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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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14호) |
강북구 수유동 산73-1(북한산둘레길 수유탐방지원센터 뒤) |
손병희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15호) |
천도교 제3대 교조로,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문화사업에 힘씀 |
이시영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16호) |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임시정부 법무·재무총장을 역임, 광복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대통령 통치에 반대하여 사직. |
신익희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내무부장을 지냈고, 8·15 광복 후에는 제헌 국회의장, 제2대 국회의장에 당선,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거 유세 중 병사 |
김창숙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18호) |
을사5적 처형요구,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 부정선거 규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 |
이명룡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기독교 대표로 독립운동 지도 |
여운형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불씨를 지폈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자주독립국가 건국을 위해 노력 |
조병옥 박사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광주학생 항일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민주당 대통령후보 공천을 받았으나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병사 |
유림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화 해방 후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독립노동당을 창당하는 등의 활동 |
김병로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일본에 유학 중, [학자광]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1930년에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고, 8·15 광복 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고 초대 및 2대 대법원장을 지냄 |
신숙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3·1독립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0년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 |
김도연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일본 동경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임. 입법의원과 제헌 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냄 |
신하균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신익희 선생의 장남, 모친과 함께 상해로 부친 신익희 선생을 찾아가 공부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 광복군사령부 참모처에 근무하면서 대적 공작과 독립운동 활동에 힘씀 |
서상일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대동청년당,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놓았음 |
양일동 선생 건국훈장대한민국장 (등록문화재 제520호) |
중동학교 재학 중 광주항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 일본 동경에서 조선동흥노동동맹에 가입, 신문발행으로 항일의식 고취 |
광복군 합동묘역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순국한 애국선열 18위 합동묘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