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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희동에서 장충동까지, 한양도성 따라 만나는 지난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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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봉제마을
추천수0 조회수563 작성일2018.10.10
자막
면담자 : 이 인터뷰는 서울시 문화정책과 주관의 서울시 미래유산 심층영상 기록제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천 십 칠(2017)년 칠(7)월 삼(3)일 월요일이며, 창신동 봉제마을에서 인터뷰가 진행이 됩니다. 구술자는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회장이신 박귀성 선생님이시고 면담자는 권용찬입니다. 이 영상은 서울미래유산 기록으로 남게 되고, 일부는 서울시민에게 홍보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구술자 : 안녕하세요? 면담자 : 날씨가 굉장히 덥습니다. 근데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구술자 : 네 반갑습니다. 면담자 : 오늘 저희가 그 창신동 봉제마을의 인제 그 서울시 미래유산으로서 선정된 그런 과정이라던가, 창신동 봉제마을의 역사라든가 구성,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을 시민들하고 같이 좀 공유하기 위해서 이렇게 여쭐라고 찾아뵙는데요, 우선, 창신동에 봉제관련 업체들이 많이 밀집돼서 지금 운영이 되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밀집되게 되었는지, 초기 과정이나 이런 부분들을 좀 아시는 게 있으면 설명을 좀 부탁드릴게요. 구술자 : 창신동에 지금 이쪽에 우리 조합이 있는데 정확하게 공장이 있는 것이 구백이십(920) 개 있습니다. 구백이십(920) 개.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해서 한군데가 이렇게 몰려있는 곳은 직접지, 직접지로서는 최고가입니다. 최고로 ㅁ낳고, 이렇게 흥성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이제 여기는 동대문 상권, 동대문시장을 상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대문 시장에 살면 은 공장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한 칠십(70)년도 육십(60)년도 그때, 광장시장, 평화시장이 생기면서, 그때는 평화시장 이층에서 공장도 하고 그랬습니다만은, 조그만한 공장들을 창신동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창신동이라는 데는 창신 일이삼동 있는데 지금우리 조합이 사무실 내가 있는 데가 창신 이동이에요, 이동에만 그렇게 공장이 많다고 합니다. 면담자 : 구백이십(920) 개. 구술자 : 구백이십(920) 개. 예,예. 우리가 설문조사, 실태조사를 다 해갖고 하는 거라, 그래서 그냥 그 자료도 우리가 다 있고 그래요. 그런 것이, 그러니까 어마어마하죠. 공장이. 우리가 옛날, 소공장, 조그만한 공장들이라서 크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섯(5)명 오(5)인 미만 그러니까 그냥 부부가 하는 공장이 제일로 많고요. 부부끼리. 그런 공장들을 이때그냥 홀로 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동대문시장을 상대로 많이 일감도 인제 동대문시장을 상권을 해서 지금 허고 있는 실태거든 이렇게. 면담자 : 그러면 초기에 창신동에 그런 봉제관련 분들이 모이게 된 것이. 동대문 시장이 생기고 동대문시장이 좀 발전하고 뭐 이런 과정하고도 같이 한다고도 봐도 되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이제. 우리가 저도 지금 이 봉제공장, 그러니까 봉제생활한지가 벌써 사십년이에요 사십(40)년. 인제 제가 쉰아홉(59)인데, 열아홉(19)살에 봉제공장을 들어왔었으니까 한 사십(40)년 됐습다만은, 그전에 선배들 전태일 열사라든지, 그분들이 계신 걸을 감안했을 때 그때 우리나라 경제가 무지하게 그랬잖아요, 어른들이 살 때 시골에서 올라와서 그때 기숙사생활, 뭐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면서. 이 창신동이 지금도 그래요, 창신동은 서민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서민들이. 그래가지고 지금은 인구도 팔천오백(8500)명이나 구천(9000)명 정도밖에 안되는데요. 칠십(70)년도 그때는 거리만해가지고 이만(20,000)명이 넘었어요. 창신 이(2)동에만. 창신동에만. 그래가지고 그 수백만이 쪽방에서 이렇게 살다시피 이렇게 해가지고. 서민들이 사는 동네라서 그래가지고 그때 그 시장이 우리나라 시장이. 광장시장, 그리고 평화시장, 이렇게 이제, 남대문시장. 이런 식으로 시장이 차근차근 형성이 되잖아요. 되면서 조그만한 공장들이 생기는 거죠, 이렇게. 그러다보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공장들이 많은 공장들이 밀집상태로 되어있습니다. 면담자 : 말씀 중에 얘기가 나왔는데. 회장님께서 사시는 동네에 여기 대해서 얘기하셨으면 칠십(70)년대 후반쯤. 그 정도 같은데 그때 당시에 봉제공장에 상태라든가 뭐 그때 작업환경이라던가, 이런 것들이 사실 좀 궁금합니다. 그 앞전에 보면 말씀하셨지만 전태일 열사로 대변되는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나 이런 것들이 젊은 층에는 그런 것들이 기억이 되는데, 당시에 열아홉(19)살에 그 모습은 어땠었습니까? 구술자 : 제가 열아홉(19)살 때 첫 사회생활을 했었는데, 그때 이제 우리 친척 삼촌, 삼촌이라는 분이 공장을 하고 계셨어요. 여기 창의동 일대에서. 그래서 내가 너 이리 와서 좀 도와봐라 하고 들어갔는데. 딱 들어가서 보니까는 열일곱 열여섯 먹은 사람들이 한 아름. 그때는 정말 힘들게 살다 보니까. 그때 공장들이 얼마나 열악하냐 하면은 공장 다락. 공장이 있으면은 다락을 다져놨어요. 다락이 기숙사에요. 위에는 여자들. 재단하는 데가 재단 판이 있습니다. 재단 판 밑에는 남자들. 이런 공장생활들이. 저도 사실은 저는 그렇게까지 세상을 힘들게 살지 않았지만은. 와서 보니까 봉제공장이라는게 진짜로 힘들어요. 열악해요. 그래서 그때는 사람이 칠십(70)년대에는 칠십(70)년이나 팔십(80)년 초기에는 사람이, 이 종업원들이 넘쳐나요. 넘쳐나. 시골서 올라와가지고. 그래서 사실은 가서 보면은 저는 그리 모였습니다만은 이렇게, 이렇게 웃 선배들한테 자로 이렇게 잘해! 이렇게 맞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배우는 시절이에요 배우는 시절. 돈, 그때 내가 열아홉(19)살 때 첫 월급이 칠천팔백(7,800)원이였든가, 하이튼 그런 것 같아요. 면담자 : 한 달 월급이? 구술자 : 한 달 월급이. 그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칠천팔백(7,800)원이가 칠만팔천(78,000)원인가, 하이튼. 그렇게 받았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와서 보면은 그때 전태일 열사 그렇게 서거하시고,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노동계에서의 바람이 이렇게 그냥, 그때는 이 시간도요, 이 시간도 얼마나 힘들었냐 하면은, 명칭은 아홉(9)시에 시작해서 아홉(9)시에 끝나, 지금도 그래요. 창신동에는. 시작해서 아홉(9)시에 끝난다 그럽니다. 그러나 그때는 뭐 일요일도 없고, 쉬는 날이 없었어요. 그래. 추석명절대목이다. 명절 전이다, 하면은 막 일주일동안 나라를 세우고 그래요. 나라를 세워. 내가 하나의 예를 들어서, 하나의 제 예를 들면은, 삼촌네 공장에 갔는데 이게 내가 그때 구정인가, 하이튼 추석인가, 그때. 명절 전 이였습니다, 그냥. 며칠 남겨 놓고 계속 그냥. 그때는 옷이, 만들기만 하면 나가요 만들기만. 그러니까는 그 시절에는 막 일단 딸리니깐, 물건이 딸리니깐 막 날을 세서 만드는 겁니다. 근데 한번은 날을 세다보면은 그렇다가 잠깐잠깐 잘 꺼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피곤한데, 화장실에 가서 이렇게 옷을 내려놓고 잠이 들어요. 잠이. 문 잠궈놓고. 그 정도로 피곤하고 내가. 면담자 : 볼일 본다고? 구술자 : 예, 예. 그래갖고 막. 위에서 막 문 두들기고 해갖고 호롯이 깨갖고, 그런 추억도 있고. 아 이게 슬픈 추억이었지만. 그런 것도 있고. 하여간 명절 같으면은 한 삼사일은 잠을 못 잔다, 한숨도.. 계속 일주일동안. 일을 쉬는 것도 없고, 계속. 그런 생활이 이제 너무 힘들다보니깐. 그때 이제 노동조에서 이거 너무 심하다, 이래서. 그 전태열 열사의 청계피복(淸溪被服)이라고 있었어요. 청계피복(淸溪被服). 그때 저도 이제 가입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막 정부의 허락을 맡고 공장마다 찾아다녀요, 공장마다. 막 불꺼, 불꺼하고 불을 끄라 이 말이에요. 그냥 불을 끄고 빨리 퇴근을 시켜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는 공장마다 문을 잠가놓고 또 어떻게 일을 시키느냐. 검정원단으로 싹 창문을 가려버려요, 그러면 안내려가게. 그렇게 일을 시키고 그랬었어요. 그런 시절이 맨날 지나면서 서서히 이게 변함이 올 꺼 아닐꺼냐. 우리나라도 이제 경제성장을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은 좀 많은, 많은 변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은 아직도 이 봉제 쪽에는 다른 영역에 비해서 좀 열악합니다. 지금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면담자 : 그래도 뭐 옷을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갈 정도라고 하면 수요도 많고 그만큼 공급을 해주기 위해서 그랬었던 건데. 지금도 그런, 그거나. 구술자 : 지금은. 이게 옛 시절에는 내가 또 삼촌네 공장을 돌아가니깐. 인원이 한 삼십(30)명 이래돼요. 그래도 막 물건을 그때는 그렇게 장사들이 잘됐었습니다. 평화시장이라던가. 그때는 우리나라 가게가 여러 군데 있는 게 아니라 상가가. 그래서 내가 지금생각하면은 어설프게, 뭐 우리가 수요보다는 뭐 부족의 것들이 그렇게 그냥 나가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은 이제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수입도 많이 해오다 보니깐. 어떤 차이점이 있냐면은 소량 다품목. 근께 품목은 많아지고 적게 만들어서 이렇게 좀 비싸게 하는 고급품으로 변해 가는데 아직까지는 이렇게 그 동대문상권이 도매시장 상권은 그렇게까지 옛날보다는 많은 변화. 사람이 좀 충족, 따라가지를 좀 못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러니까 지금은 장사가 조금 옛날에 비하면 하늘과 땅차이고, 지금은 그래도 공장에는 창신동에는 공장이 수없이 많아요 지금도. 왜냐하면은 남대문 쪽에 있던 모든 공장들이 남대문이 장사가 안되니깐은 동대문 쪽으로 다 오게 있습니다. 그러니깐은 창신이 이쪽으로는, 창신동이 왜 공장서도 비싸고 공장이 없느냐고 그러면은 그쪽동네로 오다 보면은 상권은 가까운데. 시장하고 가까운데서 공장을 해야 빨리빨리. 물류비 절약되고. 그런데 이제 어떤 게 어떤 게 또 있느냐면은. 그저 사회자님은 모르실껍니다만은. 단,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세계적으로, 세계적으로 동대문상권에서 아침에 물건. 아침에 옷을 샘플을 가져와서, 샘플을 가져와서 그것을 디자인을 해서 디자이너 와서 그것을 샘플을 해서 그날 저녁에 물건이 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다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옷을 한 장이, 우스개소리로 그냥. 어떤, 어떤 잠바가 하나왔어요. 그 잠바가 날아왔다고 미국에서 갖다왔다 그래요. 예를 들어서. 인터넷에서 갖고왔다 그래요. 갖고 왔으면 그날 저녁에 원단을 구입해서 모든 부자재를 구입해서 그날 저녁에 옷을 팔 수 있게끔 나가는 게 그게 동대문의 창신동의 상권입니다. 이 공간들이. 면담자 : 아 대단하네요. 구술자 : 예. 유일하게. 그러니까 그 진짜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래서 멀리 상권을 해서 멀리 있어서도 안 되고 남한테 뒤처지면 안 되니깐. 그래서 이게 동대문이 좀 유명한 건데요. 이 동대문에 오면은 이쪽으로 오면은 우리 조합에 조합원들이 지금 한 오백(500)명? 오백(500)명 가까이 되거든요. 그러니께 이쪽으로 오면 옷에 대한 것에 되면 못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못 만드는 옷이. 그래서 쪼끔 그런 쪼끔. 면담자 : 굉장히 그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한 일 같은데. 말씀이 나오셔서 이제 여쭙는데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이사장님으로 지금 계십니다. 좀 전에 이제 조합원 말씀을 해주셨는데, 봉제협동조합이 언제 만들어졌고, 몇 개정도의 업체 혹은 몇 명 정도의 회원들이 구성이 돼 있고, 주로 하는 일, 협동조합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지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구술자 : 우리가 사실은 이제 그 조합이 형성이 되기는 이천(2000), 이천십이(2012)년? 이천십이(2012)년에 우리가 이제 조합을 설립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우리 조합이 형성되기 전에는 하나의 모임이 있었어요, 하나의 모임. 의류봉제 사랑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모임. 그래가지고 봉제하는 사람들끼리 이제 예를 들어서 차도 마시고. 면담자 : 친목을 도모하는.. 구술자 : 예, 친목을 도모하는 그런 모임이 있었는데. 이천십이(2012)년인가 그때 그 손학규 의원인가 어떤 분들이 그 심상정 의원들하고 오(5)인(人), 다섯(5)명만 뭉쳐도 그 조합이 노동조합이 형성이 될 수 있게끔 그런 법이 통과가 돼서 우리가 이제 서울시의 최초, 최초 조합의 제 일(1)호 조합으로 이제 등록이 된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면담자 : 아. 협동조합법이 개정이 돼서 그런 거군요. 구술자 : 예 협동조합법이 개정이 되어 가지고. 그래서 그때 그러면 조합을 형성해서 정식으로 한번 활성화를 하자 그래서 만들어서 그때부터 만들게 되었는데 그런데 우리는 조합을 만들어서 어떤 영업도 하고 그렇게 응? 이익도 창출하고 그러고 싶은데 일단 만들어놓으니깐 그러기가 좀 힘들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한도가 있더라구요. 지금도 그러긴 하는데. 회원의 지금의 그 회원이 지금, 한 정식회원은 이백팔십(280), 한 삼백(300)명이 되는데 여기서 이제 그 회비를 만(10,000)원을 받아서 생활도 하고 뭐 조합사무실에서 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공장들을 상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첫째, 이제 실장사라는 겁니다. 실. 실을. 실도 색깔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그것을 다 할 수는 없고. 흑백 검정하고 백색만. 봉제공장에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뭐냐. 커피에요 커피. 그렇지요, 그래서 이제 커피를 이제 우리가 그 믹스커피라고. 이제 그 우리가 하나(1)씩 그냥 타서 먹는데 봉지커피하나(1)에, 우리가 이제 슈퍼에 가서 사게 되면은 그게 백이십오(125)원인가 그래요, 하나에. 우리가 사먹을 때. 그러니깐 우리는 대량으로 사러 가면 현찰을 주고, 맥심에서. 내가 사올 때 백(100)원에 사오면 사십(40)원? 이걸 단가를 따져봤을 때. 그러니깐 요즘 조합원들한테 파는 게 백십(110)원이에요. 그러면 조합에서도 십(10)원 이익이고. 우리 조합원들도 십(10)원 싸게 사고. 그런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조합원들 위해서. 그런 일하고. 뭐, 쓰레기봉투라든지. 그냥 우리 조합원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을 뭐 대량으로 할 순 없지만은 어떻게 좀 그런 장사를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러고 이 조합이 생기면서, 저 안 해본 장사가 없습니다. 사실은. 면담자 : 조합차원에서? 구술자 : 예. 조합 차원에서. 하다못해 이 조합으로 조합원들이, 임원은 지금 오십이(52)명인데 임원도 오십(50)명인데 다 봉사직이에요, 봉사직. 저도 봉사고. 월급도 없습니다. 이것은. 뭐 회비만 다 나가고. 경조사 이런 걸로 오직 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전부다 시골출신들이 많잖아요. 다 농부의 아들로 많이 올라와서 고생을 하신 분들이라. 면담자 : 젊은 시절에? 구술자 : 예, 그래서 인쟈 지금도 뭐 시골에서 어머님이 살아계시고, 또 뭐 동생이 시골에 있고, 형님이 계시고 하다보니깐.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어따그러면 시골에서 인쟈 옛날에는 이런 게 없었었는데, 지금은 무슨 뭐 과일이 되겠다, 그러면은 이 과일을 좀 조합에서 팝시다. 그러면은 내가 일단은 조합도 어떤 영예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면은 시장에 가서 조사를 합니다. 조사를 하면은 사과 한(1)박스에 싼 것이 이만(20,000)원이다, 그러면은 우리는 인쟈 시골로 전화하기를 만 팔천(18,000)원에 주십시오. 대신 우리는 만 구천(19,000)원에 팔겠습니다. 그러면 인쟈 조합원들도 시장보다는 단돈 천(1,000)원이라도 싸고 우리도 또 천(1,000)원 남아야 되고. 그래,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한 달에 나가는 문자비만 몇 십만(100,000)원이에요. 돈 백만(1,000,000)원 가까이 나와. 한 달에 문자비만. 계속 문자를 뭐 남기고. 모든 조합의 일은 문자로 해결하거든요. 그런 게 있고. 이 창신동에서 우리 조합이 제일 크다고 소문은 나 있는데. 시골에서도 서울시에 등록이 되다 보니깐 일(1)호로. 그냥 뭐 많이 올라옵니다. 올라오기는. 문의도 많이 오고 그러는데, 옛날에 이 하여튼 우리 조합이 생기면서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도 합니다만. 정치인들 막 한없이 왔다가고. 서울시장님도 뭐 세(3) 번인가 왔다 갔는데. 그니께 뭐 이런 거 다 안하셔도 됩니다만. 정치인들이 왔다가봐야 와셨다 가봐야 우리한테 이익은 하나도 없어. 하나도. 그때만 확 도와주네, 장관님들 안 왔다온 장관님이 없다니깐. 산업부 장관님들 안 갔다 온 장관님들 없어요. 다 왔다가요. 그런데 뭐 실질적으로 뭘 도와주겠습니까. 우리는 뭐 우리 회비로 생활하고, 뭐 그거 뭐 있다 그러면은 다 인원들이 찬조하는 식으로. 이렇게 하니깐. 우리는 꼭 뭐 조합원이라서 그런다, 그런 게 아니고 이렇게 그 앞전부터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친목이 있기 때문에. 뭐 한다, 그러면 다 벌써로 솔선수선해서 앞으로도 도와주는 방향으로 지금도 그렇게 조합원들이 형성되고 있어요. 면담자 : 아니 말씀해주신 것 중 듣고 정리를 해 보니까는. 사랑방모임에서 이제 공식 협동조합이 됐는데, 봉제와 관련된 공동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되게 예를 들면, 누구네 집에서 시골에서 사과를 했는데 그 사과를 저렴하게 가지고 와서 조합원들끼리 좀 더 이익을 남기고 그 다음에 시골에서 그 농사짓는 분들의 편력 혜택을 위해서 그 여러 가지 생활적인 전반에 있어서의 협동조합의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것 같아서. 아 이게 되게 운영이 잘 될수록 서로 서로간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조금 들고. 구술자 : 그 내가 한(1)가지 내가 우리 조합이 생기기 전 까지는 요. 사실은 제가 이런 얘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천팔(2008)년돈가 이천구(2009)년도에. 그때 그 봉제인들을 위해 조합을 만들어주는 단체를 만들어주는 것도 사실은 서울시야, 서울시. 왜 서울시가 되냐. 뭐 서울시가 만들어라 그래서 만든 게 아니고요. 사실은 그때 이천구(2009)년돈가 팔(8)년도에 서울시에서 봉제인들 위해서 뭐 컴퓨터 교육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교육. 교육을 배워라. 저도 봉제인들 치고 컴맹 아닌 사람이 없어요. 다 컴맹이야. 다 어렸을 적 올라와서 가난한 시절에 살아서. 저도 예를 하나(1) 들면 은 집에를 딱 가면은 이 자식들이 콤피터를 하다가 아빠를 오면 은 싹 어떻게 바꿔버리고 없네. 그러면 뭐가 바뀌었는지 모르잖아요.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니까. 그래서 내 이천팔(2008)년도인가 서울시에서 그런 봉제인들을 위해서 봉제에 대해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제 사실은. 컴퓨터 교육을 여수에서 신설해줬어. 교육을 받아라. 가르켜줘라. 그래가지고 제가 알기로는 그때 내가 육백사십칠(647)번지, 우리 공장이 지금 창신 이(2)동 육백사십칠(647)번진데, 육백사십칠(647)번지에 있는 그 동료들을 내가 열다섯(15)명을 데리고 이제 여수로 교육을 받으러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교육 받을 때, 어떻게 했느냐. 요 봉제라는 계통은 그 늦게 끝나요. 언제나 일이.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그러면은 끝나는 시간이 몇 시냐, 아홉(9)시입니다. 그러니께 교육을 아홉(9)시부터 두(2)시간동안 열 한 시를 시켜주십쇼. 그래가지고 아홉(9)시부터 열한(11)시까지, 사실은 인쟈 교육을 받았어요. 일주일에 두 번씩. 그래가지고 인제 삼(3)개월인가? 마스터를 했어요, 이제. 마스터를 하는데 열다섯(15)명이 갔는데 아홉(9)명인가 마스터를 했어요. 아홉(9)명이 인쟈 끝났어요. 일곱(7)명 탈락하고. 바쁘니깐 못나오고. 아홉(9)명이 수료를 했어요. 수료한 사람이 맨날 오늘보고 내일보고 맨날 자주 보는 얼굴들이지만은, 이 수료증을 받았으니까 오늘부터 새로운 모임을 하나하자, 그 기념 삼아서. 했던 게 지금의 우리 조합이 형성된 겁니다. 그때 우리가 일곱(7)명인가 만나서 하는데 이제 너무 재밌게 하다보니깐 동네에서 그럼 나도 들어가자, 그 모임에. 하는 것이 육백사십칠(647)번지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이. 모임이 육사칠(647)번지. 육사칠(647)번지라고 동네사람들이 만나서 이천팔(2008)년도에는 서른(30)명 가까운 사람들이 만나서 이렇게 고기를 사다가 동네에서. 길에서 고기를 구워요. 지나가는 어른들께도 청소하시는 분들도 드시라하고. 각자 와서 그렇게 해서, 초창기에는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안전한 조합의 형성이라고. 그렇게 그냥 하고 있습니다. 면담자 : 사실 옹기종기 이렇게 쭉 모여서 같은 유사한 일들을 하시다 보니까 동질감도 많이 있을꺼고. 그러면서 친목이 다져지는 계기들이 그렇게 좀 모임도 되는 것 같은데. 제가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봉제라고 하면은 사실 뭐지? 뭐 재봉틀가지고 작업하는 거라고는 막연하게 생각을 하는데. 봉제도 혹시 뭐 여러 가지 세분화된 그런 업무들이 많으신지요, 아니면 그냥 통틀어서 봉제라고 하면은 동일한 일들을 하시는지요. 구술자 : 봉제 자체는 우리가 그 미싱, 그 기계를 가지고 옷을 만든다든지, 봉제일이라는 것은 뭐 가방을 만드는. 이런 게 기계를 가지고 만드는 자체가 나는 봉합한다는 자체가 봉제라고 생각합니다. 뭐든지 만드는 자체를. 면담자 : 아. 작품을 만드는 자체를... 구술자 : 예. 만드는 자체를. 옷을 옛날에 그 우리나라 힘들 때, 육십(60)년 칠십(70)년 힘들 때는 최고 잘나가는 것이 옷, 그다음에 신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 이렇게 형성이 약해져서 사향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직까지는 봉제는 이렇게 사회에서는 힘이 있습니다만은. 지금 배우는 입장들이 없으니깐 쪼끔 힘은 든 것 같고, 배우는 입장이 없으니깐. 우리 봉제조합모임이 하나 있는데, 매월 둘째(2)주 금요일 날. 아홉(9)시에 만나요, 아홉시에. 맨날. 뭐 그때는 꼭 조합의 의미가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니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천팔(2008)년부터 지금까지 만나고 있습니다. 한(1)달도 안 거르고 계속. 명절이 끼면 다음 달로 바꾸는 것으로 하고 그러고 있는데. 그 옛날에는 뭐 백삼십(130)명이 모이고 그래, 식당에서. 하는 게 이렇게 이렇게. 그런데 주변에 한 오십(50)명, 육십(60)명 이 숫자가 모입니다만은. 그 백삼십(130)명 모이고 육십(60)명 모임 중에서 최고로 중심에 서있는 나이 연령대가 어떻게 되느냐, 커트라인이. 육십이(62)년생, 육십삼(63)년생. 그러니깐은 지금으로 말하자면은 쉰다섯(55), 넷(4), 여섯(6) 이렇게 되겠죠. 이분들이 전부다 찾아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깐은 예를 들어서 육십구(69)년생, 칠십(70)년생은 찾아보기 힘들고, 배우는, 요즘 들어서 이제 젊은 층들이 한(1)명씩 나타나는 데는 있는데,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봉제를 지금까지 평생을 해온 사람 한사람으로 이게 언제까지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게 없어지지는 않겠죠, 인쟈. 뭐 일본이나 이태리 독일같은 데도 뭐 기본적인 건 남아 있잖아요. 남아있는데, 어쨌든 그 옛날에 활성화다 크게 여러 명 수십 명이 했던 것이 없어지다 보니까 좀 그건 찾기가 힘들 것 같아요. 면담자 : 그 말씀하신 그런 이제 봉제 산업이 조금은 사향길로 접어드는 이유 중 하나가 예를 들면 공장에서 대량으로 뭐 만든다 거나 혹은 뭐 중국에서의 저가? 구술자 : 예, 저가품목을. 면담자 : 이런 것들이 점점 더 많이 수입이 되고 하는데, 그런 것들의 영향이 사실은 좀 큰 편인가요? 구술자 : 그렇죠, 봉제 산업이 클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은 그 우리나라 예를 들어서 뭐 중매입건, 그러니께 쪼끔 이렇게 좀 중소기업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소공인들이고, 중소기업에서 우리나라에서 옷을 만들면은 단가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옷이 비싸지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쪼끔 더 시장물가가 더 비쌀 꺼 아니에요. 동남아보다는 중국보다는. 그러니깐은 이 기업인들은 옷을 싸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남아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깐은 우리들은 일감을 뺏길 수밖에 없고, 뺏길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앞으로 갈수록 그런 것들도 심해질 것이고, 지금 뭐 개성공단 없앤다해서, 없앴다해서 개성공단이 없어지니까 우리 동대문시장 상권들이 괜찮을 것이다. 그것은 아니에요. 아무그거랑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개성공단 없애고 조그만 중소기업들 어디로 가느냐, 전부다 동남아 쪽으로. 동남아 쪽으로. 그러니까 우리랑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 갈수록 그런 게 심화되지 않나 이런 생각 많이 하게 되요. 면담자 : 그러면서 이제 뭐 규모도 좀 소규모화 되고 뭐 이런 것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자료를 좀 찾아보다 보니까 예전에 봉제마을 전체를 놓고 보면은 원단을 자르는 것만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가 있고, 그다음에 뭐 예를 들면 뭐 바느질만 전문적으로 하는, 제가 잘 모르지만. 그렇게 공정이 있었다면 굉장히 세분화돼서 나눠져 있었다, 라고 하는데. 구술자 : 그 재단만 별도로 한다는 자체는 지금의 이제 그 소공연 센타가 생겨가지고 바쁜 공장을 도와주는 재단만 해주는 데가 있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근데 그 재단만 전문적으로 하는 데가 없고, 지금 우리 임원들이 다 있는 회원들은, 어떤 게 있냐 하면은 공장에서 재단을 해서, 재단을 해서. 각 외주로 뿌려요 외주로. 공장에서 다 소화를 시키는 게 아닙니다. 요즘은. 공장에서는 인원이 적으니깐 내가 오늘 옷이 오백(500)장이 들어왔어, 예를 들어서. 그럼 오백(500)장을 사람은 공장에 다섯(5)명 있는데 그러니까 소화를 못하잖아요. 가게에서는 요구를 하고. 그럴 땐 어떡하느냐, 그 아까도 얘기했지만 구백이십(920)개 중에서, 중에서 그 집에서 하시는 부부들이 많아요. 부부들이. 그러니까 뭐 아저씨가 뭐 회사 다니다 그만두시고 뭐 부부끼리 하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시다 그만두시고 부부끼리도 있고. 공장을 하다가도 그냥 에이 나 공장은 힘드니깐 우리 애기엄마랑 와이프랑 둘이 해야지 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면은 그런 사람들은 전부다 갖다 오도바이로 실어주는 거예요. 오토바이로. 그래가지고 그걸 끝나는 걸 다시 수거해 다가 가게로 이렇게 마무리 짓고 댕기는데, 각 공장마다 어떤 게 있느냐. 토탈집도 있겠지마는. 면담자 : 토탈이라고 그러면 이제 시작부터 끝까지를 다..? 구술자 : 예, 바지부터 아 예를 들어서 코트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다 만든 집도 있겠지만은, 또 어떻게 되냐 하면은 단품목.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도 평생을 바지만 해왔습니다. 바지. 숙녀복 바지만. 그러면 또 숙녀복 치마만 하는 사람 따로 있어요. 그다음에 뭐 잠바하는 집도 따로 있고. 그렇게 각 분야가 다 있습니다, 이게. 그러다보면은 그 분야에서는 최고라고 볼 수 있겠죠, 이제 그 분야에서는. 그 분야에서 옷을 몇 십 년을 같은 게 같은 것을 해오니깐, 딱 보면은 아 이것은 어느 정도 돈도 들어가야 되고 어느 정도 뭐 단가풀이가 나오겄죠, 이렇게. 이제. 그렇게 그런, 그런 세분화가 돼 있습니다, 이렇게. 근데 뭐 재단만 하는 데가 따로 있고, 봉제만 만드는 데만 따로 있고. 이 만드는데 따로 있다는 것은 가정집에서 한다는 거. 그게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그것은 그거는 자를지를 않잖아요. 재단할 수가 없어요, 좁아서. 조그만한 이런 가정집에서 하는 것이고, 주차장 같은데 뭐 네(4)평 이런데서 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이번에 재생사업하면서도 서울시에서 그런 것도 좀 도와주라 했더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게, 그런 분들도 이 동대문상권이 일이 있을 때는 왕창 있고, 없을 때는 똑 끊어져요. 그런데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다 듯이 옛날에는 내가 팔십년도 그때는 봉제가 아까 얘기했지만 한 달에 일요일 날 안 쉬어도 다 바빴는데, 이제 갈수록 일하는 날짜가 줄어들어요.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느냐. 지금의 이천십칠(2017)년도에 와서 내가 평균을 했을 때, 이천십육(2016)년으로 봤을 때, 육(6)개월을 성수기처럼 일하면 많이 합니다. 육(6)개월은 놀다시피 해요. 그러면 그 육(6)개월 그 노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육(6)개월 일하는 시간에 애들 월급도 줘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럼 안 맞을 꺼 아니에요 이게. 육(6)개월 일해서 육(6)개월 어떻게 돈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그냥 도급제(都給支拂制)라고. 각 공장마다 도급제(都給支拂制)라고 도급제(都給支拂制) 그게 아니라. 제품에서는 개꽁이라고 그러는데. 개꽁. 그러니까는 그 하는 대로, 내가 옷을 만드는 대로 먹는 거 입니다. 그러면 옷 한 장에 뭐 내가 칠천(7,000)원을, 한(1) 장 만드는데 칠천(7,000)원이다, 그러면 열(10)장을 만들어야 칠만(70,000)원이다, 그러면 백(100)장 만들면 칠십만(700,000)원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이제 개꽁, 개꽁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야만이 주인도, 주인도 뭐 그것이 이제 왜 그러냐면 여기서 여기까지만 뭐 해라 한다, 그러면은 죽든 살든 하잖아요. 뭐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그러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월급쟁이 회사는 안 맞는 거예요 도저히. 또 뭐 요즘은 뭐 노동부에서 시간도 뭐 지켜라, 뭐 여덟(8)시간해라 이런 식으로 해서 안 맞아요, 도저히. 단가는 이렇게 그 단가가 아니고. 월급을 줄 수가, 월급이 안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그러니까는 자동으로 서서히 이렇게 개꽁, 도급제식으로 천천히 변해가는. 저는 지금은 공장이 만약에 열(10) 개가 있다. 그러면 한군데만 월급쟁이가 몇 명씩 있고 나머지는 다 그런 식입니다. 면담자 : 물량에 따라서 고객할당 그 물량만큼. 구술자 : 예, 예. 그러니깐 이제 예를 들어 백(100)장을 잘랐으면은, 뭐 백(100)장을 남을 주게 되면은 뭐 내가 옷 한(1) 장에 천(1,000)원씩만 나는 먹는다, 그럼 나머지는 뭐 하는 사람이 먹게 되고, 그런 식이 되는 거죠. 면담자 :그 일하는 방식이나 이런 것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들 변해오는 것 같아요. 말씀해 주시는 게. 그게 아마 결국은 동대문을 찾는 이제 의류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느냐 적어지느냐 이거에 따라서 영향이 있을 텐데, 그러면 주로 사실은 고객들이라고 하면은 동대문에서 의류판매를 하시는 도소매하시는 분들이 주로 고객들이시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동대문에서 도매, 그러니까 소매는 팔아봐야 몇 장이나 벌겠습니까. 근데 인쟈 여기서 도매로 해가지고 옛날부터 그런 루트가 다 정해졌습니다만은, 대구는 뭐 서문시장으로 내려간다, 뭐 예를 들어서 뭐 부산 서시장으로 내려간다. 이런 게 있을 꺼 아니에요. 광주 어디로 내려간다. 근데 옛날에는 제가 알기로는 각 그 각 매장에 주인들이 직접 강남버스를 타고 내려왔는데, 요즘은 그 사입자가 다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입을 하는 사람은 별도로. 그러니까 이거 뭐 대구에서 왔다하면 대구에 사입하는 사람 싸악 사입을 해서 여러 집 것을 뭐 대구로 내려간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하는데. 지금도 이렇게 인쟈 매장 주인들이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고. 옛날에는 몇 년 전만해도, 호황기 때는 이게 막 이렇게 봉제가 제품이 호황기 때는. 관광버스가 댈 데가 없었어요. 진짜로 시장 앞에. 근데 지금은 그 관광버스가 찾기가 힘들어, 새벽시장에 우리가 인제 어쩔 때는 평생을 봉제를 했기 때문에 제품을 했기 때문에 어쩔 때는 새벽에 나가봅니다. 시장 나가보면 옛날에는 진짜 시장이요, 그 별천지야 별천지. 그거 막 새벽 한 세(3)시에서 네(4)시에 가면은 이런 데가 있는가 할 정도로 막 노랫소리 나오고 막 사람이 막 움직이고 생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딱 가보면은요. 옛날 같지가 않고 착 이렇게 쳐져있어요. 이런 거 보면은 참 제품의 한 사람으로써 참 그게 보면 안 좋습니다. 이게 그냥. 막 생기가 있고 해야 되는데 강남버스도 적고, 그만큼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에요. 갈수록 인자 그런 거죠. 예를 들면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저 같아도 그래요. 저 같아도. 제가 봐도 내 자식도 옷을 살라면 시장으로 안 나옵니다. 백화점 간다던지 인터넷으로 해가꼬 딱 해부린다던지. 그러니까는 시장에 생기가 없을 수밖에 없어요. 몇 명 사입자들 몇 명 와가꼬 몇 개나 사가겠습니까. 옛날에는 막 개인이 올라와가지고 수많은 사람이 들끓고 그랬는데. 지금은 몇 사람이 와서 물건을 딱 딱 띠어가고. 그러다 보니까 시장이 많이 침체가 되고 그렇죠. 그런 걸 보면 참 상인들하고 회의도 많이 하는데 안 좋아요 제 입장에서는. 면담자 : 근데 그 이거는 뭐 저 개인적인 저의 생각일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베트남이든 동남아든 중국에서 만드는 옷과 우리 그 창신동에서 만드는 이 옷이 이렇게 똑같이 매대에 있다면 저는 우리가 만든 옷을 좀 더 주더라도 사고 싶은데, 고렇게 그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그 접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백화점이나 인터넷을 가면 대부분이 다 그냥 중국이나 이런 뭐 동남아에서 오는 옷들인 것 같은데. 구술자 : 그러니까 그 동남아에서 오게 된 것도요 그냥 결과적으로 저도 무역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은, 예를 들어서 베트남에서 물건을 옷을 만들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이 가서 만들 거 아니에요? 그래가지고 가가 뭐라고 써 있냐면은 메이드 인 베트남, 차이나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인자. 그대로 라벨을 달고 팔기는 파는데, 예를 들어서 뭐 우리나라 유명한 영흥무역도 베트남에서 만들어 오지 않습니까? 그 노스페이스 다 만들어 팔잖아요? 그런 것을 하다보면은 그 그쪽 동남아에서 만들어 오는 물건이 뭐 우리나라 물건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실제로 비교를 해보면은 괜찮게 옵니다. 그러니까는 우리나라 사람이 가서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가서 다 검열을 해 오것죠.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안 하는데 대신 단가가 싸거든요. 저 같아도 예를 들어서 가위를 하나 사는데 한국 것이 천(1,000)원이고 동남아 것이 오백(500)원이다, 그러면 한국 껄 딱 사면 좋은데 사람 심리는 절대 안 그렇습니다. 돈 앞에서는. 싼 것을 사게 돼 있어. 그래 그러면 아 그러면은 다 우리나라, 우리나라 꺼만 다 사게 되면 또 어떻게 우리나라 존재하겠습니까만은. 면담자 :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고요. 창신동 일대에서 일하시는 많은 봉제인들을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단위 소규모 단위들이 많다고 하는데 남녀비율로 치면 여성분들이 더 절대적으로 많으시니까, 구술자 : 그렇죠, 그렇죠. 여자. 옛날부터 봉제는 여자분 들이 많습니다. 여자 분들이. 소, 소공의, 그러니까 인자 예를 들어서 뭐 오(5)인 미만의 공장은 저도 인자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만은, 봉제하는 사람들은 다 부부가 해요. 부부가. 저도, 저도 애기엄마가 공장에서 미싱을 하고 있고 저는 재단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러니까는 모든 부부는 그런다고 보시면 되요. 인생은 뭐 속된 말로 뭐 비슷해야 만나고 끼리끼리 만난다고 와이프는 미싱을 했을 것이고 나는 재단을 해 가꼬 거기서 뭐 사랑도 하다보니까 이렇게 인자 가정을 이루고 살았겠죠. 그러다보니까는 배운 기술이 그거라서 둘이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맞벌이. 그래서 제가 지금도 이 봉제를 한 사십(40)년 동안 해오면서 제일로 인터뷰도 많이 해봤습니다마는 제일로 내가 옛날 과거를 얘기를 하면은 지금도 눈물 날 때가 있어요. 눈물 날 때가. 면담자 : 저도 계속 여쭙고 싶었는데 가장 어려웠던 순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일에, 일에 대해서는 월급을 받고 하니까 옛날에 월급생활도 했을 것이고 예를 들어서 공장도 뭐 일찍 했겄죠. 근데 제일로 힘들었던 게 뭐냐면 애들이 여섯(6), 다섯(5), 일곱(7)살 먹었을 때, 큰애라든지 둘째가 남에 아빠들은 뭐 저 일요일 날 빨간 글씨라든지 하시잖아요. 왜 아빠는 꼭 이럴 때 나가? 그럴 때. 우리는 이 지금도 그렇습니다. 공휴일이라는 자체는 없어요. 우리한테 오로지 일요일. 일(1)년에 쉬는 것이 명절 때. 구정, 추석, 휴가, 신정. 딱 이거 정해놓고는 이 뭐 한글날은 뭐 대충 이런 것을 우리하고 절대 안 맞고요. 뭐 어떻게 보면 그럴 때 애들이 인자 지금은 일요일 날 이렇게 쉬지만은, 옛날엔 일요일도 없을 거 아닙니까, 재봉 할 때. 그러면 무조건 나가는 거야, 무조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러면 애들이 그런 얘기 했을 때 참 눈물 많이 났죠. 옛날엔. 면담자 : 가슴 아프셨을 것 같네요. 구술자 : 가슴이 무척 아파요. 왜그냐면 지금도 그래, 지금도. 내가 애들한테 인자 얘들이 지금은 큰애가 서른두(32)살 스물한(21)살 먹었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만은, 그 옛날 과거를 생각하면은 진짜로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왜 내가 직업을 이걸 선택해 버렸을까? 그랬단 말이여. 근데 그러다보니까 뭐 참 내 자신이 어찌됐든 한 우물을 파고 지금도 재봉을 하고 있으니께. 이제는 친구들한테도 하는 얘기가 있죠. 그래, 느그들은. 공무원 친구들도 만나고 회사원 친구들도 만나는데. 어쩔 때는. 그 친구들은 또 부러워하기도 해요 저를. 너는 정년도 없잖아. 사실 정년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뭐 칠십(70) 드신 분들도 일하고 계시고 주위에서, 아, 지금도 있어요, 주위에서요. 우리 선배님들. 그런 분들 많아요. 그래서 그 제일로 에로점이 뭐냐 하면은 나이가 드니까 눈이 안 보이잖아요. 바늘귀가 잘 안 보여요. 바늘귀. 그래서 등불을 켜놓고 돋보기로 보고, 하고 있는데. 그것만 보이면은 뭐 기술이니까 맘대로 써요, 자기기술.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뭐 지금도 젊은 측이라던가 우리 봉제 일단 들어 오면은. 지금 그런 시대는 지났지만은. 먹고 이렇게 사는데 돈에 구애를. 많은 돈은 못 벌지만은. 구애를 받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은 일주일 일하면은 현찰이 바로 나오거든요. 뭐 통장으로 돈이 들어온다던지. 그러니까는 바로바로 융통이 되니까는 그런 게 많은 돈을 또 투자하는 것은 아니고. 봉제는. 공장은 또 봉제 투자하는데 한 사천(4,000), 사천만(40,000,000)원만 하면은 이 봉제 공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대신 기술이 있어야 되것죠. 기술이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기술이 있는 사람한테 배워서 젊은 측들이 좀 그랬으면 쓰겄어요. 그래서 좀 힘들어요. 면담자 : 연관해서 좀 여쭙고 싶은 게, 아까 말씀하셨지만 일요일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시면서 고생이 많으셨고 사실 자녀분들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일일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사십(40)년 동안 한 길 꿋꿋이 오시게 되는 요 과정 속에서는 보람을 느꼈다거나 아 정말 내가 이 일을 잘했구나, 혹은 잘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셨던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구술자 : 그렇죠. 그동안에 긍께 이제 그 열심히 살다보면은요. 내가 중간에 내가 제품을 잘 배웠구나, 이런 것은 사실은 힘듭니다. 옛날에는. 왜냐면은 와이프 만나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살다보면 누구라도. 우리 봉제뿐 아니고 누구나. 내가 알기로는 그 유명한 뭐 이렇게 대기업에 다녀도 다들 힘들어서 잘 들어왔다! 이런 것은 드물다 생각해요. 우선 다 현실에 그냥 적응하고 사는 거에요. 그냥. 열심히 살다보면 지금은 인자 내가 나이가 먹고 애들이 커가고 그냥 어느 정도 내가 성년이 어른이 되다 보니까 아, 그래도 나는 옛날보다 열심히 한 우물만 판 것이 한 일만 해온 것이 요즘은 보람을 느낀다. 뭐 아까 그랬잖아요. 뭐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뭐 살아온 거 누구한테 터치 받는 것도 아니고 나만 열심히 살아 온 것만큼 대가도 받고 애들도 자동으로 다 컸고 그래서 거기까지 뭐 옛날에는 그랬죠. 옛날에는 일요일 일하러 나가고 할 때는 그런 괴로움을 느끼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고 그냥 몇 십 년을 적응하다 보니까 이게 또 제일 좋은 것 같고 그러고 살아요. 면담자 : 지금도 새로운 봉제일을 배우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이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예전에 신문기사나 이런 것들을 보면 공제일을 하면 시다로 몇 년하고 몇 년하고 단계 별로 절차들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도 그런 것 들이 있을까요? 구술자 : 지금 우리가 생활 할 때는 최소한도 제일 처음에 남자는 들어가면 재단 판, 재단하는 데 가야하고 여자들은 미싱을 해야 합니다. 원래 그게 어쩌다 한 번씩 남자 미싱사도 있긴 하는데 옛날엔 그게 딱 정해진 케이스처럼 그게 있었어요. 남자는 들어가면 옷을 다린다던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 재단 원단을 날른다던지. 이런 것을 했었으니까 그래도 저도 삼촌네 재단 보조로 들어가서 재단사가 되기까지는 칠(7), 팔(8)년 걸렸것죠. 학원도 다니고 해가지고 그런 경력을 쌓아야합니다. 면담자 : 자격증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가요? 구술자 : 자격증이 지금 있는 것은 아니지만은 그런 자격증도 주위에서 아카데미 같은데서 만들고 합디다만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 다음에 미싱을 하는 시다들 시다 생활하고 미싱이 되기까지도 삼(3)년에서 오(5)년. 기본이에요. 기본. 그만큼 밑에서 고생을 해가지고 올라가야 기술자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미싱을 배우고 싶어도 마음대로 배우는 게 아니에요. 낮에는 미싱사 밑에서 열심히 해야 돼요. 같이. 그래야 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다음에 배울려고 새벽같이 나와요. 그 미싱 한 번 밟아 보기 위해서 그래서 배워야 해요. 하나씩 하나씩. 그래서 미싱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미싱의 부수적인 거 있지 않습니까? 오바로크 라던지 그런 게 있습니다. 밑단을 쳐준다든지. 그런 것들 다 배우는 거예요. 서서히. 그러면서 미싱을 그냥 이렇게 계속 밑에서 미싱사 밑에서 시다를 하다보면 옷이 어떻게 순서가 돌아가는지 자동으로 배워야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옷을 내가 우선 바지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바지는 어디서부터 처음에 박아야하나 어디서 해야 되는가 이거 알아야할 거 아니에요. 그런 것을 자동으로 밑에서 배워야 해요. 그런데 지금 시대는 제가 교육생도 많이 써보고 살았습니다만은. 지금 하고 있습니다만은,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 내가 좀 미안하긴 한데 젊은 친구들한테는 안 맞아요. 와서 처음에는 며칠 해봐. 내가 요즘 젊은 친구들 실업자가 뭐 어쩌고저쩌고 하잖아요. 우리 하고는 완전히 동 떨어진 그런 얘기입니다. 실업자가 아무리 많아도 봉제에는 더 없어요. 맞죠? 근데 어쩌다 한 명씩 있다는 건 뭐냐. 지금 저도 서른한(31)살 먹은 애가 애 둘(2) 낳아 놓고 지금 제 밑에 와서 일을 배우는 데 진짜 친 자식처럼 가르쳐 줬습니다. 내가 앞으로 많이 해 줄 것이고 걔한테. 그 보석이야 보석, 우리한테는. 어쩌다 하나씩 나타나니까 그러죠. 내가 너한테는 모든 것을 올인 해주겠다. 약속하마. 그 대신 공짜로 한 게 아니잖아요. 월급도 주고 하면서. 많은 월급을 줄 수는 없죠. 그러나 이거 배워서 니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금만 아저씨가 해주마. 그러니까 한 번 해봐라. 지금 인자 한 육(6)개월 됐나?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쌓아 가는 거예요. 기술도 배워가면서. 하고 있는데. 어쩌다 그런 한 명들이 있지. 대충 와서 보면. 우리 아까도 얘기했지만 봉제가 열악하다니까. 생활 자체가. 조그만한 공장에서 아침 아홉(9)시에 출근하고 저녁 아홉(9)시에 퇴근합니다. 이게 기본이에요. 누가 견딥니까? 요즘 젊은 애들은 가부러요. 그러니까 직장생활 회사 뭐든 기업에 들어가면 아침 아홉(9)시에 출근해가꼬 저녁 여섯(6)시에 끝나고 여덟(8)시에 끝나고 이것은 우리에게 꿈같은 얘기니까 우리하고 안 맞으니까 생활방식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월급을 많이 줘가꼬 쓰면 또 괜찮죠. 아니 그런데 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니까 많이 줄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하고는 방식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동안 평생을 배워왔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첨에 하라고 하면 못한단 말이죠. 그래서 어쩔 때는 학교를 뭐 설립해서 그런 사람을 많이 가르쳐내고 해야 되지 않것냐. 디자인과는 있어도 그 모노타입 가면은 디자인과는 있어도 봉제과는 없어요. 그러니까는 그런 좀 에로점이 있긴 있습니다. 면담자 : 그래도 인제 보석 같은 젊은 봉제인들이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니까 구술자 : 예, 그래서 좋죠. 내 주위에서 어떻게 하냐 하면은 내 친구도 아들을. 아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어요. 어쩌다 하나씩. 그래놓고는 예를 들면 아들이 조그만한 어딜 와서 알바를 한다든지 나이나 먹어 가는데 그런 알바를 뭐할게 있습니까? 그럼 차라리 기술을 배워라. 그럼 와서 월급을 줄 테니까 얼마씩 해라.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대견하죠. 진짜 가서 막 해주고 싶고 그렇다니까 그런 사람들은 젊은 측들이 그러면은. 그러면서 이렇게 조금 봉제가 살아나야 될 텐데 살아나야 할 텐데 그냥. 뭐 긍께 그 하루 종일 일한다는 자체가 쉬운 것도 아니거든요. 면담자 : 요즘에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쉬는 것도 젊은 층에서는 중요하게 생각을 하다 보니까 전반적으로 좀 개선이 되면서 같이 봉제 산업도 살고 젊은 새로운 인력들도 좀 수급이 되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좀 들고요. 요즘에 언론에도 많이 나오고 굉장히 많이 언급이 되고 있는데 이 창신동 일대에 봉제 산업뿐만이 아니라 젊은 작가들 예술가들이 많이 와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동네가 많이 변화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구술자 : 창신동이라는데 가요. 종로구가 종로구에서 종로구라는 데는 우리나라 수도권에서 중심입니다, 중심. 그런데 창신 일(1), 이(2), 삼(3)동이 참 그 낙후 되었다고 할까요. 너무 오래된 옛날 적으로 되어 있잖아요. 사실은 그 이명박 시절에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시장할 때 시장하실 때 저희가 뉴타운으로 선정이 되었어요. 선정이 되었는데 뉴타운이 될라고 하는데 여기서 창신동이 내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합니다만은 건물주들이 반대를 했어요.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반대를. 왜 반대를 했느냐 창신 이(2)동에서 내가 삼(3)층짜리 주택을 이렇게 하나의 건물 오십(50)평짜리인데 대지가 오십(50)평짜리인데 가지고 있고 한 달에 세가 사백만(4,000,000)원 나오는 데는 창신동밖에 없어요. 공장지대로. 상권을 구체적으로 인정 해 주는데, 없애버리니까 건물 주인들이 어디 가서 그 돈을 옛날 돈으로 삼(3)억 얼마 주고 그 돈을 세를 받겠습니까? 안되니까는 반대를 해가지고 그냥 무산이 되는데 어떻게 되냐, 하다보니까 어떻게 되냐,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여기서 우리 종로구청에 계신 구청장님 김영종 구청장님께서 인자 그런 것도 있지만은 서울시도 그렇고 재생사업을 인제 그대로 놓고 우리가 재생사업을 해가지고 재생 도시를 만들자.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초창기에 제가 재생 사업의 일원으로 뛰어들었고 그 국토부 뭐 심사위원들 다 서울시청에서 오셔가지고 피티(presentation)하고 그랬었어요. 앞에서 일원으로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후회를 많이 합니다. 왜 하느냐. 우리가 지금 말하자면 서촌 북촌 종로구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가격이 지금 많이 올랐습니다. 건물주들은 좋아요. 언제든지. 돈 있는 사람들은. 올랐는데 내가 인자 우스갯소리가 지금도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인사동을 가봤을 때 인사동을 가봤을 때 인사동 어떻게 변했습니까, 옛날엔 인사동 저도 친구들이 많아가꼬 막 요정 같은 거 있고 그럴 때 옛날에 고가 미술품 일(1)층에 쫙 있어가지고 그때 좋았어요. 보기도. 그러면서 살리기 위해서 인사동을 새로 개발한 걸로 알거든요. 지금은 어떻게 됐느냐. 인사동 가보면 고가 미술 파는 데는 구석 데기 어딜 가나 찾기도 힘듭니다. 다 커피숍 무슨 아이스크림 집 뭐, 뭐, 뭐 생판 보지도 못한 이런 것이 다 생겨요. 술집 뭐 이렇게 음식점. 이런 것만 살아가꼬 길거리 나오고 살아가거든요. 창신동 재생사업이 생기면서 내가 왜 후회를 하냐하면은 처음에는 재생 생긴다고 하니까 공장이 이대로 살고 할까봐 좋을 것 같으니까 처음엔 인쟈 그렇게 했었어요. 했는데 딱 해놓고 삼(3)개월인가 사(4)개월 지나니까 조합원들한테 연락이 오는 거예요. 전화로. 지금도 와요 지금도. 어떻게 오느냐. 재생사업이 된답시고 공장이 그대로 놔두고 있으니까 건물 주인들이 세를 올려요, 세를. 그러면 내가 예를 들어 공장 하나에 백만(1,000,000)원이 있었어. 다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은 백만(1,000,000)원이 있었는데 느닷없이 백이십만(1,200,000)원, 백오십만(1,500,000)원 주라고 하면 공장 하는 사람이 얼마나 벅차겠습니까. 그라믄 나 원망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 뒤로부터는 재생 사업에 일체 손을 떼어 부렀습니다. 제가. 나가지도 안하고 회의에서 오라그래도 안 가고 근데 재생 사업을 하면서 그런 것이 에로 점들이 있는데 단 한 가지 어떤 게 있냐, 아까도 얘기 했지만은 외부에서 와서 조그만한 그 서울시의 사업을 따서 예를 들어 뭐 창신동을 예쁘게 꾸민다, 어떻게 해본다. [공공미술] 예, 공공 같은 거 뭐 이렇게 공공 공간이라든가 이런데 해본다. 그런 게 있거든요. 우리 봉제 하는 사람들은 다 태반이죠. 창신동은 봉제가 살아야 전체가 커요. 봉제 앞으로 칠십(70) 몇 억인가 편성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우스갯소리로 그냥 봉제인들한테 그냥 이렇게 만약에 지금에 대통령께서 내가 당신에게 뭐를 도와줄까 하면은 저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할 줄을 몰라요. 뭐를 도와주세요, 못해. 그렇다고 현찰을 주세요. 그러면 주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안되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는 칠십(70)억이 편성이 되었어도 이것을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누가 끌어주는 사람도 있어야 되는데 그런 일이 좀 희박스럽고 제 입장에서도 그런 걸 하기가 힘들고 저도 공장을 지금도, 지금도 공장을 하고 있어요. 저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아까도 얘기 했지만 이사들 지금 뭐 일(1)호선 공사 중이라고 하고 있는데 재생 사업이 생기면서 공장세가 많이 올라가고 내가 정치 그 하시는 분들한테 몇 분 오셨길래 내가 구청장님께 그랬습니다. 세액 좀 안 올라가게 해 주세요, 저희한테는. 그러니까는 관광특구를 하면 좋다는데 내가 그 어떻게 됩니까, 그게. 그렇다고 그게 구청장님도 그러시더라고요. 뭐 누구한테 물어봐도 그래. 그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세를 못 올리게 터치를 못 한다는 거여. 그럴꺼 아닙니까, 내가 알아서 하는데 주인이 알아서 하는데 어떻게 하냐, 이 말이요. 그런 애로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창신동의 아까도 얘기했지만 공장이 그 세가 올라가면 없어져야 되는데 안 없어지는 건 뭐냐 우선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시장이 가까우니까 나갈 수가 없어. 올려주고라도 해야 돼 내가 힘들어도 그게 인자 우리 최고의 지금 저런데 내 그 아까도 얘기했지만 젊은 층들이 와서 꽃을 가꾸고 벽화를 그려주고 우선은 좋겠죠. 그러나 우리한테 실질적으로, 실질적으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것은 딱 그렇게 큰 것이 안 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뭐 정부에서 우리 세금을 가다가 이럴래? 이렇게 추산을 해왔어. 예산을 따 왔어. 따 와가지고 자기들이 했으면 자기들 월급도 가져가야 할 거 아니에요. 가져가고 뭐 하면 뭐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게 추산이 지금도 봉제 거리라 해서 우리 있는데 만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역사박물관도 생기고 역사박물관이 인자 또 거기도 역사박물관 또 거기 운영위원 나도 들어가 있어요. 제품을, 봉제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같이 이렇게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 있는데 역사박물관도 그 서울시에서 인자 운영을 하겠지만은, 하겠지만은 좀 앞으로 변함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저번에 회의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냥 아무리 공무원들은 제가 알고 있는 공직에 계신 분들은 원리원칙을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야 되고 원래원칙(원리원칙)대로 나가야 되요. 뭐든지 하나(1), 둘(2) 순서대로 근데 그 뭐 일(1)층에 뭐 일(1)층에다가 주차장을 만들고 뭐 거기다가 무슨 판매 뭐 하는 식으로 한다고, 이렇게. 나는 말 그대로 역사박물관이라 하면은 뭐 꼭 그 나중에 인자 그 회의할 때 얘기하겠습니다만은 뭐 살아있는 박물관 그런 것을 원하는 거예요. 미싱을 만드는 봉제를 하는 과정도 관광객들에게 보여야하는 것이고. 그래서 누가 근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할라 하겠어요. 유리로, 유리로 해놓고 할라 하겠냐고요. 어떤 사람이. 그 대신 거기다 특혜를 줘야겠죠. 어떤 특혜를 주면은 할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공모를 하면 되니까. 대신 유리를 막을 줄 테니까 관광객들이 와서 쳐다봐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고 하십시오. 이럴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 한 번 지금 운영위원들한테 내가 얘기를 해서 그렇게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고. 그 다음에 인자 젊은 각 그 뭐 아트브릿지라든지 뭐 그런 게 많이 있어요. 이쪽에. 내가 옛날엔 같이 어울리기도 했었는데 그것이 우리하고는 봉제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잖아요 관련이 봉제거든. 왜 그러냐면은 우리는 봉제라니까 수 백 개가 있는 공장들을 하는 봉제인들이에요. 실질적으로 그러니까 우리한테 이익이 된다면 하것는데 실질 눈에 보이는 이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이 나타난 것은 뭐였느냐. 이천팔(2008)년도인가 이천구(2009)년도에 지금의 그 전순옥 의원님이라고 옛날에 전태일 열사 동생 분께서 그때 그 연단기 사업이라고 있었어요. 노동부의 안전 공단에서 주는 연단기 사업을 했던 게 우리한테 보템이 많이 되었고. 근데 지금도 올해 들어와서 그것 마저도 몇 년이 지나다 보니까 그 뭐땜에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올해는 옛날에는 칠십(70)퍼센트(%)를 거기서 해줬는데 지금은 오십(50)퍼센트(%)로 깍인다고 그러대요. 깍이면서 기계가 비싸요. 기계가. 깍이면서 내년에는 없어진다는 말도 많고. 불안하기도 하고. 또 환경지원사업이라고 서울시에서 하는 거 뭐 공장 꾸며주는 거 있습니다. 전등도 LED로 갈아주고 하는 거에요. 그것도 인자 한 삼백만(30,000,000)원인데 자체 부담 십(10)퍼센트(%)해서 뭐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실질적으로 다 보탬이 되죠. 현실적으로 왜 그러냐하면. 그러고 또 뭐 어느 미싱이 새로 나왔는데 우리가 막 우리 가난한 사람들 아까도 얘기했지만 가난한 사람들 막 뭐든 새 걸 사고 싶은데 마음은 굴뚝같죠, 누구든지. 살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돈이 들어가니까. 근데 난 먹고 살아야되는데. 그럴 때 정부에서 어떤 이번에 그게 인자 나올라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지원을 이렇게 해주고 몇프로(%) 해주고 저 기계를 살 수 있게 해준다면은 그러면은 어느 누구든지 사겠죠. 그러면서 변화가 있지 않겠냐 이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이 조금 맞아 떨어지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면담자 : 말씀하신 것이 종합적으로 창신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지원활동이 필요한 거고 그를 통해서 시민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뭐 상권도 활성화가 되고 뭐 이런 구체적인 사실의 큰 그림의 그런 조언을 해주신 것 같아서 저도 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고 이제 거의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이 창신동 봉제 마을 봉제 활동 조합이 당장은 없어지진 않을 거고 없어져서는 안되는 것이잖아요.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 나가야된다라면 아까 말씀해주신 것들을 포함해서 뭐 이제 좀 서울 시민들 혹은 이 영상을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좀 이 창신동을 알아줬으면 좋겠는지 하는 게 좀 궁금합니다. 구술자 : 글쎄요. 그 우리는 평생을 옷만 만들어 온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지금도 옷을 만들고 있고 근데 인자 단 한(1) 가지 우리 입장에서는 일이. 일이 꾸준하게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쉬는 날이 좋고.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일(1)년에 육(6)개월 일해가지고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조금 더 많이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원해요. 지금도 비철이 벌써 접어들어 가지고 내 주위에 노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 지금 벌써 비수기] 지금부터 벌써 비수기가, 비수기가 지금부터 비수기가 들어가면은 팔(8)월말까지 뭐 칠(7), 팔(8) 구(9)월초까지 뭐 이렇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겨울 또 봄 뭐 또 이러다보면 육(6)개월까지 뭐 지금도 비수기에요. 비수기라고 해서 완전히 손을 놓고 노는 것은 아니지만은 한 것도 없이 밥만 먹고 돈을 못 번다 이 말이요. 그러면 뭐 예를 들어서 뭐 많을 때 벌어가지고 이렇게 메꿔주냐? 그것이 안 된다, 이 말이죠. 뭐 지금은 인자 비수기 시기가 돼요. 조금씩 먹고 살고. 어쩔 때는 월급도 못 줄 정도로 힘든 그런 시기가 된 거죠. 나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이렇게 먹고 사는 것도 뭐 라면만 먹고 살고 이런 게 아니고 생활비도 들어가야 되고 그것이 충족하지 못 한다는 거죠. 그런 것이 조금 힘들고 앞으로 인자 그런 쪽에서는 우리가 살기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도 인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조합에서는 봉제가 활성화 돼야해, 활성화. 그래서 인자 정부의 무슨 뭐 인력도 이렇게 할 수 있게 그런 길을. 제가 어떻게 이렇게 딱 해 주십시오, 를 못 하겠어요 이렇게.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길도 좀 열어주시고 그 다음에 일도 이렇게 일감 많게 장사도 좀 잘 되겠금. 뭐 중국에서 들어오는 물건도 뭐 제 입장에서는 모르겠지만은 관세를 팍 물려가꼬 좀 안 들어오게 한다든지 또 시장이 살게끔 하다든지 그라고 평생에 시장에 살아요. 우리는 사는 걸. 우리 창신동에는.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평생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제가 맨날 얘기합니다만은 을로만 살아요. 갑을을 따졌을 때 시장은 갑이고 우리는 을로써. 시장이 너 이렇게 하라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고. 거 먹고 살아야 되니까. 대신 내가 이런 얘기 하면은 상인들을 위해서 하는 얘기 같습니다만은 우선은 장사가 잘 되요, 사실. 그래야 인자 우리도 가게에서 이렇게 해가지고 뭐 공장이 올라간다던지 그런디 누구든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만은, 옛날 그 옛날에 내가 옷 한 장에 천(1,000)원을 받았으면 지금은 어떠냐, 지금은 구백(900)원 받아요, 구백(900)원. 시대가 이렇게 물가는 올라갔는데. 그러니까 왜 그러냐하면은 먹고 살다 보니까 서로 제 살 깎아먹는 식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 것도 좀 어떤 체계적으로 잡히고 시장이 살라면은 조금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고 또 우리 그 진실한 국민들도 그, 이랬으면 쓰겠어요. 되도록은 대한민국 조금 더 비싸더라고 대한민국 옷 사 입고 좀 한국 옷 좀, 좀 시장 와서 사 입고 저도 우리도 메이커 옷을 만들기는 하거든요. 라벨만 바꿔요 라벨만. 그런 옷 거가 사지 마시고 시장 오면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일도 많아지고 그런 입장이 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면담자 : 그 예전 초기에도 말씀드렸지만 창신동 봉제 마을이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된 거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미래 유산이요?] 네 서울시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긴긴 거를 떠나서 근현대 서울시의 발전을 핵심적으로 이루어낸 곳이라던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라던가 해서 미래 유산으로 지정을 하고 있는데 이 창신동이 서울시 미래 유산 중 하나로 되어 있어요. 그거에 대해서는? 구술자 : 창신동이 역사 미래 유산이라 하면은요. 그 지금까지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옛날에 그 옷을 만들면서 창신 이(2)동에서 한창 호황 때 우리 나라 경제를 살릴 때는 했었으니까. 그때는, 그때는 왔지만은. 지금은 또 뭐가 있냐하면 종로의 중심부에 있어서 낙산 공원 뭐 그런 건 잘해놨습니다. 진짜로 우리 저 내가 하나 이 얘기 어쩌다 두(2)번 했습니다만은, 김영종 구청장님한테 참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은 종로구에서 그 양반이 그 명품도시 막 그런 게 인자 그 뭐 앞으로 내 놓은 플랜카드거든요. 진짜로 그 옛날 것을 사랑하실 줄 알어. 진짜 사랑해. 뭐든지 깨끗해. 옛날에는 일주일에 청소하시는 분이 한(1) 번 하루 왔으면 많이 왔는데 지금은 뭐 일(1)주일에 세(3)번, 네(4)번 이렇게 오는데, 그래 그런 게 있는데 그런 유산이라던지 앞으로 또 그 내가 알기로는 창신동 자체는 봉제 공장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은, 앞으로 미래에 지금부터 실시해서 관광객들 많이 옵니다. 지금도 그렇고 중국인이라든지 일본사람도 많이 오고요. 해설자도 따로 편성이 되고. 이런 것이 앞으로 종로구 창신동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죠. 대신 저는 봉제인으로써 그런 밑거름 창신동은 자동으로 인자 이런 그 재생 사업에서 옛날 방식으로 살다보면은 더 나은 창신동이 되겠지만 살라면은 그 동안의 창신동을 이끌어 온 것이 봉제라면 봉제부터 살려주시고 순서가 그 다음에 순서대로 갔으면 쓰것어요. 지금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엊그제께도 삼십(30)명 관광객들이 저 낙산으로 올라가서 봉제를 구경하고 올라가시더라고 근데 그 올라가는데 다른 공장을 다들 우리 창신동은 입구에서부터 전부다 공장들이에요. 빠끔히 내다볼 거 아니에요. 관광객들이. 그러면 주인이 싫어합니다. 누가 우리 일하는 것을 보면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해. 그럼 문을 딱 닫아부러. 그런 것이 하지 않겠금. 그러지 않을라믄 어떠어떠한 방식을 연구를 하셔가지고 그것들은 이렇게 다 좀 오픈돼서 떳떳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면 앞으로 창신동도 더 발전하고 더 유명하게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고 길도 좀 어떻게 해야 되는데 길은 좀 재생에서 길은 될 수가 없고.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은. 면담자 : 회장님 자꾸 조금 오해가 있으실 것 같아서 말씀 드리면 창신동 자체가 미래 유산이 아니라 창신동에 봉제와 관련된 그 뭐랄까 공장도 그렇고 창신동 봉제 마을이 미래 유산이 된 것이기 때문에 [아 봉제마을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봉제를 통해 창신동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을 고민을 내고 뭔가를 발전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게 가장 일(1)순위가 맞고요. 그래서 봉제가 사실 없어질 수는 없을 거고 창신동이 봉제로써 다시 융성하고 대한민국 경제에도 역할을 줄 수도 있고 그런 차원이라고 이해를 해 주시면 될 것 같고요. 앞으로도 창신동이 더 발전하고 봉제인으로써 자부심과 자긍을 가지시고 더 오랫동안 번성하실 수 있게끔 저희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구술자 : 아이고 고맙습니다. 면담자 : 오늘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구술자 : 고맙습니다.
개요
동영상 제목의 개요 : 구분, 지역, 분야, 시기, 출처
구분 없음 지역 종로구 분야 산업노동
시기 2017.09.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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