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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체험코스

서울미래유산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보세요.
근현대 100년의 기억 정동
0 1936 2016.11.28 약2시간 반
코스 경로
1.환구단 - 2.서울광장 - 3.옛 부민관 - 4.세실극장 - 5.덕수궁 중명전 - 6.경교장 - 7.4.19혁명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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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구단
주소 서울 중구 소공로 106
서울광장 동쪽으로, 그러니까 프레지던트호텔과웨스틴 조선호텔, 그리고 롯데호텔 사이로 고풍스러운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 옵니다. 바로 고종의 황제 선포식이 열린,그리고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열린환구단의 부속 건물 '황궁우'입니다.
단군 이래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 제를 올려왔는데요, 그건 조선시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하지만 하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황제뿐이라는 중국의 간섭과 압력 때문에이 행사는 조선 초기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그런데 4백여 년 뒤인 1897년, 이 행사가 부활합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서입니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열강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까지,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습니다.심지어 명성황후 시해사건까지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온 나라를 온통 충격과 혼란에 빠뜨렸는데요,고종에게는 백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습니다.조선도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고종은 왕이 아닌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그리고 조선도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해, 자주독립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로 했습니다.그 황제 즉위식을 위해 만든 제단이 곧 환구단입니다.
그러나 환구단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일제의 강점이 시작되자일제는 황궁우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웠습니다. 대한제국의 자존심이 일본의 근대적인 상징물로 바뀐 겁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사라진 것으로만 알고 있던 환구단의 정문이서울 우이동의 한 시내버스 차고지에서 발견된 겁니다.
이 정문이 지난 2009년말 황궁우 옆으로 옮겨져 복원됐습니다.일본에 강제병합된 지 백여 년만에 제 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그저 지나치기 쉽지만알고 보면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환구단…. 서울광장 근처를 지나실 때, 환구단에 한 번 들러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2
서울광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태평로1가 31
서울광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두고 현재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옛 서울시청사, 즉 원래 일제 때의 경성부청사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광장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서울광장은 제26대 조선 왕인 고종이 대한제국을 개창할 때 황제의 거처인경운궁(덕수궁)을 국가 통치의 중점으로 삼고자 조성한 광장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울광장은 늘 한반도 역사의 중심 역할을, 특히 민의가 표출되는 공간으로서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난 1919년 탑골공원에서 첫 독립선언서가 선포됨과 동시에 이 광장도 독립만세시위의 중심 현장으로 떠올랐으며, 해방 뒤에는 이승만 독재를 꺼꾸러뜨린 1960년의 4.19민주혁명, 박정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체결 움직임에 반대해 일어난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전두환 독재에 저항해 일어난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 시발점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습니다.
근래에도 장소의 역사성을 이어져 왔습니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 즉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당시 대대적인 집회가 열리기 시작한 곳도, 2008년 이명박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시작된 촛불집회의 시작점도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나 돈과 사람이 몰리는 테헤란로 또는 강남대로 등이 아닌 서울광장이었습니다. 구한말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민의 표출의 장으로서의 역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정치 집회만 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서울광장에서 ‘붉은 악마’들의 거리응원이시작되며 지금까지도 국가적 차원의 다양한 행사가 치러지는 축제장으로 기능해오고 있는 곳이 서울광장입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시청사 앞에 위치한 상징성과 더불어 시민들이 각종 행사 및 시위 등을 통해 민의를 표출했던 대표적인 장소로서의 서울광장…. 서울미래유산 등재를 통해 그 역사성을 더욱 오래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서울광장 전경
3
옛 부민관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125
서울시청 근처를 지나실 때 시청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서있는 흰색 건물을 유심히 살펴본 적 있으신가요?지금은 ‘서울시의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해방 이후부터 지난 197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던 근 25년의 시간 동안이곳에서는 이후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각종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됐습니다.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비롯해, “인심을 혼란케 하여 적을 이롭게 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일본의 전시형법을 참고한 내용을 추가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된 현장입니다. 또 5?16 군사쿠데타 때에는 국회 간판을 떼고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차려졌고,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에는 한일협정비준 파동과 3선개헌 파동, 그리고 국가보위법 파동 등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다시 한 번 유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물 앞 화단 한쪽에 놓여 있는 작은 표석 때문입니다.거기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부민관 폭파 의거 터 - 1945년 7월 24일 애국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 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애당초 이 건물은 지난 1935년 일제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과 같은 문화예술 공연장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만 사실상 이곳에선 각종 친일 정치집회도잇따라 열렸습니다.
세 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며 노동운동 등을 하던 조문기 등 3명의 10대 청년들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의거 가운데 하나를 결행한 겁니다.당시는 해방을 채 안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지지부진해 보이기도 했던 독립운동이 해방의 그날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작은 표석 하나 뿐입니다.건물만 하더라도 지난 1980년 태평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대부분 헐렸고, 1985년 제3별관을 헌 뒤에는 지금처럼 목욕탕 굴뚝같은 첨탑과 성냥갑 같은 어색한 건물만 남게 됐습니다.
3명의 청년들도 결국엔 하나둘 스러져 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랜 삶을 산 조문기 선생만 하더라도 평생을 일제잔재 청산운동에 주력하다가 지난 2008년 향년 81로 생을 마쳤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가는 서울에서 이 건물이라고 수십수백 년 헐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근처를 지날 때면 한 번이라도 더 뒤틀린 역사와 그걸 바로 잡기 위해 목숨바친 이들의 역사를 되새겨 보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4
세실극장미래유산
주소 중구 정동 3-1
옛 부민관에서 덕구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영국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쯤에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세실극장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 4대 주교였던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에서 이름을 따론세실극장은지난 1976년 개관 당시 지하 1층 지상 4층 구조로 320석의 객석을 갖춰 소극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으며, 사실상 한국 연극계의 메카 역할을 해온 곳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977년부터 80년까지 국내 창작극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연극제’가 시작된 곳이 바로 세실극장이었습니다.
IMF 때는 재정난으로 1년 정도 문을 닫기도 했었지만,‘점프’나 ‘비밥’ 등 논버벌 퍼포먼스 공연은 물론 전인권이나 최백호, 정태춘 박은옥, 안치환, 강산에 등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장으로도 이용되며 주요한 공연장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세실극장은 건축적인 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넓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채꼴의 공간 구성으로 관객의 시야 확보가 용이해 배우와 관객의 친밀도가 높은 극장인데요, 이는한국 1세대 건축가로서 지난 1950~1970년대 우리나라의 건축 설계 능력을 크게 확장한고 김중업의 설계 덕분입니다.
부가적으로 세실극장 지하에 있던 세실레스토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실레스토랑은 지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해외에 본부를 둔 영국성공회성당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터라 군사정권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민주화운동가들이 모여 시국 상황과 관련한 논의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1987년 6월 민주항쟁 선언문 낭독을 비롯하여 각종 시국선언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자회견 장소로 이용되면서‘기자회견 전용 레스토랑’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다만 지난 2009년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세실레스토랑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세실극장 정문1
5
덕수궁 중명전
주소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덕수궁 돌담길은 가로수가 멋드러지고 차량 통행도 적어 서울 도심에서도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서울 나아가 한국의 근대사를 이해하기에도 맞춤한공간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일제의 경성법원 건물이나 구한말 신식교육의 산실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그리고 러시아공사관 첨탑과 프랑스공사관 유구 등, 덕수궁 돌담길 곳곳에는 지난 시대 이 땅에서 벌어진 격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실극장에서 덕구숭대한문까지 나아간 뒤 그 골목, 즉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서울미래유산인 정동극장 뒤쪽에 조용히 숨어 있는 중명전이 대표적입니다. 애당초 대한제국의 황실 도서관으로 이용되었지만 지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한 마디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이었습니다. 그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과정으로 인해 요즈음엔 을사조약이 아니라 ‘강제할 늑(勒)’자를 써서 을사늑약이라고도부릅니다.
을사조약 체결 2년 뒤 고종이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등의 특사를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었습니다. 고종은 그 일을 빌미로 황제에서 강제 퇴위되었는데중명전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성구락부에 임대되어 외국인들을 위한 사교장으로 쓰인 것입니다.
해방 뒤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영구귀국한 영친왕과이방자 여사의 거처로 잠시 쓰이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면에서 한국인은 잊고 싶어 하는 부정적인 사건이 벌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일까요? 1970년대 말 민간에 매각된 뒤에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듯했고 심지어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었습니다.
결국 2009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편성한 긴급 예산으로 보수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지금과 같은 역사관으로 재탄생해 일반에 개방되었습니다. 늦은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난 2007년에는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부정적인 역사라고 해서 부끄럽다며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건 역사적인 망각을 앞당길 뿐입니다.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억의 현장들을 남기고 보존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일 아닐까요?
6
경교장
주소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중명전에서 정동극장까지 나온 뒤 우회전해 400여 미터를 걸으면 이내 정동사거리에 닿습니다. 서울 한양도성의사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이 있던 터입니다. 그런 돈의문 터 바로 북서쪽에 강북삼성병원이 있는데요,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서거한 현장이 남아 있습니다.
애초 갑신정변 당시 일본공사였던타케조에신이치로의 성 타케조에, 우리식 발음 ‘죽첨’을 따 ‘죽첨장’이라 불렀던 이 건물은일제 때 금광 개발을 통해 ‘조선의 황금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던최창학의소유였는데, 갑작스러운 해방에 놀란 최창학이 이 건물을 임시정부 측에 내놓으면서 김구 일행이 사용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김구 선생의 사저이자 암살된 공간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동시에 ‘반탁 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통일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알려지자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각 정당과 단체 대표들이 모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펴기로 결정했던 곳이 경교장입니다.
나아가 남북이 분단될 가능성이 커지자 ‘통일만이 우리가 살 길이기에 통일을 위해서는 그것이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라고 해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며 북행을 결의하는 등, 통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실제로 김구 선생은 지난 1948년 4월 19일, 보수 우익 청년들이 북행을 반대하며 경교장 정문을 막아서자 뒷담을 넘어 협상을 위해 북으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백범이 서거하면서 경교장의 운명도 파란을 겪어야 했습니다.최창학이 되가져간 이후 타이완대사관과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 그리고 베트남 대사관저 등으로 이용되면서 원래 모습을 잃어간 겁니다.
이윽고 1968년에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인 고려병원에 인수되고부터는 건물 내부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2000년대 초까지도 응급실과 약국, 의사휴게실 등으로 쓰인 탓에 외벽만 그대로일 뿐 내부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경교장에 다시 반가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지난 2010년 전면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된 이래 201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쓰였던 시절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시민들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화재라는 것도, 그리고 역사라는 것도 마치 생멸변화하는 생명체처럼 시민들의 관심 여부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변의 역사 공간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7
4.19혁명기념도서관미래유산
주소 종로구 평동 166
경교장에서 나와 정동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서대문역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언덕길 중간쯤 되는 지점에 새하얀 건물이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지난 1994년에 새로 지은 4?19혁명기념도서관입니다.한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4.19혁명이 이름에 들어가 있어 특이해 보이는데요,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 건물이 서있는 자리는 한때 ‘서대문 경무대’라고도 불렸던 이기붕의 집터였습니다.이기붕은 국회의장과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두루 지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약력의 전부가 아닙니다.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했다가 부결된 적이 있었는데 그걸 요상한 반올림을 통해 가결을 강행한, 한 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과 독재에 적극 가담한 인물입니다.
또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표를 얻은 나머지 실제 투표 결과보다 지지율을 낮추어 발표하는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총 유효 투표수의 40%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투표했고, 몇 명씩 집단으로 투표를 진행하는 등 공개 투표를 실시한 겁니다.야당을 찍을 것 같은 유권자에게는 아예 투표권을 주지 않고 대리 투표를 시키거나, 야당 후보 지지표가 나오면 무효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한 마디로 부정선거를 통한 당선이었습니다.
결국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그동안 쌓여온 국민들의 분노가 불타 올랐고, 약 한 달 뒤 터진 4?19혁명 때 맏아들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 뒤, 이승만 독재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의 집이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이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게 됐습니다.지금은 “자유, 민주, 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4.19혁명의 숭고한 이념과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도 계승 발전”한다는 목표 아래 운영되고 있지만, 아이로니컬한점은 그러한 사업을 진행한 주체가 4?19혁명 이듬해에 군사쿠데타를 통해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겁니다.
대비되는 두 역사를 모두 간직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으로서의4.19혁명기념도서관…도서관의 이름만 보고는 알 수 없는 4?19혁명기념도서관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이름 뒤에 감춰진 진실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외부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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