터짜리 화강암 덩어리입니다. 자세히 보면 “수도권 고속 전철 수준점. 1970. 10. 30.”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보신각 앞 지하철수준점 전경1
3
피맛골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낙원동 일대
추적추적 비가 내릴 때면 한국인들은 으레 전과 막걸리를 떠올립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서울 종로에 있던 열차집이 떠오르는데요, 스무 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실내에 들어서면 거의 주문과 동시에 품질 좋다는 통영굴을 알알이 품은 녹두전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올라왔습니다. 바로 옆 대림식당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삼치구이 냄새는 덤이었습니다. 날이 좋든 궂든 퇴근길 직장인이나 옛 정취를 그리워하는 노인들로 이 식당들이 있는 먹자골목은 늘 오일장 같았습니다. ‘피맛골’이라 불리는 이 골목은 ‘피마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크고 작은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조성된 서울 도심의 둘도 없는 먹자골목입니다.
그렇다고 이곳이 처음부터 먹거리 시장으로서 탄생한 건 아닙니다. 피맛골은 원래 종로1가에서 종로6가까지, 종로를 사이에 두고 각각 종로 남북에 종로와 평행해서 이어져 있던 골목길로, 종로의 큰길을 가다가 높은 사람의 말을 만나면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발생적으로 국밤집이나 선술집 등이 들어사게 되었는데요, 조선시대 때의 기록은 많이 없지만 지난 20세기의 흔적은 적잖이 남아 있는 편입니다. 예컨대 1920년대에 연계탕과 갈비구이를 대중적인 상품으로 내놓기 시작한 전동식당이 이곳에 있었고, 한국에서 ‘낚지볶음’이란 것이 식당 메뉴로 처음 등장한 곳도 1960년대 초의 이곳입니다. 집에서나 먹던 냉면이나 떡국, 대구탕도 모두 이곳을 기반 삼아 식당 메뉴화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아예 '해장국' 하면 피맛골 초입의 청진옥을 떠올릴 정도로 이곳은 대중음식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늦게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열차집’은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지난 1954년, 고 안덕인 씨 내외가 남의 집 추녀 밑에 비를 피할 수 있게끔 널빤지로 대충 막고 시작한 이 ‘불법 노점’은 그 긴 모양새가 마치 기차간 같다고 해서 열차집이라 불렸습니다. 겉모습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지만 맛에 있어서는 어느 가게에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국산과 북한산 녹두를 갈아 넣고 돼지기름으로 고소하게 부쳐내던 녹두전… 그러나 이제는 피맛골에 간다한들 그 맛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1980년대부터 이미 재개발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지난 2010년 여름 60년에 가까운 역사를 끝으로 정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심 한 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좁고 낡았으며 게다가 불결하기까지 하다는 이유 등으로 재개발 등쌀이 결국 이곳에까지 밀려든 탓입니다.그 결과 열차집과 대림식당 등이 있던 피맛골 초입은 이미 대형 빌딩들이 가득 들어찬 상태입니다.
피맛골 골목1
4
종묘
주소
피맛골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선 왕조의 둘도 없는 주요 시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즉 사직단이 땅의 신과 곡식의 신 등에게 제를 드림으로써 풍년을 기원하는 시설이었다면, 종묘는 왕가의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며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9월에 창건된 이후 세종 때 영녕전을 새로 짓고 명종 때 정전 4칸을 증축한 것 외에 약 2백 년 동안 대대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1592년 왜의 침략으로 종묘 시설 대부분이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당분간은 명종 때의 영의정이었던 심연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다가 선조41년인 1608년에 들어 재건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이때 특이한 것이 함께 불탄 왕궁보다 종묘를 먼저 복원했다는 점입니다. 유교를 기반으로 성립된 조선에서는 종묘가 그만큼 중요한 시설이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종묘 정전을 마주보고 있노라면 장중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다른 어떤 서양 건축물에서도, 한국의 그 어떤 건축물에서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은 일찍이 없던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종묘 정전에 이르러 정전을 바라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머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마다 큰 행사가 열립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전주 이씨들이 한데 모여 치르는 의식인데, 바로 '종묘대제'입니다. 또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악이 '종묘 제례악'입니다. 궁중의식에서 연주되던 아악과는 악기 구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그 음률이 장엄해 일반 국악이나 아악과는 또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런 면에서 이 일대를 돌아보는 시점을 5월 첫째 주 일요일로 잡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5
평화시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을지로6가 17
한국전쟁 직후 청계천 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은 사람들은 주로 월남한 이주민들이라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8년에 큰 화재가 나면서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판잣집도 거의 대부분 불타 버렸습니다.
1959년엔 남은 오두막들도 모두 철거되고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복개된 청계천변에 1962년 연면적 2만4천여 평방미터에 이르는 현대적 상가 평화시장이 세워졌습니다. 피난민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시장이었기에 전쟁의 아픔을 달래고자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평화시장은 단순한 의류 판매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직접 옷을 만들어 팔거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여러 가지 군복 및 의류를 염색하고 수선해서 팔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서양화되면서 양복과 여성복 소비가 급격히 늘게 되었고 평화시장도 함께 큰 호황을 누립니다. 맨 처음엔 상인 혼자서 운영하던 가게들이 그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일감을 봉제 공장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평화시장 내에 봉제 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산시설들이 빽빽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이곳에는 총 2천여 개의 점포가 있고, 5천여 명의 인원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 오랜 역사성만큼 점주들의 나이도 많아 평균 50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주변에 동대문패션타운이 들어섰고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산 저가 의류의 유입과 인터넷 쇼핑몰과의 과다 경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기도 한데요,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넘어 새로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있는 곳이 또한 평화시장입니다. 바로 그러한, 주변의 청평화시장과 제일평화시장 등과 함께 평화시장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상징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시장으로서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평화시장 전경1
6
전태일 분신장소미래유산
주소 중구 을지로6가 17-48 일대(중구 신당동 평화시장 A동, B동 사이 대로변)
초창기의 평화시장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볼까요? 사실 당시의 노동환경이라는 것은 썩 좋지 못했습니다. 평화시장 내 의류 공장들의 근로시간은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이었습니다. ‘시다’라고 불리던 나이 어린 작업 보조들의 평균 연령은 열다섯 살, 하루 인건비는 당시 커피한잔 값이었던 50원 정도였습니다.
최소 투자로 최대 수익을 뽑아내기 위해 열심이었던 자본가들의 욕심 때문에 공장 내부 환경도 형편 없었습니다. 층고가 3미터 정도 되는 다락방을 반으로 나누어서 2층으로 만들기도 해 직원들이 허리를 펴고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물론 노동자들은 그런 데서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고, 일이 밀리면 잠 쫓는 약을 먹어가며 일하는 것도 태반이었습니다. 당연히 만성 위장병, 신경통, 실내의 좋지 않은 공기 때문에 폐병에 걸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렇듯 척박했던 근로 환경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70년 평화시장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열일곱의 나이에 평화시장 학생복 맞춤집에 취직한 전태일 역시 시다를 거쳐 1967년에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시다 생활부터 시작하여 재단사가 되기까지 평화시장에서의 생활을 직접 체험한 전태일은 근로 조건 개선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로 기준법을 알게 된 이상 그 법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청년 전태일은 그런 것을 모르고 속아서 일해 온 자신들을 ‘바보’라고 일컬으며 동료 재단사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 시장의 세 건물의 노동자들을 모아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고 노동조합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열악한 노동 환경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여 노동청이나 시청을 상대로 근무시간 단축, 다락방 철거, 노동자들의 건강 검진 등을 요구했고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조건을 개선해주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시위를 계획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위도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 당하자 근로 기준법 책을 손에 든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말을 외치며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해 비로소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인권 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대학생과 종교계, 언론계에서는 연일 전태일의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나아가 청계 피복공장의 노동조합이 결성될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태일 분신장소 전면
7
창신동 봉제마을과 채석장 절벽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창신동 일대
평화시장이 요즘엔 주로 판매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생산이 이뤄지는 곳은 종로 건너편에 있는 창신동 일대입니다. 이곳은 현재 창신동 봉제마을이라 불리는데 역시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곳입니다.
조선시대 지금의 창신동 지역은 한양의 행정구역인 한성부에서 동부 12방 중 인창방과 숭신방이 속했던 곳입니다. 이 방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1914년에 창신동이라 이름 지은 건데요, 마을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같은 붉은 열매 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정말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경관이 좋고 도성과 가깝다 보니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의 별장이 많았다고 전해지고요.
그랬던 창신동은 현재 동대문 일대의 의류 시장에 있어 더 없이 중요한 생산 배후지역입니다. 창신5나길17일대의 골목길로 들어서면 빌라 건물의 1층이나 반지하층에 작은 규모의 공장들이 즐비합니다. 사업장의 70% 이상이 5인 이하의 영세 사업장들인데요, 어느 집은 재단만, 어느 집은 단추 구멍만, 어느 집은 미싱질만, 어느 집은 출하 직전 실밥만 뜯는 등 극도로 분업화되어 있는 무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오토바이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는 점입니다. 여러 종류즤 공장들 사이에 난 골목길이 실핏줄이라면 오토바이는 핏줄을 흐르는 혈액처럼 여러 공장들 사이의 물류를 책임지는 존재들입니다. 더 없이 소란스러운 풍경이지만 그 활기는 곧 창신동 사람들이 돈을 버는 소리이자 생명력을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창신동 봉제마을에는 현재 3,000여 개의 봉제 관련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지난 2013년에는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이 발족했고, 2015년에는 봉제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봉제마을 뒤쪽에 자리한 수십 미터 절벽이 시각적 충격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지난 1924년에 서울시의 전신인 경성부 직영 채석장으로 쓰일 때 생겨난 절벽들인데요, 지난 1912년 조선은행(현 화폐금융박물관), 1925년 경성역(현 문화역서울284), 1926년 경성부청(현 서울도서관), 그리고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 청사(현 광화문 자리에 있다가 1995년 철거)가 모두 이곳에서 채석한 화강암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신동 봉제마을 거리안내
0
탑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