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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현대사를 안고 흐르는 땅 강남
0 1466 2017.01.18 약3시간

※ 오른쪽 화살표 버튼을 클릭하여, 각 코스를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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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로공단 노동자생활 체험관 (순이의 집)미래유산
주소 금천구 가산동 39-6,7
지난 2013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 2층 양옥을 개조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가산디지털단지는 구로디지털단지와 함께 이른바 ‘구로공단’을 형성하는 주요 산업단지인데요, 지난 2000년대 초 ‘공단’이라는 명칭 대신 ‘디지털단지’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먼지 날리는 구식 공단의 느낌을 버리고 첨단산업의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은 지난 시대 노동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구로공단의 역사를 전승하고,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먼저 지하 1층에 여성 노동자, 이른바 ‘여공’들이 살던 쪽방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 때문에 ‘벌집’ 혹은 ‘닭장집’이라 불리는데요, 면적이 고작 5~6제곱미터에 불과해 성인 한두 명만 누워도 꽉 차 보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50실 정도로 유지됐으나 이곳은 재현에 초점을 둔 나머지 쪽방이 6개에 불과하기는 합니다.
지상에는 노동자들의 공장 밖 생활을 비롯해 여성 노동자가 영어 공부를 한다든지 야학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표현해 놨습니다. 영어 단어를 몰라 상표 하나 제대로 붙일 수 없던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학구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노동자, 특히 공장 노동자의 생활을 체험한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공장 노동자의 생활과 삶이란 것을 이런 곳에 와서 체험해봐야 할 정도로 노동자의 생활이란 게 이제는 접하기 힘든 역사책 속의 일이 되어버린 걸까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지금도 벌집들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빈민이나 이주노동자, 중국 동포들이 여전히 삶을 일구어가는 터전입니다.
지난 1960~70년대보다는 나아졌지만 이 시대 노동자들의 현실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8월 기준 우리나라 전체 임금노동자 1천931만여 명 가운데 32.5퍼센트에 달하는 627만여 명이 비정규직이었습니다. 더욱이 작업 중 다치면 산재보험 적용은커녕 급여도 받지 못하고 내쫓기는 이주노동자나 수십 잔의 커피를 팔아야 비로소 커피 한 잔 값을 버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삶은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습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을 돌아보다 보면 이 공간이 다 지나간 역사책 속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그래서 드나 봅니다.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금천 순이의 집) 전경
2
63한화생명빌딩
주소 서울 영등포구 63로 50
최근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드라마에서 등장인물 간에 63빌딩을 두고 작은 설전을 벌인 것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 경찰관이 경찰반장에게 “63빌딩이 60층이랍니다. 말이 됩니까”라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는데요, 이에 반장은 한심하다는 듯 “60층 맞다”고 답한 겁니다. 이를 두고 인터넷 등에서는 63빌딩이 63층이 아니라 60층 빌딩이라는 것을 그 동안은 몰랐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실제로 63빌딩은 지상층으로만 치면 60층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63빌딩이라 불리는 이유는 지하 3개층을 더했기 때문인데요, 88서울올림픽을 3년 정도 앞둔 지난 1985년 완공된 63빌딩은 당시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자 아시아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그 높이를 더 높게 느껴지기 위해 지상층 뿐만 아니라 지하층까지 합쳐서 이름을 지은 건데요, 일부러 한층한층 세어보는 사람이 없다 보니 으레 지상으로도 63층인 걸로 알려져 있던 겁니다.
그 높이만큼 63빌딩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도 차별성이 뚜렸했습니다. 먼저 건물 구조입니다. 워낙에 높다 보니 바람이나 지진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초속 30m 내외의 태풍이나 진도 5 정도의 지진을 만나면 건물 상층부가 좌우로 40센티미터 정도 움직이게 해 파괴를 방지합니다.
꼭대기에 있는 ‘63 전망대’는 해발 264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데요, 날이 맑으면 한강과 서울시내 전역, 관악산과 남산, 북한산, 그리고 저멀리 서해 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높은 곳까지 오르기 위해 초속 54미터나 되는 고속 엘리베이터가 있는데요, 이는 민간인들에게 개방된 한국의 어느 엘리베이터보다도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63씨월드라고 부르는 대형 수족관도 오랜 기간 인기를 끌어왔습니다. 펭귄이나 전기뱀장어 등은 물론 최근에 들어온 바이칼 물범까지, 모두 4백여 종 2만여 마리의 해양생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어진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63빌딩은 최고 높이의 타이틀을 내려놓은 지 오랩니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나 목동 하이페리온 같은 주상복합아파트에도 뒤쳐졌고, 높이가 305미터에 달하는 인천 송도의 동북아무역타워 등에도 밀린 상탭니다. 하지만 일반시민이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는 건물 중에서는 여전히 가장 높은 빌딩, 바로 서울 여의도의 63빌딩입니다.
3
국립서울현충원미래유산
주소 동작구 사당2동 산44-7
서울지하철 동작역에 내려 8번 출구로 나가면 국립서울현충원이 지척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라고 더 잘 알려진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국전쟁 직후인 지난 1957년 ‘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만큼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논란이 되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분수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애국지사 묘역에 닿습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의병운동이나 독립투쟁을 하던 이들의 묘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애국지사묘역에 묻히기를 거부했던 인사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최후의 생존자로 지난 1993년 타계한 백강 조경한 선생입니다. 그는 유언에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고 말았는데요, 그가 그런 유언을 남긴 이유는 유언 그대로 국립서울현충원을 비롯한 대전국립현충원 등에 친일부역자들이 적잖이 안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달리 냉기 가득한 남북 대결의 장이기도 합니다. 애국지사묘역에 시신도 없이 조성된 가묘 한 기가 그 증거입니다. 주인은 1920~30년대 만주에서 위세를 떨친 양세봉 조선혁명군 사령관입니다. 그는 1934년 일제가 보낸 밀정에 의해 암살되면서 목이 잘렸는데, 목 없는 시신은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고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가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묘가 서로의 정치적인 이유로 남과 북에 모두 존재하는 어색한 상황입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시대정신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병의 묘는 묘비도 작고 넓이도 3.3제곱미터 밖에 안 되는데 반해, 장군의 묘는 묘비도 훨씬 크고 넓이도 사병묘의 8배나 됩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들의 묘는 일반 사병들의 것에 비해 거의 80에서 100배 규모입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단 병사든 별 네 개의 장군이든 아니면 대통령이든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은 매한가지일 텐데, 살아생전의 서열이 죽어서까지 엄격히 매겨지고 있습니다. 부산 유엔군묘지를 비롯해 프랑스 노르망디나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계급에 따른 차등을 주지 않는 경우와는 달리 국립서울현충원의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국립서울현충원 전경
4
서울고속버스터미널미래유산
주소 서초구 반포동 19-4
우리나라에서 고속버스가 최초로 달리게 된 건 거의 반 세기 전인 지난 1969년 4월 12일의 일입니다. 한진고속에서 고속버스 20대로 서울-인천간 운행을 시작한 건데요, 이듬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맞물려 운행 구간도 남쪽으로 연장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사실 고속버스 운행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6개 업체가 터미널을 각 회사의 형편대로 마련하다 보니 터미널의 위치나 규모가 제멋대로였습니다. 한진고속은 서울역앞 봉래동 입구에, 삼화고속은 종로구 관철동에, 그리고 광주고속 등 4개 업체는 동대문 앞에 있던 겁니다. 대합실 면적이 협소한 데다 아예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국 7년 뒤인 1976년 서울시와 정부가 나서서 종합터미널을 세우기로 했는데요, 그때 떠오른 지역이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만 오면 침수되던 서울 반포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건물 자체가 가건물인데다 당시 서울 인구의 대부분이 강북에 몰려 있었기에, 고속버스들은 일단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각각의 터미널에서 승객을 태운 뒤 강남 터미널을 거쳐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결국 반포동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야간 주차장으로나 이용될 뿐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서울시장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만 발착할 것을 지시했고, 그것을 어길 때에는 사업면허 취소나 운행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행정명령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다행히 70년대말 들어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부터는 사정이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상가도 들어서는 등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대중교통 편도 확충되기 시작한 겁니다. 덩달아 터미널 이용자들도 차츰 늘어나면서 1981년 들어 새로운 터미널 건물도 지어졌습니다. 지금 경부선이 있는 11층짜리 건물과, 1990년대 말까지 호남선이 있던 '호남 차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이 그것입니다.
고도의 경제개발 시대에 전국 각지를 연결했으며, 동시에 우리네 고속버스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집약해 보여주고 있는 서울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여행을 위해 이곳을 지나신다면 그 역사성도 한 번 더 유심히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침구가게2
5
삼풍참사위령탑미래유산
주소 서초구 양재동 227-3
서울은 정말 빠른 속도로 변해 갑니다. 기억하기 싫은 역사나 사건사고가 일어난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서울 지하철 교대역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을 지나 반포역 쪽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아크로비스타라는 대형 주상복합아파트 터도 그런 경우입니다.
주변에 관공서 빌딩과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어 잘 알아채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이곳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인 지난 1995년 5백여 명 사망에 천 명에 가까운 부상자를 내며 붕괴된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입니다.
당시에는 고급 백화점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이름이 높았던 초호화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러나 1989년 세워진 건물이 채 6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진 건 인간의 탐욕 그리고 무책임 때문이었습니다.
애당초 아파트 상가로 짓던 건물을 백화점으로 급히 용도를 변경했는데요, 이때 4층짜리를 억지로 5층으로 높이면서 구조 보강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겁니다. 또 쇼핑공간 확보를 위해 무리하게 벽을 트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서 바닥과 천장을 뚫어, 결국 몇 개 안 남은 기둥에 쏠리는 압력이 커져 버렸습니다. 그나마의 철근도 제대로 시공하지 않아 붕괴 시작 단 20초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랬기에, 사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예고된 인재에 가까웠습니다. 붕괴가 있기 1년 전부터 이미 벽과 바닥에 금이 가는 현상이 발견됐고, 사고 며칠 전부터는 아예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고 건물이 기울기 시작하는 등 붕괴 조짐이 나타난 겁니다.
그리고 건물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백화점 관계자들의 도덕적 해이까지 겹쳤다는 데 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게 명확한 상태였음에도 당일 매출에 지장을 줄까 영업을 강행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준 삼풍그룹 회장과 그의 아들 이한상 사장 등은 대피 안내방송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대피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현재 ‘양재 시민의 숲’ 한쪽 구석에 위령비만 한 개 서있을 뿐 백화점이 있던 아크로비스타 근처에는 당시 ‘단군 이래 최대 사고였다’고도 일컬어졌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한 그 어떤 표시물도 없습니다. 과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이토록 쉽게 잊어도 되는 걸까요? 지금도 ‘안전’이라는 화두가 문제적 단어로 여겨지는 한국사회… 안전사고 예방에 대한 중요성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조형물인 삼풍참사위령탑이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삼풍참사위령탑 전경1
6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미래유산
주소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
혹시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 북단의 임시주차장을 눈여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임시주차장 한쪽에 ‘희생자 위령비’라는 것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1997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3주기를 맞아 세운 건데요, 위령비에는 당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던 무학여고의 교사이자 시인인 변세화 씨의 ‘영전에 바치는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길이 1,160.8미터, 폭 19.4미터의 성수대교가 붕괴한 것은 등교와 출근이 맞물리는 오전 7시 40분쯤이었습니다. 길이 48미터짜리 다리 상판 한 개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마침 그 위를 달리던 시내버스와 승합차, 승용차 등 모두 6대의 차량이 20미터 아래 한강으로 추락한 겁니다.
전례 없던 사고로, 사망자만 32명, 부상자도 17명에 달했습니다. 특히 시내버스에 타고 있던 무학여중고 학생 9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어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대형사고는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는데요,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 날, 충북 충주호에서는 유람선에 화재가 나 29명이 숨지고 33명이 중경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듬해 4월에는 대구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로 1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6월 발생한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5백여 명의 사망자와 9백 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대부분 타당성 조사도 없이 설계가 시작된 데다 그에 대한 감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안전 불감증 등이 원인이었습니다.
성수대교만 해도 다방면에서 부실시공을 한 정황이 역력했고, 안전검사를 위한 접근 통로조차 없었음에도 아무런 시정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적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상판의 볼트와 너트 가운데 손으로도 풀리는 것이 부지기수였고, 최소 10밀리미터 이상이어야 하는 용접 두께도 고작 8밀리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상판 연결 부위는 심하게 녹슬어 있었으며, 그걸 감추기 위해 페인트가 덧칠해진 곳도 태반이었습니다. 다리 상판에 가해지는 압력을 교각으로 전달해야 하는 이음새들의 결함이 이처럼 심각했으니, 성수대교는 언제 무너져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셈입니다. 당국의 무사안일과 직무유기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준공 뒤 무너질 때까지 15년 동안 정밀안전진단을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던 겁니다.
문제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과연 흘러간 옛 이야기일 뿐이냐는 겁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된 성수대교참사희생자위령탑을 돌아보며 공공시설물의 안전과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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